『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2 혜공왕조」에 따르면 혜공왕 2년 정미(丁未) 7월 3일 각간(角干) 대공(大恭)의 적(賊)이 흥기하자 왕도(王都)와 5도(道) 주군(州郡)의 96각간이 서로 싸워 크게 어지러웠다고 한다.
이는 『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에서 768년(혜공왕 4) 7월에 일길찬(一吉飡) 대공과 동생인 아찬(阿飡) 대렴(大廉)이 함께 일으켰다는 반란과 동일한 사건으로 보인다. 『삼국유사』에서는 혜공왕 2년이라고 하였으나, 『삼국사기』 연표(年表)에 따르면 정미년은 767년(혜공왕 3)에 해당한다. 두 기록 사이에 1년의 시차가 있다.
한편, 『신당서(新唐書)』 「신라전(新羅傳)」에서 대력(大曆) 연간(766년~779년) 초반에 재상(宰相)들이 권력을 다투어 서로 공격해서 나라가 크게 어지러웠다고 한 것 또한 같은 사건을 기록하였다고 본다. 해당 정보는 768년(혜공왕 4)에 신라를 방문한 당나라 사신 귀숭경(歸崇敬)이 목격한 것으로 여겨지므로, 난이 발생한 시기는 768년이 맞다고 판단된다.
난의 지속 기간에 대해서도 『삼국사기』에서는 33일, 『삼국유사』에서는 3개월(三朔), 『신당서』에서는 3년이라고 하여 차이를 보인다. 『신당서』의 3년은 기간을 과장하여 기록하였거나, 772년(혜공왕 8) 발생한 대아찬(大阿飡) 김융(金融)의 반란까지 포함한 것일 가능성이 제기된 바 있다.
33일과 3개월의 차이에 대해서는 왕도(王都)에서 대공의 반란을 33일만에 진압하였고, 이후 반란에 연루된 지방 거주 진골 및 지방관들을 완전히 제압하는 데 3개월이 걸렸음을 반영한다는 해석이 있다.
각간은 신라의 17관등 중 가장 높은 이벌찬(伊伐飡)에 해당하는데, 『삼국사기』에 따르면 대공의 당시 관등은 일길찬이었으며, 당시 전국적으로 96명에 달하는 각간 관등 보유자가 존재하였을 것으로 보기도 어렵다. 대공을 비롯하여 재상가(宰相家)에 해당하는 이들이 다수 연루되어 함께 싸웠던 것을 뒤에 각간으로 기록한 듯하다.
96명의 숫자는 대공의 반란에 동조하였던 이들과 그 진압에 공을 세운 이들을 합하여 가리킨다고도 파악하나 확실하지 않다. 5도(道)는 왕도와 지방을 연결하는 주요 간선도로로서 『삼국사기』 지리지에 나오는 5통(通)에 해당하며, 5도 주군은 5개의 주요 간선도로 주변에 위치한 주군(州郡)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된다.
난 도중에 신성(新城)의 장창(長倉)이 불탔으며, 난의 결과 대공의 가문이 망하였다. 그 가문의 재산과 보물 · 비단과 함께 사량부(沙梁部) · 모량부(牟梁部) 등 동리(洞里)에 있던 역당(逆黨)들의 보곡(寶穀)도 왕궁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고려시대 보(寶)의 용례에 기반하여, 왕궁으로 압수된 보곡(寶穀)을 대공가에서 백성들에게 대여해 주기 위해 비축해 두었던 곡식으로 파악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