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중 ()

고대사
인물
신라 중대에 중시(中侍)와 장군으로 활동한 김유신의 손자.
이칭
이명
김윤충(金允忠)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미상
주요 관직
중시(中侍)|장군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김윤중은 신라 중대에 중시(中侍)와 장군으로 활동한 김유신의 적손(嫡孫)이다. 윤충(允忠)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성덕왕의 총애를 받았으나, 소원한 신하라는 이유로 질투하는 종실척리(宗室戚里)들이 있었다. 당나라에 의해 지목되어 발해 공격에 참여하였다.

정의
신라 중대에 중시(中侍)와 장군으로 활동한 김유신의 손자.
가계 및 인적 사항

김윤중(金允中)은 김유신(金庾信)의 적손(嫡孫)이다. 아버지는 김삼광(金三光)이며, 동생으로 김윤문(金允文)이 있었음이 확인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725년(성덕왕 24) 및 732년(성덕왕 31) 12월조 등에 보이는 ‘윤충(允忠)’과 동일인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주요 활동

성덕왕(聖德王) 때 대아찬(大阿飡) 관등으로 여러 번 왕의 은혜를 입자 왕의 친속들이 그를 질투하였다고 한다. 중추절(仲秋節)에 왕의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술자리에 부름을 받아 총애를 받은 뒤 절영산(絶影山)의 말을 하사받은 바 있다. 725년(성덕왕 24) 선종(宣宗)의 뒤를 이어 이찬(伊湌)의 관등으로서 중시(中侍)에 임명되었으며, 732년(성덕왕 31) 12월에는 각간 사공(思恭), 이찬 정종(貞宗) · 사인(思仁) 등과 함께 장군(將軍)이 되었다.

733년(성덕왕 32)에 당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발해를 공격하게 할 때 김유신의 손자 김윤중을 장수로 삼으라 하며 금과 비단을 하사하였다. 이에 그는 동생 김윤문 등과 함께 군대를 거느리고 당나라 군대와 합세하여 발해 공격에 참여하였다. 736년(성덕왕 35)에는 이찬 사인 · 영술(英述)과 함께 평양주(平壤州)와 우두주(牛頭州)의 지세(地勢)를 살펴보는 임무를 맡기도 하였다.

평가

김유신 사망 이후 그 후손들이 점점 중앙정계로부터 소외되었다고 보면서, 출신이 가야계였음이 그에 영향을 주었다고 보기도 하였으나, 적어도 손자인 김윤중 단계까지는 성덕왕의 총애를 받으며 중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단, 종실(宗室)과 인척(姻戚)를 두고 소원(疏遠)한 신하인 그를 가까이하는 것에 대한 불만이 기록되어 있어, 왕실과 중첩된 혼인 관계로 결합되어 있던 김유신 때와는 달리 친속 관계에 있어서는 왕실과 멀어져 있었다고 하겠다. 그를 질투하던 ‘종실척리’는 왕비 엄정왕후(嚴貞王后) 세력이며, 성덕왕이 이들을 견제하기 위하여 윤중을 가까이하였다고 보기도 한다.

참고문헌

원전

『삼국사기(三國史記)』

단행본

김수태, 『신라중대정치사연구』(일조각, 1996)
이기백, 『신라정치사회사연구』(일조각, 1974)

논문

김수미, 「신라 김유신계의 정치적 위상과 추이」(『역사학연구』 35, 2009)
조범환, 「김유신의 가계와 후손들의 활동 -‘가야계 출신이어서 가지는 한계’의 학설로부터 자유롭게 하기」(『신라사학보』 11, 신라사학회, 2007)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