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덕왕(聖德王) 때 대아찬(大阿飡) 관등으로 여러 번 왕의 은혜를 입자 왕의 친속들이 그를 질투하였다고 한다. 중추절(仲秋節)에 왕의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술자리에 부름을 받아 총애를 받은 뒤 절영산(絶影山)의 말을 하사받은 바 있다. 725년(성덕왕 24) 선종(宣宗)의 뒤를 이어 이찬(伊湌)의 관등으로서 중시(中侍)에 임명되었으며, 732년(성덕왕 31) 12월에는 각간 사공(思恭), 이찬 정종(貞宗) · 사인(思仁) 등과 함께 장군(將軍)이 되었다.
733년(성덕왕 32)에 당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발해를 공격하게 할 때 김유신의 손자 김윤중을 장수로 삼으라 하며 금과 비단을 하사하였다. 이에 그는 동생 김윤문 등과 함께 군대를 거느리고 당나라 군대와 합세하여 발해 공격에 참여하였다. 736년(성덕왕 35)에는 이찬 사인 · 영술(英述)과 함께 평양주(平壤州)와 우두주(牛頭州)의 지세(地勢)를 살펴보는 임무를 맡기도 하였다.
김유신 사망 이후 그 후손들이 점점 중앙정계로부터 소외되었다고 보면서, 출신이 가야계였음이 그에 영향을 주었다고 보기도 하였으나, 적어도 손자인 김윤중 단계까지는 성덕왕의 총애를 받으며 중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단, 종실(宗室)과 인척(姻戚)를 두고 소원(疏遠)한 신하인 그를 가까이하는 것에 대한 불만이 기록되어 있어, 왕실과 중첩된 혼인 관계로 결합되어 있던 김유신 때와는 달리 친속 관계에 있어서는 왕실과 멀어져 있었다고 하겠다. 그를 질투하던 ‘종실척리’는 왕비 엄정왕후(嚴貞王后) 세력이며, 성덕왕이 이들을 견제하기 위하여 윤중을 가까이하였다고 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