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위 576∼579.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사륜(舍輪) 혹은 금륜(金輪). 진흥왕의 둘째아들이며, 어머니는 박씨(朴氏)로 사도부인(思道夫人)이며, 왕비는 지도부인(知道夫人)이다.
진흥왕의 태자 동륜(銅輪)이 572년(진흥왕 33)에 죽었기 때문에 진흥왕에 이어서 즉위해 무열왕계(武烈王系)의 시조가 되었다. 당시에는 왕위 계승에서 이미 부자 상속제가 확립되어 있었다. 진흥왕의 둘째아들인 진지왕의 경우 진흥왕의 적손(嫡孫), 즉 동륜태자의 아들인 백정(白淨 : 뒤의 진평왕)이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왕위 계승권자가 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진흥왕대의 대표적 인물이었던 거칠부(居柒夫)의 지원을 받아 왕위를 찬탈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추측은 진지왕이 즉위하던 해(576년)에 거칠부를 상대등(上大等)에 임명해 국정을 맡겼고, 재위 4년 만에 정란황음(政亂荒淫)을 이유로 화백회의(和白會議)의 결정에 따라 폐위되었으며, 독자적인 연호를 가지지 못했던 사실에 근거한다.
577년(진지왕 2)에 이찬(伊飡)세종(世宗)이 서쪽 변경의 주군(州郡)으로 침입해 온 백제군을 일선군(一善郡 :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 북쪽에서 격파해 3,700여 명을 참획하는 전과를 올리고, 내리서성(內利西城)을 축조해 백제의 공격에 대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내리서성으로 통하는 길은 2년 뒤에 백제가 웅현성(熊峴城 : 지금의 보은군내로 비정)과 송술성(松述城)을 쌓음으로써 막히고 말았다. 578년에는 중국남조(南朝)의 진(陳)나라에 사신을 파견, 진흥왕 이래의 외교관계를 유지했으나, 재위 4년 만에 폐위되었다.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장사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