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성군 ()

대동여지도 중 평안북도 창성 부분
대동여지도 중 평안북도 창성 부분
인문지리
지명
평안북도 서북부에 위치한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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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평안북도 서북부에 위치한 군.
개관

동쪽은 벽동군·초산군·운산군, 서쪽은 삭주군, 남쪽은 태천군, 북쪽은 압록강을 건너 만주와 접하고 있다. 동경 125°00′∼ 125°40′, 북위 40°02′∼ 40°36′에 위치하며, 면적 1,322.56㎢, 인구 4만 6146명(1943년 당시)이다. 5면 36동리로 되어 있으며, 군청소재지는 창성면 임산동이다.

자연환경

강남산맥(江南山脈)이 뻗어내려, 대부분의 지역이 산악지대를 이룬다. 동쪽은 비래봉(飛來峰, 1,470m)·입봉(笠峰, 1,191m)·단풍덕산(丹楓德山, 1,159m)·구봉산(九峰山, 881m), 서쪽은 취봉(翠峰, 801m)·연대령(鳶臺嶺, 765m), 남쪽은 이화산(梨花山, 737m)·수양산(首陽山, 591m)·삼각산(三角山, 937m), 북쪽은 동주봉(東柱峰, 700m)·반덕산(盤德山, 1,140m), 중앙에는 당동산(唐洞山, 875m)·이가덕산(李哥德山, 755m)·당아산(○, 961m) 등의 산지가 솟아 있다.

특히 강남산맥이 군의 중앙부를 동서로 가로 뻗어 남북의 분수령을 이루며, 느즐령(緩項嶺, 589m), 방장령(防墻嶺) 등은 산맥의 안부(鞍部)로서 교통로로 이용된다. 영주천(暎洲川)과 갑암천(甲巖川)이 산맥의 북사면에서 발원하여 북류하다가 압록강으로 유입된다. 대령강(大寧江)의 지류가 남사면에서 발원하여 남류하다가 창성강과 합류하여 태천군의 대령강으로 유입된다.

하천 연안에는 비옥한 평야가 발달되어 벼농사의 중심지를 이루며, 청산장(靑山場) 등의 분지가 형성되어 있다. 지질은 시생대의 화강암과 편마암이 분포한다. 기후는 대륙성기후의 특징을 나타내 한서의 차가 심하다. 연평균기온 7.8℃, 1월평균기온 -13.1℃, 8월평균기온 24.7℃, 연강수량 938㎜이다. 첫 얼음은 10월 중순에, 마지막 얼음은 4월 초순경까지 언다.

역사

[고 대]

동창면에서 철기시대 유적이 발견되었을 뿐이며, 이 군에 신석기시대나 청동기시대에 사람이 살았는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이 지역은 본래 고구려영토였으나 고구려가 망한 뒤 발해에 편입되었고, 이어 여진족의 근거지가 되었다.

[고 려]

고려는 건국 후 북진정책을 고수함으로써 거란·여진·몽고 등의 북방세력과 충돌이 불가피하였고, 따라서 변경에 위치한 이 일대는 평온할 날이 없었다. 이곳은 고려 초에 장정현(長靜縣)이라 하였고, 1035년(정종 1) 재전(梓田)에 성을 쌓고 민호를 옮겨서 창주방어사(昌州防禦使)를 두었다. 거란의 침입 후 고려는 1033년(덕종 2) 압록강 입구에서 이 지역을 거쳐 동해안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쌓았다.

1216년(고종 3) 요나라의 금산(金山)·금시(金始) 두 왕자와 장수 걸노(乞奴) 등이 몽고군에게 패하여 9만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쫓겨왔을 때 이 지역도 많은 피해가 있었다. 1231년살례탑(撒禮塔)이 이끄는 몽고병의 침입으로 성읍이 폐허가 되었다. 1369년(공민왕 18) 이성만호부(泥城萬戶府)를 두고 진평(鎭平)·진강(鎭康)·진정(鎭靜)·진원(鎭遠)의 4군(軍)을 설치하였고, 상천호(上千戶)·부천호(副千戶)를 임명하여 이를 관장하게 하였다.

[조 선]

1402년(태종 2) 4월이성을 창주에 합쳐서 창성군으로 개칭하였으며, 1413년 10월 감무를 현감으로 바꾸었다. 1438년(세종 20) 6월창성도호부로 승격시켰고, 운산(雲山)의 청산촌(靑山村)을 갈라서 내속시켰다. 세조 때 진(鎭)을 설치하고, 병마절제사를 두어 북방경계의 중요거점으로 삼았다.

이곳이 북방경계의 요충인 것은 군수물자의 비축을 위하여 설치한 창고의 이름을 따라 전창(田倉)·신창(新倉)·동창(東倉)·대창(大倉) 등의 면 이름이 붙여진 점과 많은 성곽과 관방(關防)이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세종 때의 호구는 335호, 2,200명이었으며, 군정은 익군(翼軍) 160인, 수성군(守城軍) 18인이었다. 1559년(명종 14) 절제사를 파하였고, 1570년(선조 3) 창성진에 계원장(繼援將)을 두었다.

1622년(광해군 14) 명나라 모문룡(毛文龍)이 후금을 친다는 명목으로 철산군의 가도(枷島) 등에 주둔하여 군량과 무기를 강요하는 등 그 피해가 극심하였으며, 외교상으로도 조선을 난처한 처지에 빠지게 하였다. 이때 이 군도 군량을 모두 빼앗겼으며, 1628년(인조 6) 모문룡의 병사가 철산·창성·의주 등지에 둔전(屯田)을 일으키기도 하였으나 이를 제어하지 못하였다.

1681년(숙종 7) 계원장을 파하고 창성진을 속진(屬鎭)으로 삼았으며, 진영을 영변루로 옮겼다. 1691년 창성방어사로 승격하여 삭주와 벽동을 관할하였다. 『여지도서』에 의하면 1759년(영조 35) 창성부는 9방(坊) 20리로 호구는 3,597호, 1만 7466명이었다.

[근 대]

1895년의주부 창성군으로, 1896년평안북도 창성군으로 개편되었다. 1943년 수풍댐의 건설로 인한 침수로 창성면·전창면·창주면·우면 등 4개 면이 창성면으로 통합되어 5면으로 축소되었다. 1943년 이 군의 호구는 8,459호, 4만 6146명이었다. 3·1운동 때는 교회장로이던 강제희(康濟羲)를 중심으로 시위를 전개하여 당일 2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박은식(朴殷植)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의하면 이 군은 시위횟수 3회, 참가인원 3,000명, 사상자 100명, 부상자 50명이었다. 3·1운동 이후 상해와 만주의 독립전선과 연결되어 투쟁이 전개되었는데, 이때의 독립투사로는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이었던 강창제(姜昌濟), 274결사대원이었던 박기한(朴基寒), 광복군에서 활약한 강기준(康基俊) 등이 있다.

유물·유적

이 군은 국경방어지역으로 성벽이 많았고 군기나 식량을 비축하여 두는 창고가 많이 있었다. 따라서, 성이 많다 하여 창성(昌城)이라 하였고, 이 군의 5개 면 가운데 신창면·동창면·대창면 등의 면 이름에 창고를 뜻하는 창(倉)자가 붙어 있다.

성으로는 고려시대에 축성된 천리장성이 있었으나 수풍댐이 완공되면서 수몰되었다. 대창면의 서북쪽에 고성(古城)이 있고, 창성면에 서성(西城)과 고림성(古林城)이 있다. 1403년(태종 3)에 축성된 청산면당아산에 당아산성이 있다. 1943년 창성면 봉천동에 홍영선(洪永善)이 건립한 학무정(鶴舞亭) 등이 있다.

교육·문화

옛 교육기관으로는 창성향교가 1508년(중종 3)에 설립되어 많은 유생들의 교육을 담당하였으며, 1936년 수풍댐으로 수몰되어 창성면 인산동으로 이전하였다. 그리고 지방 여러 곳에는 서당이 설치되어 한문을 전수하였다. 조선 중기 이후 향교의 교육기능이 약화되고 서원이 설립되었는데, 1821년(순조 21) 청산면 학송동에 김응하(金應河)를 배향한 충렬사(忠烈祠)가 세워졌다.

근대교육기관으로는 1911년 창성공립보통학교가 처음 설립되었으며, 1914년 용연공립보통학교, 1922년 창주공립보통학교, 1929년 신창공립보통학교 등이 세워졌다. 특히, 용연공립보통학교는 대창면에 설립되었으나 청산면으로 이전하였으며, 대창공립보통학교가 세워지면서 청산공립보통학교로 바뀌었다. 1945년 당시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5개 교가 있다. 종교상황은 1945년 당시 개신교교회 6개가 있다.

이 고장의 설화로는 옛날 한 양반이 딸 셋을 두었는데, 하루는 딸들에게 “너희들은 누구 복에 먹고 사느냐?”고 물었다. “아버지 복에 잘 먹고 잘 살아요.” 하고 맏딸이 대답하였다. “그렇겠지, 아버지 복에 잘 먹고 잘 살겠지. 그러면 둘째야, 너는 누구 복에 잘 먹고 잘 사니?” 하고 묻자 둘째딸도 똑같이 대답하였다.

그러나 막내딸은 언니들과는 달리 “언니들처럼 아버지 복에 먹고 산다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내 복에 먹고 살지요.” 하고 대답하였다. 그 말을 들은 아버지는 괘씸하게 생각하여 구봉산의 험한 골짜기에서 살고 있는 숯 굽는 사람을 불러서 막내딸을 딸려 보냈다. 그 날부터 막내딸은 가난한 숯장수를 남편으로 섬기고, 오막살이집에서 열심히 일하며 살았다.

하루는 남편을 따라 숯을 굽는 곳에 갔더니 숯을 굽는 이맛돌이 몽땅 금덩어리인 것을 알았다. 그녀는 남편에게 그것을 빼내라고 하였더니, 남편은 그것을 빼면 숯을 굽지 못하게 되어 굶어죽는다고 하였다. 그래도 그것을 빼내게 하여 서울 장안에 가서 제 값대로 받아오라고 하였다.

남편은 아내의 말대로 장안에 가서 벌여놓고 있었더니 한 사람이 오더니 천 냥에 팔라고 하였다. “왜 그런 농담을 하십니까? 제 값대로만 주시오.” 하였다. 숯으로 엽전 두푼 서푼 받던 사람이라서 천 냥이라는 돈은 죽어도 만져보지 못하는 큰 돈이기 때문에 이 사람이 농담을 하는 줄 알고 이와 같이 말하였다.

사려고 하는 사람은 값을 적게 불러서 그러는 줄 알고 이천 냥에 팔라고 하였다. 그러나 제 값만 주고 사라고 하였다. 살 사람이 삼천 냥에 팔라 사천 냥에 팔라 하면, 제 값만 주고 사라고 하므로 값은 점점 더 올랐다. 그러다가 오천 냥에 팔렸다. 남편이 많은 돈을 가지고 돌아오자, 그녀는 99칸 집을 짓고 특별히 목수에게 부탁하여 대문을 “내 복에 먹고 살지.”라는 소리가 나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그녀의 아버지는 10년이 넘자 딸의 소식을 알기 위하여 방을 붙여서 마침내 딸의 집을 찾았는데, 으리으리한 집이었다. 방에 들어가자 “내 복에 먹고 살지. 내 복에 먹고 살지.”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딸의 말에 의하면 아버지가 괘씸해서 그런 소리가 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때 마침 숯 팔러 나갔던 사위가 들어오는데 보니, 옷차림과 용모가 훌륭하여 사위 중에서 제일 돋보였다. 그리하여 “내 복에 먹고 살지요.” 하던 말이 적중한 것을 알게 되었다. 막내사위는 열심히 공부하여 과거에 급제하고 다남다복하게 잘 살았다고 한다. 이는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살아가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 고장의 민요로는 「백발노인 장가가네」와 「한글풀이요」가 전하는데 다음과 같다. “찔레야 꽃은 장개가고, 석류야 꽃은 상객가네/만 인간아 웃지마라/귀동자를 바래간다.”, “가갸 가만히/거겨 거러서/고교 고사리를/구규 구수하게 끓여서/나냐 나도 먹고/너녀 너도 먹고/노뇨 노나 먹는다.” 이 밖에도 「많다타령」·「방귀요」·「무거미요」 등의 민요가 전한다.

산업·교통

대부분 산악지대로 이루어져 있어 농업적 기반은 미약하다. 압록강 하류를 중심으로 소규모의 평야가 발달하고 있으며, 대체로 밭농사 농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콩·옥수수·조·팥·메밀·감자 등이며, 특산물로는 면화·대마 등이 있다. 구릉지대에서는 축산업과 양잠업이 농가부업으로 이루어진다. 소·돼지·닭 등의 사육이 활발하며, 자연생 뽕나무를 이용하여 1년에 두 번 누에를 치고, 견직물과 작잠사(柞蠶絲)의 명산지로 알려져 있다.

임야가 전면적의 약 87%를 차지하여 임산자원은 풍부하나 교통수단이 불편하고 가공시설이 미비한 실정이다. 따라서, 창성강과 압록강의 수운을 이용, 뗏목으로 만들어 목적지까지 운반한다. 광업은 금·사금·텅스텐·인상흑연·구리 등의 매장량이 풍부하여 활발하다.

우리 나라 2대 금광지인 동창면의 대유동광산과 운산군의 북진금광이 이어져 대광구를 이루고 있다. 대유동광산은 1901년 프랑스인이 경영하던 것을 1939년 일본인이 채광하게 되었다. 광맥지질은 화강암과 편마암이며, 특히 화강암 중 함금석영맥(含金石英脈)이 발달되어 있다. 그 밖에 텅스텐광산인 삼평(三坪)·유전(楡田) 광산, 납광산인 평안(平安)·상수양(上水陽) 광산이 있다.

한편, 시장은 정기시장으로 4개 소가 있었으나, 수풍댐의 건설로 수몰되어 성풍동의 창성장이 폐시되었다. 창성면 신평동의 창성장이 1·6일, 신창면 화풍동 신창장이 3·8일, 청산면 학송동 청산장이 1·6일에 개시된다. 장시의 주요 거래품목으로는 식료품 등이 있으며, 특히 소주와 막걸리가 유명하다.

교통은 의주∼혜산진 간의 국도와 창성―신창―운산군,대유동∼운산군 북진 등을 잇는 도로가 연결되어 있어 편리하다. 또한, 압록강·창성강 등을 이용한 수운이 발달되어 있다. 주요 관광지로는 동창면 대동에 만병통치로 유명한 동창(느저리)약수, 창성면 중동에 남창약수, 청산면에 당아산성·청산팔경, 창성면에 창성남문, 대창면 봉룡동에 용이 승천하였다는 용연, 남녀 장수가 만나기 위하여 건넜다는 돌다리 장수교(將帥橋) 등이 있는데, 비래봉의 중봉에는 바위가 오백나한상이 줄지어 있는 것처럼 보여 유명하다.

읍·면

[대창면 大倉面]

군의 동남부에 위치한 면. 인구 4,538명(1944년 당시). 면소재지는 봉룡동이다. 장정현(長靜縣)지역으로서, 1895년 창성군 대창면으로 되었다. 적유령산맥이 뻗어내려 동쪽은 송곡산(松谷山, 1,022m), 서쪽은 취봉, 남쪽은 당아산, 북쪽은 구봉산 등의 산지가 솟아 있으며, 산간분지를 형성하고 있다. 창성강이 면의 중앙을 흘러 남류하다가 청산면을 지나 대령강으로 유입된다.

하천 연안에는 소규모의 평야가 발달하여 벼농사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산간지대를 중심으로 밭농사가 행하여진다. 주요 농산물은 쌀·콩·옥수수·조 등이다. 특산물은 면화·대마 등이며, 목초지에서는 소를 사육하고 있다. 임산자원이 풍부하며 목재는 창성강의 수운을 이용하여 뗏목으로 박천 등지로 수송되고 있다. 교통은 동창·신창·청산면 등을 잇는 도로가 연결되어 있어 편리한 편이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 교가 있다. 봉룡(鳳龍)·창서(倉西)·학성(鶴城)·고직(高直) 등 4개 동리가 있다.

[동창면 東倉面]

군의 동부에 위치한 면. 인구 9,281명(1944년 당시). 면소재지는 대유동이다. 본래 장정현지역으로서, 1895년 창성군 동창면으로 되었다. 강남산맥과 적유령산맥이 나란히 뻗어 있는 중간지역으로, 동쪽은 어자령(於自嶺, 474m), 남쪽은 구봉산, 북쪽은 양령(兩嶺, 776m) 등의 산지가 솟아 있으며, 산간분지를 형성하고 있다.

하천의 발달은 미약하며, 산간지대를 중심으로 밭농사가 행하여진다. 주요 농산물로는 콩·옥수수·조 등이 있으며, 특산물은 작잠이다. 대유동의 금광은 전국 제1의 금생산지로 노다지라는 말이 여기서 유래하며, 연평균생산량은 순금 3 톤 정도였다. 1897년 이후 40년간 프랑스인·미국인들에 의하여 경영되었으며, 그 뒤 일본인에 의하여 채굴되어 모든 이익은 그들이 독점하였고, 인근주민들은 노동력을 제공할 뿐이었다.

교통은 대창면·신창면과 벽동군·운산군 등을 잇는 도로가 연결되어 있어 편리한 편이며, 대유동∼운산 간의 도로는 금 수송을 위한 산업도로의 구실을 하고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 교가 있다. 대유(大楡)·이천(梨川)·두룡(頭龍)·대(大) 등 4개 동리가 있다.

[신창면 新倉面]

군의 중부에 위치한 면. 인구 6,981명(1944년 당시). 면소재지는 화풍동이다. 본래 장정현지역으로서, 1895년 창성군 신창면으로 되었다. 강남산맥이 뻗어내려, 동쪽은 입봉·단풍덕산, 남쪽은 이가덕산, 북쪽은 느즐령·당동산 등의 산지가 솟아 있으며, 산간분지를 형성하고 있다. 창성강이 면의 중앙을 흘러 남류하다가 대창면·청산면을 지나 대령강으로 유입된다.

하천 연안에는 평야의 발달이 미약하며, 산간지대를 중심으로 밭농사가 행하여진다. 주요 농산물은 콩·옥수수·조 등이다. 특산물은 양잠·대마 등이며, 소·돼지 등의 축산업도 이루어진다. 임산자원이 풍부하며 벌목된 목재는 창성강의 수운을 이용하여 뗏목으로 수송되고 있다. 교통은 창성·동창면 등을 잇는 도로가 연결되어 있어 편리한 편이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 교가 있다. 화풍(和豊)·연풍(鉛豐)·회덕(檜德)·완풍(完豊)·신안(新安) 등 5개 동리가 있다.

[창성면 昌城面]

군의 북부에 위치한 면. 인구 1만 7662명(1944년 당시). 면소재지는 옥계동이다. 본래 우면(祐面)지역으로서, 1943년 수풍댐의 건설로 창성·전창(田倉)·창주(昌洲)의 3개 면이 수몰되었으므로 우면으로 이전하여 창성면으로 통합하였다. 강남산맥이 뻗어내려 동쪽은 반덕산·비래봉, 서쪽은 삼봉산(三峰山, 897m)·미륵산(彌勒山, 658m), 남쪽은 소막령(小幕嶺, 533m), 북쪽은 동주봉 등의 산지가 솟아 있으며, 산간분지를 형성하고 있다.

영주천과 갑암천이 면의 중앙을 흘러 북류하다가 압록강으로 유입된다. 하천 연안에는 소규모의 평야가 발달하여 벼농사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산간지대를 중심으로 밭농사가 행하여진다. 주요 농산물은 쌀·콩·옥수수·조·팥 등이다. 특산물은 양잠·면화·대마 등이며, 소·돼지 등의 축산업도 이루어진다. 임산자원이 풍부하며 벌목된 목재는 압록강의 수운을 이용하여 뗏목으로 수송되고 있다.

교통은 의주∼혜산진 간의 국도가 면의 북부를 통과하여 창성을 중심으로 삭주군·벽동군과 연결되며, 신창면·대창면 등을 잇는 도로가 연결되어 있어 편리한 편이다. 주요 관광지로 수풍호, 중동에 남창약수터 등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 교가 있다. 옥계(玉溪)·간암(間巖)·중(中)·상(上)·봉천(峰泉)·신평(新坪)·유평(楡坪)·낙성(洛城)·금야(錦野)·임산(琳山)·달산(達山)·인산(仁山)·의산(義山) 등 13개 동리가 있다.

[청산면 靑山面]

군의 남부에 위치한 면. 인구 7,272명(1944년 당시). 면소재지는 학송동이다. 본래 운산군지역으로서 조선 세조 때 이 군으로 편입되었다. 적유령산맥이 뻗어내려 서쪽은 이화산·연대령, 남쪽은 수양산·삼각산, 북쪽은 당아산·취봉 등의 산지가 솟아 있으며, 산간분지를 형성하고 있다.

창성강이 면의 중앙을 흘러 남류하다가 대령강으로 유입된다. 하천 연안에는 소규모의 평야가 발달하여 벼농사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산간지대를 중심으로 밭농사가 행하여진다. 주요 농산물은 쌀·콩·옥수수·조 등이다. 특산물은 양잠 등이며, 소·돼지 등의 축산업도 이루어지고 있다. 교통은 대창면·신창면·운산군·삭주군 등을 연결하는 도로가 연결되어 있어서 편리한 편이다.

주요 관광지로는 당아산성·청산팔경 등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 교가 있다. 학송(鶴松)·용두(龍頭)·상수양(上水陽)·봉명(鳳鳴)·학봉(鶴峰)·양덕(陽德)·용전(龍田)·금성(錦城)·청룡(靑龍)·율곡(栗谷) 등 10개 동리가 있다.

광복 후 변천

평안북도 북부에 있는 군. 동쪽은 동창군, 서쪽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 남쪽은 대관군(신설지명)·삭주군, 북쪽은 벽동군과 접하여 있다. 동경 125°01′∼125°29′, 북위 40°15′∼40°35′에 위치하며, 면적 62㎢, 인구 3만 4292명(1996년 추정)이다.

1952년 12월 동창면·대창면·청산면이 동창군에 편입되고, 창성면과 신창면의 일부로 이루어졌다. 행정구역은 창성읍을 비롯하여 금야·옥포(玉浦)·달산·의산·인산·약수(藥水)·봉천·유평·어신(於新)·신평·낙성·연풍·풍덕(豊德)·회덕·완풍 등 15개 이, 유전노동자구로 되어 있다. 군 소재지는 창성읍이다.

[자연환경]

이 군은 산지가 95%를 차지하고 있다. 강남산맥과 피난덕산맥이 지나가며 비래봉(1,470m)·단풍덕산(1,159m) 등 높은 산들이 솟아 있는 남동부 지역은 평안북도 내에서 묘향산 일대에 다음 가는 높고 험한 산지대로 되어 있다. 그러나 수풍호쪽으로 가면서 산세는 점차 낮아져 제일 낮은 곳은 해발 200m 정도에 이른다. 하천은 군의 중부지역을 지나 수풍호에 흘러드는 영주천·남창천과 대령강에 흘러드는 창성강이 있다.

기후는 연평균기온은 7.3℃, 1월 평균기온은 -11.6℃, 8월 평균기온은 22℃이다. 연평균강수량은 1,000㎜이며, 첫서리는 9월 말에, 마감서리는 5월 초에 내린다. 지역간에 기온차가 심하여 비래봉 일대에서는 5월 말에도 눈이 녹지 않으며 수풍호 연안은 안개가 자주 낀다. 산림은 군 전체면적의 80% 이상을 차지하며, 산림자원과 산과일·산나물·약초 등 유용한 식물들이 풍부한 지역이다.

[산업·교통]

이 군의 주요 산업은 농업이며, 경작지는 평안북도에서 제일 적은 군으로 밭 86%, 논 4%, 과수원 4%를 차지하고, 주요 생산물은 강냉이·쌀·콩 등이다. 특히 강냉이는 곡물생산량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군 전지역에서 재배되고 있다.

공예작물은 참깨·잎담배생산이 많고, 산간지역의 특성에 맞게 축산업도 활발하다. 가축으로는 소·돼지·양·염소·토끼·닭·오리 등이 사육되며, 과수원이 140정보 조성되어 사과·배·복숭아도 산출된다. 공장은 식료·직물·의류·종이·연필·가구·철제용품·가죽가공·제약·농기계수리·농기구공장 등이 있다. 교통망으로는 창성―문지령―삭주,창성―왜령령―동창,창성∼봉천리로 연결된 도로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창성고등중학교가 있다.

참고문헌

『북한지지요람』(통일원, 1993)
『인물의 고향』-북한편-(중앙일보사, 1991)
『고려사』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
『지방행정구역발전사』(내무부, 1979)
『창성군지』(창성군지편찬위원회, 1981)
『평안북도지』(평안북도지편찬위원회,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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