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당시의 정치적 영역을 참고해볼 때 대가야의 것으로 이해되는 작품이다. 현재 남아 있는 부속구들의 용도가 정확하지 않기 때문에 부장 당시의 원형을 알기 어렵다.
금관은 대륜을 비교적 넓은 폭으로 제작한 후 그 위에 4개의 초화문을 세운 형식이다. 대륜의 아래, 위 테두리에는 점렬문을 이용해 평행렬로 구획했으며 안쪽에는 연속 능행문이 시문되었다. 입식의 꼭대기는 보주형으로 마감하고 입식에도 대륜에서와 같이 점렬문을 시문하였다. 입식과 대륜에는 작은 원형의 보요장식이 매달려 장식을 더하였으며 곡옥이 규칙적으로 매달려 있는 것이 특징이다.
금관과 함께 수습된 부속 금구는 금관과 연결시켜볼 수 있는 것과 귀걸이, 반지 등 금관에 부속되지 않은 것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육엽문 장식, 반구형 장식, 8릉 원추형 장식, 타원형 장식은 천이나 피혁 등의 모관에 부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본래 자리를 알 수 없으나 펜촉 모양의 몸체에 아래로 고사리 모양의 돌기가 있고 그 위에 원통형의 자리를 마련한 다음 곡옥이 착장된 금구 장식도 확인된다. 뒤에서 때려 무늬를 나오게 하는 타출 기법으로 제작한 육엽문 장식, 반구형 장식 등은 백제 무령왕릉의 것과 비교된다. 특히 8릉 원추형 장식은 입체감이 두드러져 이 시기 가야의 금공기술 발전도를 짐작하게 한다.
다음으로 귀걸이, 반지, 보요 장식이 양 측면에 달린 금환 4점이 수습되었다. 금환은 너비가 5㎝ 정도에 불과하여 손목에 끼우는 팔찌로는 볼 수 없다. 원추형의 수하식이 늘어진 세환식 귀걸이는 누금으로 수하식의 몸체가 장식되었고 누금 장식과 더불어 속이 빈 금구슬 장식을 첨가하여 장식성을 배가시켰다. 지산동45호분 1실에서도 이와 유사한 귀걸이가 출토된 바 있다.
1971년 국보로 지정된 금관과 비교되는 형식의 초화관으로는 고령 지산동 45호분 제1호 석실에서 나온 금동관 파편을 들 수 있다. 현재 초화형 입식 완형 2점과 금동관대 파편 등이 남아 있으나, 파편으로 보아 초화형 입식은 3점일 가능성이 있다. 대륜은 철지 위에 금동판을 덧씌워 만들었다. 입식은 수직으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완만하게 안으로 굽어 있어, 가죽이나 수피로 만든 관모에 부착시켰을 가능성이 제시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입식과 대륜에 은으로 장식된 못이다. 대륜에 박힌 못은 대륜을 뚫고 나와 다른 것과 결합시키기 위한 용도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일본 도쿄국립박물관[東京國立博物館]에 기증된 일본인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 소장품으로 경상남도 출토의 금관도 초화문의 입식을 가지고 있다. 이 금관의 대륜은 얇은 금판을 금실로 연결하였는데 이러한 기법은 1971년 국보로 지정된 금관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중앙에는 비교적 낮은 높이의 초화형 입식이 자리잡고 있고, 좌우에는 V자형으로 외반된 입식이 장식되어 있다. 이들 입식은 6개의 못으로 대륜에 고정되어 있다.
가야의 관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 같이 직각 맞가지식 입식이 전형적으로 착장된 신라의 관과는 달리 다양한 입식이 확인된다. 앞서의 초화식 관 이외에도 고령 지산동 32호묘에서 출토된 관과 같이 넓은 방패 모양의 입식이 장식된 예도 있다. 지산동의 관은 일본 후쿠이현[福井縣] 니혼마츠야마고분[福井懸二本松山古墳]에서 출토된 금동관과 형태가 유사하다. 합천의 옥전 M6호분에서는 신라식의 3단 맞가지식 관이 출토되었다. 그러나 제작 기법에서 신라의 것과 여러모로 달라 이 지역에서 신라의 것을 모방한 것으로 생각된다. 가야 금관의 입식인 초화문은 우리나라 전통의 수목숭배신앙과 관계된 것으로 이해되며 고대인들은 나무가 하늘로 오르는 길이자 생명이 하강하는 장소로 인식하였다. 이러한 수목신앙은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모두에서 확인된다.
1971년 국보로 지정된 초화문 입식의 금관은 대가야의 세력자였던 고령 지역 최고 수장층의 관으로 해석해 볼 수 있어 대가야가 5세기 말경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였던 상황과 연결될 뿐 아니라 가야 금공기술의 발전도를 짐작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