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모는 착용자의 신분을 나타내거나, 특별한 의식을 집행할 때 그 권위를 상징하기 위하여 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 나라에서 지금까지 알려진 고대의 관모나 그에 딸린 장식물의 대부분은 주로 삼국시대의 고분에서 출토된 것들이고, 그 가운데서도 특히 신라고분의 출토품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금관은 그 형태와 용도에 따라 의식용으로 생각되는 외관(外冠)과 일상용의 내관(內冠)으로 나누어질 수 있으며, 이와 똑같은 형태를 갖춘 금동제·은제·수피제(樹皮製)의 관모류도 상당수가 발견되고 있다. 관모들과 여기에 딸린 장식들은 지역에 따라 제작이나 의장수법에서 각기 독특한 양상을 보인다.
지금까지 고구려 유적에서 출토된 관모는 모두 3점에 불과하지만, 당시의 고분벽화를 통해서 관모의 일반적인 형태나 관식(冠飾)을 부착하는 방법 등을 살필 수가 있다.
평양 청암동 토성에서 출토된 금동관은 유운문(流雲文)과 방형으로 투각(透刻)된 테두리 위에 인동당초(忍冬唐草)로 이루어진 초화문의 입식(立飾)이 다섯 갈래로 세워졌으며, 그 중 가운데에 위치한 세 갈래의 사이에는 한 개씩 꽃모양의 입식이 있다. 테두리의 양쪽 가장자리 밑으로는 마치 리본 같은 장식이 길게 드리워져 있다.
평양 부근의 고분에서 출토된 금동관은 둥근 테두리 위에 세워진 삼산보관식(三山寶冠式)의 관모로서, 투각된 광배모양의 입식은 불상에 나타난 화관(花冠)을 연상하게 해 준다.
이상 두 개의 금동관이 그 형태로 보아 외관이라고 한다면, 평안남도 중화군 진파리1호분에서 출토된 투조금동구(透彫金銅具)는 내관으로서의 모습을 갖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관모는 반절 심장모양의 투각된 금동판 두 장을 겹쳐 만든 것으로서, 위의 둥근 테두리와 아래의 곧은 테두리를 따라 연주문대(連珠文帶)가 이루어졌다.
가운데에는 테두리에서 나타난 것과 같은 연주문대가 둥그렇게 이루어졌으며, 이 안에는 태양을 상징하는 삼족오(三足烏)가 투각되어 있다. 나머지 공간에는 위쪽에 봉황, 아래쪽에 두 마리의 용을 배치하여 전면을 투각시켰는데, 뒷면에는 비단벌레의 날개를 포개어 붙여 이 관모를 더욱 화려하고 세련되게 하였다.
이상 실물로 접할 수 있는 고구려의 관모는 극소수에 불과하지만, 당시의 몇몇 고분벽화를 통해서 우리는 또다른 관모 착용의 풍습을 알아볼 수가 있다. 무용총(舞踊塚)이나 개마총(鎧馬塚) 등에 나타난 벽화의 인물들은 머리에 띠를 두르고 띠에는 깃털이나 나뭇가지 같은 것을 꽂은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당시의 머리장식을 통해서 또는 금동관모에 나타난 초화문(草花文)이나 동물문(動物文) 등에서 자연주의적 발상을 엿볼 수가 있고, 여기에 새로운 불교적 요소가 결합되어 도안화되고 형식화되어 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에서 출토된 관모로서는 전라남도 나주시 반남면의 옹관에서 출토된 내·외관모 한 벌과 공주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각 한 쌍의 왕과 왕비의 금제관모장식이 있다.
나주옹관 출토 금동관 중 내관은 반원형의 금동판 두 장을 맞붙여 위쪽 둥근 가장자리에 테두리를 씌워 붙였다. 관모의 가장자리에는 간단한 인동문(忍冬文)이 둘러져 있고, 바탕에는 초화문이 안쪽에서부터 돌출된 점선으로 표현되어 있다.
세부의 의장(意匠)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앞서 말한 고구려의 진파리1호분 출토의 금동투각관모와 상통한다.
한편, 외관은 너비 3㎝의 둥근 테두리 위에 세 개의 입식을 세운 것으로, 입식들은 각기 가운데에 곧게 솟은 줄기를 중심으로 세 갈래의 가지가 뻗어 전체적으로 투각된 수목형의 모습을 나타나게 하고, 표면에는 군데군데 원형의 영락(瓔珞)을 매달았다.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금제의 관모장식들은 모두 순금판을 도려내어 줄기와 꽃잎을 나타낸 초화형으로서, 원형의 금제 영락은 왕의 관식에만 매달려 있으며, 왕비의 관식은 영락이 없이 보다 간결하게 만들어졌다.
금관을 비롯해서 갖가지 관모류가 가장 많이 출토되는 유적은 신라고분들이며, 그 중 대표적인 유적은 금관총(金冠塚)·금령총(金鈴塚)·서봉총(瑞鳳塚)·천마총(天馬塚)·황남대총(皇南大塚) 등으로 경주에 흩어져 있다.
여기에서 출토된 관모들 가운데 가장 특징적 유물은 신라 고유의 외관이고, 이 밖에도 금제 또는 금동제의 내관이나 관식구(冠飾具)와 함께 자작나무로 만들어진 내모류(內帽類)도 상당수가 발견되었다.
금관의 외관은 모두 금판을 오려서 만들었는데 띠모양의 테두리 위에는 입식을 세웠다. 이들은 고구려나 백제의 외관들과는 달리 모두 나무나 초화를 간략하게 도안화한 것으로 생각되는 산자형(山字形)의 직선적 장식을 3단(금관총·서봉총·황남대총) 또는 4단(금령총·천마총)으로 겹쳐올린 세 갈래의 입식을 세우고, 뒤쪽에는 사슴뿔모양의 장식을 비스듬히 세웠다.
금관의 표면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반구형(半球形)의 혹을 테두리를 따라 도드라지게 눌러 표현하였다. 여기에 곡옥(曲玉)과 둥근 금제영락을 규칙적으로 섞어 매다는 것이 보통의 예이고, 금령총 금관에서처럼 영락만을 매단 것도 있다. 입식의 모든 가지의 끝부분은 한결같이 보주형(寶珠形)으로 마무리되었다.
이들 금관 가운데 서봉총 금관은 두 개의 좁은 띠를 안쪽 머리 위의 중앙에서 직교(直交)시켜 내모(內帽)모양으로 만들고, 꼭대기에는 금판을 오려 만든 봉황형의 장식 세 개를 붙인 특이한 모양의 것이다.
이와 같은 대표적인 순금제의 외관 외에도 외형상으로는 같은 모양이지만 금동제로 만들어진 것도 상당수가 발견되었는데, 이들은 앞서 말한 순금제 외관에 비해서는 세부장식이 간단해지고 입식은 대개 산자형의 장식으로만 이루어졌다.
이들 전형적인 양식을 갖춘 금관 또는 금동관 외에도 형식상 특이함을 보이지만 외관의 일종으로 생각되는 일련의 것들이 있다.
경주 교동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해지는 소형의 순금제 관은 매우 얇은 금판을 오려서 만든 것으로, 테두리 위에 세 개의 입식이 붙어 있는데 산자형의 장식이 각 가지의 끝에만 이루어져 있으나, 끝부분이 모두 보주형으로 마무리된 수법은 앞서 전형적인 신라금관의 간략화 내지는 축소된 모습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테두리와 입식의 전면에 걸쳐 원형의 영락들이 달려 있으며, 입식의 꼭지 부분에는 이보다 큰 심장모양의 작은 영락들이 매달려 있다.
이 밖에도 경상북도 의성군 탑리고분 출토의 금동관이나 황남대총 남분의 은제관처럼 깃털모양의 입식을 세운 것들도 있다. 신라고분에서 출토된 관모류 가운데에는 이들 외관 외에도 앞서 고구려의 진파리1호분이나 백제의 나주옹관에서 발견된 것과 비슷한 모양을 갖춘 삼각형에 가까운 내관들이 있다.
그 대표적인 예는 금관총과 천마총 등에서 출토된 금제의 내관으로, 갖가지 투각문(透刻文) 또는 양출문(陽出文)으로 장식된 여러 매의 금판을 이어 맞추었고, 무지개모양의 위쪽 가장자리에는 테두리를 둘러 보강하였다.
이 밖에도 드물게는 은제 관(황남대총 남분)도 보이지만 금동제가 많으며, 특히 자작나무로 만들어진 같은 모양의 관모류는 매우 흔하게 발견된다. 이러한 특징은 삼국시대 전지역에 걸쳐서 가장 널리 유행되고 보편화된 형식이다.
관모장식은 대부분 날개모양[鳥翼形]또는 나비모양[蝶形]으로 만들어졌는데, 표면에는 별다른 장식을 하지 않은 은제나 금동제가 가장 보편적으로 발견되고 있으며, 금관총·천마총·황남대총 등에서 출토된 것들과 같이 전면을 정교한 수법으로 투각하고 표면에는 많은 영락을 매단 순금제의 관식도 나타난다.
가야고분에서 발견되는 관모류는 기본적으로 신라고분에서 출토되는 관모류와는 양식상 커다란 차이를 찾아볼 수 없다.
외관은 테두리 위에 산자형의 입식만 세운 간단한 형태의 것이 대부분이고, 대구광역시 달서구 제37호 제1석곽 출토의 외관처럼 사슴뿔 장식이 세워지고, 관모 안에 좁은 띠를 직교시킨 것도 있다. 내관이나 관식구에서도 신라의 그것과 양식상 비슷하고, 금동제의 관모가 대부분이다.
이 지역의 특수한 형태의 관모는 경상북도 고령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해지는 금관인데, 테두리 위에 3단으로 이루어진 네 개의 초화형 입식을 같은 간격으로 세웠다.
양쪽으로 뻗은 줄기는 그 끝이 아래쪽으로 처져 있고, 중간의 줄기는 위아래의 줄기에 비해서 매우 짧다. 이와 비슷한 모양의 금동관 조각이 고령 지산동 제5호분 1호석실에서도 출토된 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