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 주민의 긴급신고를 받고 1971년 문화재연구소(현, 국립문화유산연구원)에서 발굴, 조사하였다. 주위에는 석인을 갖춘 완전한 봉토분 등 상당수의 조선시대의 무덤들이 있었으나 토사의 유실로 노출된 회곽무덤 1기만이 조사되었다.
적갈색의 사질점토와 부식된 화강암반을 수직으로 파들어간 토광 속에는 삼물회(三物灰)로 이루어진 길이 2.3m, 너비 1.1m, 높이 1.1m 되는 남북장축의 회곽이 만들어지고 그 안에서는 부식된 널[木棺]조각과 약간의 인골이 수습되었다.
토광 동쪽벽면의 중앙을 파고 설치한 네모난 작은 감실(龕室)에는 사발로 뚜껑을 씌운 백자 항아리(높이 13㎝) 1점과 함께 작은 백자 명기(明器) 15종 34점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이들 명기들은 잔 · 접시 · 사발 · 항아리 등 그릇모양으로 만들어진 것과 사람모양의 여우(女偶) 2점과 남우(男偶) 3점인데 이 도용(陶俑)들은 모두 양팔을 앞으로 모아 팔짱을 낀 모습이고 눈과 눈썹, 머리부분에 철사(鐵砂)를 칠하여 검붉게 색감을 나타내었다.
이러한 부장방식은 조선시대의 묘제에서는 다소 특이한 것으로서 선사시대 이후 널이나 덧널[棺槨] 속에 안치되어오던 전통적인 부장방법에서 벗어난 새로운 형태의 자료라 할 수 있다. 출토된 백자 명기의 성격으로 미루어 무덤의 축조시기는 대략 조선 중엽인 16, 17세기경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