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지표조사가 보고되어 학계에 알려졌고, 1989년과 1990년의 2차에 걸쳐 국립광주박물관에 의해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유적은 섬 북쪽의 해수면과 맞닿는 비교적 낮은 언덕 자락에 형성된 조개더미로서, 조사 당시 상당부분이 경작과 태풍으로 교란, 훼손된 상태였다.
층위는 크게 4개의 퇴적층으로 이루어져 다시 7개의 작은 층-IV·Ⅲ(a, b, c)·Ⅱ(a, b)·I-으로 구분되었다.
각 층위에서는 갖가지 토기류를 비롯한 석기류·뼈연모·꾸미개 등 인공 유물과 여러 종류의 조개껍질·짐승뼈 등 신석기시대의 조개더미에서 흔히 출토되는 많은 양의 유물들이 수습되었다.
토기는 바리·보시기·단지 등 비교적 단순한 형태의 것들이다. 그러나 무늬구성에 있어서는 덧무늬·굵은금무늬·가는금무늬·손톱무늬·점줄무늬 등 매우 다양함을 보인다. 이 밖에 붉은칠토기와 민무늬토기[原始無文土器]도 출토되었다.
특히, IV층에서 출토되어 완형으로 복원된 덧무늬토기는 크기나 형태, 무늬구성 등에서 이 지역에서는 전례가 없는 것으로서, 남해안지방 신석기문화의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석기류는 돌날이나 찍개류, 도끼 등 뗀석기가 대부분이지만, 도끼날 중에는 날의 일부 또는 전부를 갈아 날카롭게 만든 것도 있다.
고기잡이 연장 중 이음돌낚시는 우리나라의 동해안 및 남해안과 일본의 일부지역에서 출토되는 특징적인 유물이다. 이것은 이 지역에서 이루어진 어로문화 교류의 실상을 보여주는 실증적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조개더미에서 위아래로 겹친 상태로 드러난 2기의 집자리는 모두 중앙에 화덕을 갖추었다. 제2호 집자리에서는 기둥구멍이 나왔으며, 제1호 집자리에서는 구멍 대신 납작한 판돌로 된 2개의 기둥받침이 바닥 위에 놓여 있었다.
연대는 출토유물과 유구의 성격으로 보아 우리나라 신석기시대의 비교적 이른 시기에 속하는 것으로 보이며, 방사성탄소연대 측정결과 4285±195B.P., 4270±200B.P.의 연대치가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