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로는 인류가 불을 이용하기 시작하면서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신석기시대의 움집터에서도 화로자리[爐址]가 발견되고 있다. 이 시대의 화로는 음식물을 익히고, 흙을 빚어 그릇을 만들거나 방추차(紡錘車) 등을 제작하여 말리거나 굽는 일에 이용되었다.
이러한 일은 결과적으로 생활 양식을 변화시켰다. 고구려에서는 이동할 수 있는 화덕을 만들어 썼는데 무쇠를 부어 만든 화덕이 유행하였고, 고분의 부장품으로 채택되기도 하였다. 솥을 걸 수 있는 자리와 바람이 통하고 숯을 지필 수 있는 부분과 연기가 빠져나갈 굴뚝이 한꺼번에 만들어진 형태이다.
이러한 화덕은 때로 규모를 크게 하여 설비하기도 한다. 여러 사람의 음식을 만들어야 하는 부잣집이나 벼슬이 높은 집에서는 취사장을 따로 만들고 반빗간이라 부르는데 거기에 거대한 화덕이 만들어진다.
안악 제3호분의 벽화에서도 그런 반빗간과 화덕을 볼 수 있다. 서라벌 동궁(東宮)터전이라는 안압지에서는 흙을 구워 만든 토기질(土器質)의 화덕이 출토되었다. 키가 큰 항아리를 얹은 듯한 형태에다 아궁이와 굴뚝과 솥을 걸 자리를 만들었다.
조선시대에 차[茶]를 다려 먹던 풍로와 비슷한 형상이다. 조선시대의 일부지방 사람들은 화강암을 다듬어 화덕을 만들어 쓰기도 하였다. 이는 흙을 빚어 만드는 임시적인 것에 비하여 영구적인 구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제주도의 산간마을에서는 지금도 대청에 화강석으로 화로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또, 부엌에서는 작고 큰 냄비나 솥 여러 개를 나란히 걸 수도 있는 화덕을 설치하기도 한다. 온돌이 발달하기 이전까지는 화덕이 중심이었으나, 아궁이와 부뚜막이 본격적으로 설치된 이후로는 간이형이거나 여름철의 일시적인 필요에 따라서만 만들어지게 되었다.
화로나 풍로는 이동식인 것과 설치용의 두 가지가 있어, 이동형인 것에는 나무·오지·구리·놋쇠·무쇠로 만든 것이 있고, 설치용에는 돌 셋을 놓은 것, 흙을 빚어 쌓아 만든 것, 향로처럼 만든 것 등이 있다. 아주 고급용으로 음식 익히는 데 쓰던 것은 신선로(神仙爐)로 그릇과 화덕이 함께 달린 형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