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는 차나무의 어린 잎을 따서 만든 음료이다. 곡류나 식물의 잎·꽃·뿌리·껍질, 약재 등으로 만든 기호음료 전체를 칭하기도 한다. 차 잎의 채취시기 또는 가공방법에 따라 여러 가지 차가 제조된다. 828년 신라 흥덕왕이 왕명으로 지리산에 차나무를 심은 이후로 널리 퍼졌다. 신라시대에 승려와 화랑도를 중심으로 성행하다가 불교문화가 꽃핀 고려시대에 왕실·귀족·사원을 중심으로 차 문화가 만개했다. 이후 쇠퇴기도 있었지만 기호식품화되면서 점차 취미생활과 연결되고, 다시 일상생활의 도(道)를 끽다(喫茶)와 관련지은 다도까지 등장할 정도로 발전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곡류로 만든 율무차 · 옥수수차, 여러 식물의 잎으로 만든 두충차 · 감잎차 등, 과실류로 만든 유자차 · 모과차, 꽃이나 뿌리 · 껍질 등으로 만든 국화차 · 인삼차 · 귤피차, 약재로 만든 쌍화차 등과 같이 기호음료 전체를 칭하기도 한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의 차란 차나무의 잎을 의미하는 것이고, 일반적으로 말하는 율무차 · 인삼차 등은 탕(湯)에 속하는 것이다.
차는 처음에는 음료수의 일종이거나 약용으로 쓰였지만 차차 기호식품화되면서 취미생활과 연결되고, 다시 일상생활의 도(道)를 끽다(喫茶)와 관련지어 다도(茶道)로까지 발전시켰다. 차에는 작설차 · 납전차 · 납후차 · 우전차 · 전차 · 말차(抹茶) 등 다양한 종류가 있는 것 같으나, 이것은 차잎의 채취 시기 또는 가공방법에 따라 나눈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불발효차인 녹차, 반발효차인 우롱차, 발효차인 홍차로 구분된다.
녹차는 차잎을 증기 또는 화열로써 차잎 중에 존재하는 효소인 폴리페놀옥시다아제(poly phenol oxydase)의 활성을 잃게 하여 산화를 막고 고유의 녹색을 유지시킨 것이다. 따라서 녹차는 증기를 사용하는 증제차와 볶아서 만든 볶음차로 나눈다. 우리 나라는 이들 두 종류를 다 제조하고 있으나 일본에서는 거의가 증제차이며, 볶음차는 구주지방(九州地方)의 일부에서만 제조하고 있는 실정이다.
반면에 중국의 녹차는 거의가 볶음차이며, 우롱차는 반발효의 차로 생잎을 일광에 40∼50분간 쪼여서 때때로 교반(攪拌:휘저어 함께 섞는 일)하여 균일하게 만든 다음, 실내로 옮겨서 1시간마다 10∼15분 정도 교반하여 잎 주변이 갈색이 되고 약간 발효가 되어 방향을 발휘하는 시점에서 볶아 만든다.
우롱차에 속하는 차 중에 포종차라고 불리는 착향차가 있는데, 이것은 우롱차보다는 햇볕에 건조시키는 것이나 방향의 발생, 실내로 옮겨서 놓아 두는 과정 등을 모두 약간씩 줄여 차잎의 갈색이 약간 일어난 시점에서 볶아 만든 차이다. 홍차는 차잎을 말려서 잘 편 다음, 잎녹의 산화효소에 의해 차 성분의 산화를 진행시켜 제조한 흑색의 차이다.
차는 7세기 전반인 신라 선덕여왕 때부터 있었다. 그것이 성행한 것은 828년(흥덕왕 3) 대렴(大廉)이 당나라에서 차 종자를 가져다 왕명으로 지리산에 심은 이후의 일이다.
이때부터 지리산을 중심으로 하는 영남과 호남 지방이 우리 나라 차의 본고장이 되었다. 이 지방의 기후 및 입지조건이 차나무 재배에 적합한 때문이기도 하였다. 한편 가야시대에 인도에서 차가 전래되었다는 설도 있지만, 이를 뒷받침할 만한 사료는 불충분하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일부 승려 및 화랑도들이 차를 마셨다. 사복(蛇福)이 원효(元曉)에게 차를 공양했다는 설화, 8세기의 보천(寶川) · 효명(孝明) 두 왕자가 오대산에서 수도할 때 문수보살에게 차를 공양했다는 기록, 경덕왕 때의 승려 충담(忠談)이 매년 3월 3일과 9월 9일에 삼화령(三花嶺)의 미륵불에게 차를 공양했다는 기록, 경덕왕이 승려 월명(月明)에게 차를 예물로 주었다는 기록, 진감국사(眞鑑國師) · 무염국사(無染國師) 등이 차를 마셨다는 기록 등은 이 시대 승려사회에 음다(飮茶)의 풍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해 준다.
또한 화랑이었던 사선(四仙:永郎 · 述郎 · 安詳 · 南石)들이 경포대 · 한송정 등지에서 차를 마실 때 사용한 석조 · 석정(石井) · 석지(石池) 등의 유물이 조선 초기까지 전해지고 있었다. 석정은 현존하고 있다.
이 시대의 승려나 화랑도 사이에 음다의 풍이 있었던 것은 이들이 이 시대의 선량(選良)이었고, 정신을 맑게 해 주는 차의 효능은 이들의 수행에도 밀접한 연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에는 음다의 풍이 보다 넓게 퍼져 있었다. 왕실 · 귀족 · 사원 등에 차가 유행했기 때문이다. 차는 주과(酒果)와 더불어 고려 궁중의 주요한 음식물 가운데 하나였다. 궁중에서는 연등회 · 팔관회 등의 국가적인 대제전이나 왕자 · 왕비 등의 책봉의식에 진다의식(進茶儀式)이 행해졌다.
또 차가 국제외교상 중요한 예물 중의 하나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송나라의 예물 중에는 용봉차(龍鳳茶)가 끼어 있었고, 고려에서는 거란에 뇌원차(腦原茶)를 보내기도 하였다. 국왕은 신하나 승려, 혹은 노인에게 차를 하사하기도 하였다. 궁중의 차에 관한 일은 다방(茶房)이라는 관부에서 맡아보았다. 귀족들 또한 차를 즐겼다. 귀족들은 송나라 상인으로부터 중국 차를 구입하거나, 좋은 다구(茶具)와 정원을 꾸미기도 하였다.
그리고 당시의 귀족계층에 속하는 승려들도 차를 즐겨 사원에 차를 진공(進供)하는 다촌(茶村)까지 생겨났다. 선가(禪家)의 다도(茶道)는 취미생활에 그치지 않고 수행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이 시대 문인들은 차를 주제로 한 시를 많이 남겼고, 차나 다구를 선물하는 풍속이 있었다. 사원에서는 차 끓이기를 서로 겨루는 명선(茗禪)이라는 풍속이 행해지기도 하였다.
또한 이 시대 음다풍의 성행은 고려청자의 발달에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의천(義天) · 천책(天頙) · 충지(冲止) 등의 고승과 이인로(李仁老) · 임춘(林椿) · 이규보(李圭報) · 홍간(洪侃) · 한수(韓脩) · 홍약(洪瀹) · 이연종(李衍宗) · 이색(李穡) · 이제현(李齊賢) · 이숭인(李崇仁) · 정몽주(鄭夢周) · 원천석(元天錫) 등의 지식인이 차를 즐겼다. 이들은 차시(茶詩)를 남겼다.
불교와 인연이 깊었던 음다의 유풍(遺風)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불교와 더불어 쇠퇴하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 시대에는 차가 고려 때만큼 유행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이 시대에도 왕실에서는 차례(茶禮)가 행해졌고, 사원을 중심으로 다도의 전통이 이어졌다.
조선 초기에는 이행(李行) · 서거정(徐居正) · 김시습(金時習) · 김종직(金宗直) 등에 의해 고려의 음다 유풍이 계승되었다. 궁중에서도 외국 사신을 맞이할 때 차례가 행해졌다.
그리고 중기까지도 차를 아는 문인들이 가끔 있었지만 임진왜란을 전후한 16세기경에는 음다의 풍이 쇠퇴하고 차에 대한 이해가 적어져 궁중에서까지도 차를 제대로 마시지 않은 것 같다. 명나라의 장수 양호(楊鎬)가 선조에게 “귀국에서는 왜 차를 마시지 아니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우리 나라 습속에는 본래 차를 마시지 않는다.”고 대답할 정도였다.
조선 초기는 물론 중기 이후에도 승려들 중에는 차를 마시는 예가 있었고, 남쪽지방의 사원에서는 적은 양이지만 차가 법제(法製)되면서 그 명맥이 이어졌다. 이 시대 선가의 다도는 조주다풍(趙州茶風)을 계승한 것이었다.
이처럼 사원을 중심으로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던 음다풍은 19세기에 이르러 다시 한번 성행하게 되었다. 대흥사의 혜장(惠藏) · 초의(草衣) · 범해(梵海) 등의 다승(茶僧)과 정약용(丁若鏞) · 신위(申偉) · 김정희(金正喜) · 홍현주(洪顯周) · 이상적(李尙迪) 등 차를 즐기는 문인들이 있었다.
초의는 『동다송 東茶頌』을 짓고 차를 재배하는 등 다도의 이론이나 실질적인 면에서 정리함으로써 우리 나라의 다도를 크게 일으켰다. 다도라는 용어가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정약용은 강진(康津)에서 18년 동안의 유배생활을 하는 중에 차를 즐겨 <걸명소 乞茗疏> 등의 시를 남겼고, 강진을 떠나면서는 그의 제자들과 함께 다신계(茶信契)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또 화엄사(華嚴寺) · 쌍계사(雙磎寺) · 대흥사(大興寺) 등의 사원에서는 차가 생산되었는데, 그 양은 적었다. 고려시대 이후로 차를 생산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이 거의 없었고, 토공(土貢)을 강요한 관인들의 주구(誅求)는 오히려 차의 생산을 저해하는 결과를 빚기도 하였다.
19세기 말에는 외국인들이 우리 나라 다업진흥(茶業進興)을 건의하곤 하였다. 1883년( 고종 20)부터 농상사(農商司)에서는 차의 재배를 관장하고, 차 재배를 위한 조사를 지시했으며, 1885년에는 청나라에서 차나무 모종 6,000주를 수입하기도 하였다. 이 무렵인 1885년에 안종수(安宗洙)가 쓴 『농정신편 農政新篇』에서는 차의 재배에 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한말에는 고관들 사이에 다화회(茶話會)라는 모임이 자주 열렸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들에 의해 차의 생산과 보급, 그리고 한국 차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물론 그 목적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위한 한 방편이었다. 광주에 무등다원(無等茶園), 정읍에 소천다원(小川茶園), 보성에 보성다원(寶城茶園) 등이 조성된 것도 일본인들에 의해서였다.
1930년대부터 고등여학교와 여자전문학교에서 다도가 교육되었는데, 1940년대에는 47개 여자고등학교와 상당수의 여자전문학교에서 교습되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의 다도교육은 일본의 다도를 우리 나라에 옮기려는 식민지교육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1960년대 이후 새로이 일기 시작했던 차에 대한 관심이 1970년대 후반부터 활기를 띠면서 발전하고 있다. 허백련(許百鍊)과 최범술(崔凡述)은 최근 우리 나라의 다도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생차엽을 저압의 증기에서 30초 전후 증제한다(증열). 이로써 효소가 불활성화하여 녹색을 보유하게 되고 향미를 형성하게 되며 차잎 성분의 용해성도 증가한다. 다음에 조유기 내에서 100℃ 전후의 열풍을 보내고, 수분 150% 정도까지 건조시킨다(조유). 이때 차의 온도는 30∼40℃이며, 원형질의 응고분리가 진행되어 잎이 말리고 구부러진다.
다시 차엽을 유렴기에 넣고 압박과 유렴을 거듭시키면(유렴), 중유기 내 60℃ 전후의 열풍하에서 가압, 건조된다(중유). 수분이 60% 정도가 되면 차잎은 정유기 속에서 가압, 유렴된다(정유). 이 조작으로 차의 형성이 정돈되고, 최후로 70℃ 이하의 온도에서 건조시키면 수분이 5% 이하로 된다(건조).
이상의 조작을 거친 것이 황차, 즉 정제되지 않은 차이며, 이것을 적당량 배합, 정형하여 최후에는 수분이 3∼4% 될 때까지 건조시켜서 제품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상은 기계적으로 만드는 차의 공정 절차이며, 일부는 가정에서 수유법으로도 만들어 마실 수 있다.
녹차는 채취 시기에 따라서도 종류가 분류된다. 즉 1번차라고 해서 차잎이 어린 5월경에 채취한 차와 2번차라고 해서 6월경에 채취하는 차, 그리고 8월경에 채취하는 3번차 등이 있다. 이들은 채취 시기에 따라서 성분에 차이가 생긴다. 일반적으로 녹차용의 품종은 질소아미노산 함량이 많으며, 타닌(tannin) · 카페인(caffeine) · 가용분이 적지만 홍차의 경우에는 이와 반대이다.
이들의 성분은 차잎의 적채 시기에도 영향을 받는다. 봄철이 끝날 무렵 맨 먼저 따는 어린 차잎은 1번차로서 질소 함량이 많아 품질이 가장 우수하며, 2번차와 3번차는 떨어진다. 또한 신차의 숙도가 진행되어 잎이 경화되면 품질이 급격하게 나빠진다. 새싹의 잎의 위치는 상위엽(어린 잎)일수록 질소나 카페인이 많아서 우수하다. 이렇게 차잎의 채취 시기와 장소 등에 따라서 차의 품질이 좌우된다.
볶음차는 400℃ 정도에서 가열한 솥에 차와 생엽을 투입시키고 10∼15분간 교반시키면서 효소작용을 못하게 함으로써 만들어 내는 방법이다. 투입시에는 증기를 용기 속에 모아 두고 후반은 개방한다. 이 조작으로 차잎은 부분적으로 100℃ 이상의 고온이 되면서 특유한 가열 향기가 생성된다.
이어서 유렴 후 이중 원통의 회전식 건조기로 75% 정도까지 건조시키고(수건), 최후에 동형의 회전건조기 내에서 차잎에 강한 압력을 가해 볶으면서 건조시킨다. 차잎은 이 공정에서 형태가 형성되는 것이며, 중국의 녹차는 대부분 이 방법으로 만들어서 제품화하고 있다.
홍차의 제조법은 생엽을 마포나 망으로 만들어진 위주상 위에 얇게 펴서 그늘에서 말리고, 중량이 35∼40%로 감소되게 한다. 다음에 유렴기에 걸어서 잎을 세렴하고 형상을 정돈한다. 이 조작으로 차잎의 세포가 파괴되어 효소의 작용이 쉽게 된다. 유렴엽은 발효실에서 약 25℃ 습도 90% 이상의 환경하에서 30∼90분간 숙성시켜 발효시킨다.
이 단계에서 차잎은 적동색이 되고, 취기(臭氣:비위를 상하게 하는 좋지 않은 냄새)도 없어지며, 방향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최후에 잎을 85∼90℃의 온도에서 건조시키고 수분 함량을 4∼5%로 저하시킨 뒤에 포장하여 시판하는 것이다.
차의 특성은 일반적으로 커피보다는 타닌과 카페인이 약간 많이 함유되어 있다. 차의 타닌은 녹차의 경우 카테킨(catechin) · 플라보놀(flavonol) · 로이코안토시안(leuco anthocyan) · 페놀카본산(phenol carbonic acid) 등이 존재하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주로 카테킨 유도체이다. 차잎 속에 있는 타닌의 75%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홍차는 유렴과 발효과정중에 산화효소에 의해 카테킨의 대부분이 데아후라빈(카테킨의 2배체에 상당하는 등색의 색소)이나 데아르비진(중합도가 높은 적색 내지 갈색 색소)으로 변화한다. 홍차 중에는 데아후라빈이 0.5∼1.4%, 데아르비진이 8∼16% 함유되어 있다. 단백질은 20∼30% 함유되어 있고, 그 중에서 순단백질은 알부민(albumin) · 글로불린(globulin) · 글루텔린(glutelin) 등에서 생긴다.
아미노산은 10여 종류가 함유되어 있는데, 전체의 60%가 데아닌(글루타민산의 에틸아마이드로서 품질이 좋은 지미와 감미를 함유하고 있음)이며, 그 외에 글루타민산(glutamic acid) · 아스파라긴산(asparagin acid) · 아르기닌(arginine) · 세린(serine) 등이 주가 된다. 당질은 서당 · 포도당 · 과당 등이 중요한 것이며, 덱스트린 · 펙틴 · 아라반 · 갈락탄 등이 소량 함유되어 있다.
차의 성분 중에서 중요한 것은 비타민 C로 전차 · 볶음차 · 번차 · 부차의 순으로 평균 250 · 200 · 150 · 60㎎ · 100g이 함유되어 있다. 다만 홍차는 발효과정에서 거의 없어진다. 그밖에 비타민 A · B₁ · B₁₂ · 나이아신 등의 함량도 많고, 판토텐산 · 엽산 · 비오틴 · 비타민 E의 작용을 갖는 토코페롤 · 비타민 P의 효과가 있는 루틴 등이 함유되어 있다.
차 속에는 그 밖에도 5∼7%의 무기성분이 함유되어 있으며, 그 중에서 50%가 칼륨, 15%가 인산이고, 그 외에 칼슘 · 마그네슘 · 철 · 망간 · 나트륨 등이 있다. 이것들은 차잎 그 자체에 함유되어 있는 것이므로 침출액으로 했을 때 영양성분의 전부는 기대할 수 없다.
차의 성분이 콜레스테롤을 저하시키는 작용을 함으로써 차가 심장병과 고혈압 치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하는 보고가 국내외에 많이 발표되어 있다.
즉 차는 적당하게 마시면 신경 계통을 자극하여 정신을 고무하고 신체를 강장하게 하며, 혈액의 수송을 촉진하고 근육 및 신경의 작용을 왕성하게 한다. 또한 자양을 도와서 근육을 건강하게 하고 동맥관의 기능을 양호하게 한다는 주장도 많은 학자들이 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녹차는 플라본 계통의 성분이 들어 있어서 모세혈관을 튼튼하게 해주는 작용을 함으로써 동맥경화증이나 뇌졸증을 방지한다. 더욱 좋은 것은 녹차가 강심작용과 이뇨작용을 겸하고 있기 때문에 체내의 노폐물을 깨끗하게 몸 밖으로 배설시켜 주는 작용을 해서 신경통이나 류머티즘 등의 통증을 낫게 해준다는 보고가 있다.
녹차의 효능에 대해서는 여러 문헌상의 연구가 나와 있으나 이들을 뒷받침하는 과학적인 실험 결과는 일본에서 몇 편 나와 있을 뿐 우리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일부 학자가 녹차를 고양이와 쥐 등에 투여해서 혈압과 심박수에 대한 영향 등 고혈압 및 동맥경화나 콜레스테롤치의 저하에 미치는 영향을 실험한 결과 외국 학자들이 발표한 대로 혈압과 콜레스테롤치가 저하된다는 결과를 확인했으며, 이는 앞으로도 계속 연구해야 할 과제 중의 하나이다.
그 밖에 차의 중요한 효능은 타닌성분으로 인한 차의 살균효과이다. 타닌은 단백질을 응축시키는 성질이 있어서 그로 인하여 전체가 단백질로 구성되어 있는 듯한 세균류에 타닌이 들어가면 세포가 응축하여 원형질분리를 일으킴으로써 사멸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녹차 속에는 비타민 C가 풍부하게 함유되어 있어서 스트레스 해소라든가 동맥경화의 예방 · 치료작용, 혈전형성억제작용 또는 발암억제작용 등 우리 몸에 매우 중요한 기능을 한다. 일반적으로 비타민 C는 열을 가하면 대부분 파괴되기 쉬운데, 녹차의 경우에는 뜨거운 물을 부어도 파괴되지 않도록 차잎을 증제할 때 비타민 C를 파괴시키는 산화효소를 사멸시키기 때문이다.
한편 발효차 중에서 특히 우롱차에는 불발효차 속에는 함유되어 있지 않은 효소가 있어서 음식물의 소화를 돕거나 지방의 분해를 돕는 작용을 한다. 또한 녹차나 우롱차 등에는 엽록소를 함유하고 있는 것도 있어서 그 속의 철분 등도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다.
또 녹차 속에만 있는 아미노산의 일종인 데아닌은 타닌성분과 함께 녹차 속에 균형 있게 함유되어 있어서 풍미에 중요한 구실을 한다. 우리 몸에 꼭 필요한 필수아미노산도 많이 들어 있어서 효과가 좋으며, 특히 풍미와 관계 있는 트레오닌 · 아스파라긴산 · 라이신 · 글루타민산 등이 있다.
녹차에는 또한 비타민 B₁ · B₂ 등과 나이아신 등이 함유되어 있어서 식욕을 좋게 하고, 신경 계통의 작용을 정상적으로 보유하며, 성장을 촉진시키는 등 좋은 생리작용을 한다.
녹차 속에 들어 있는 미네랄성분은 훌륭한 알칼리성식품의 기능을 하여 체질의 산성화를 막아서 컨디션을 좋게 하고 균형에 맞는 식생활을 돕는 기능을 한다. 카페인은 녹차에도 많이 들어 있어서 녹차 속에 함유되어 있는 타닌의 떫은 맛과 함께 쓴맛을 내어 녹차의 특성을 나타내는 좋은 성분 중의 하나이다. 카페인은 각성작용이 있어서 신경을 약간 마비시키는 작용을 하므로 머리를 맑게 하기도 한다.
그 밖에 최근에 녹차 속에 사포닌이 약 3% 정도 함유되어 있다고 해서 화제를 모으고 있다. 이 사포닌은 항암작용이 기대된다는 설이 유력하며, 그 외에도 소염작용이 있는 것이므로 인삼과 같이 효능이 좋다.
다도(茶道)는 차를 마시는 일과 관련된 여러 다사(茶事)를 통해서 심신을 수련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차는 처음에는 음료수의 일종이나 약용으로 등장했지만, 차차 기호식품화되면서 취미생활과 연결되었고, 다시 일상생활의 도(道)를 끽다와 관련지어 다도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다도가 성립된 것은 8세기 중엽 당나라의 육우(陸羽)가 『다경 茶經』을 지은 때부터 비롯된다. 그뒤 다도는 중국을 비롯한 우리 나라 · 일본 등에 널리 유포되었다. 우리 나라에도 삼국시대 말에는 차가 있었고, 9세기 전반경에는 성행하기 시작하여, 고려시대에는 귀족층을 중심으로 다도가 유행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사원을 중심으로 그 전통이 이어졌는데, 19세기 초기에 이르러 우리 나라의 다도는 다시 한번 일어났다.
특히 초의는 『동다송』을 지었고, 또한 차를 재배 · 법제하는 등 다도의 이론적인 면이나 실제적인 면에서 크게 정리, 발전시켰다. 초의는 다도를 “따는 데 그 묘(妙)를 다하고, 만드는 데 그 정(精)을 다하고, 물은 진수(眞水)를 얻고, 끓임에 있어서 중정(中正)을 얻으면, 체(體)와 신(神)이 서로 어울려 건실(健實)함과 신령(神靈)함이 어우러진다. 이에 이르면 다도는 다했다고 할 것이다.”고 하였다. 즉 초의에 의하면 다도는 정성스럽게 잘 만들어진 차로 좋은 물을 얻어 알맞게 잘 우러나게 해야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차를 끓여 마시기 위해서는 차그릇, 즉 다구(茶具)가 갖추어져야 한다. 말차가 성행하던 고려 때는 차를 가는 데 사용되는 맷돌인 다마(茶磨)가 있었다. 성종이 손수 차를 맷돌에 갈았다거나, 이인로의 <승원다마시 僧院茶磨詩>, 이규보가 다마를 선물받았던 일 등을 통하여 이 시대에 다마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개경에서 다마가 출토되어 실증적인 자료가 되기도 한다.
풍로(風爐)나 화로는 불을 피우는 다구이다. 화로에는 은으로 만든 은로(銀爐), 무쇠화로 등이 있었고, 풍로에는 흙으로 만든 전로(塼爐), 곱돌로 만든 것 등이 있었다. 물론 풍로나 화로 등이 다구로만 쓰였던 것은 아니다.
오늘날에는 전열장치를 한 풍로나 가스불 혹은 커피포트 등이 두루 쓰이고, 화로 등은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화로에 숯불을 피워 물을 끓일 경우에는 숯을 담아 두는 숯바구니 · 삼발 · 부손 · 부젓가락 등의 도구가 필요하다.
물을 끓이는 도구를 탕관(湯罐)이라고 통칭하지만 그 종류는 많다. 형태에 따라 다리가 달린 솥인 다정(茶鼎), 다리가 없는 솥인 다부(茶釜), 주전자형의 철병(鐵甁) 등이 있었고, 그 재료로는 금 · 은 · 동 · 무쇠 · 구리 · 자기 등이었다.
무쇠나 구리로 된 주전자를 쓸 경우에는 녹에 주의해야 한다. 금이나 은 등으로 된 것은 사치스럽다. 곱돌솥은 열의 전도가 늦지만 물이 쉽게 식지 않는 장점도 있다. 탕관은 물 끓는 소리가 맑은 것일수록 좋다. 오늘날에는 커피포트 · 양은주전자 등이 많이 쓰이지만, 운치는 없다.
끓은 물과 잎차를 넣어 차를 우려내는 다구를 다관(茶罐)이라고 하는데, 이는 급수(急須) · 차주(茶注) · 주춘(注春) · 찻병[茶甁] · 차호(茶壺)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 재료는 청자 및 백자 등의 자기로 된 것, 은이나 놋쇠 등으로 만든 것이 있다. 또한 그 형태에 따라 상파형(上把型) · 후파형(後把型) · 횡파형(橫把型) · 보병형(寶甁型)으로 구별된다. 이는 손잡이의 형태에 의한 분류이다.
다관은 공예성이 문제가 되지만, 실용적으로는 뚜껑 · 주둥이, 거르는 그물 등에 유의해야 하고, 다관을 사용할 때는 항상 안에 차 찌꺼기가 남지 않도록 해야 한다.
끓인 물을 옮겨 식히는 다구가 숙우(熟盂), 곧 물 식히는 그릇인데, 흔히 백자 사발 등이 사용된다. 찻잔은 그 재료로 금 · 은 · 옥 · 도자기 등이 쓰이고, 그 형태에 따라 잔[盃] · 주발[碗] · 종지[鍾] 등으로 구분된다. 크기도 다양하다.
찻잔은 흰색이 좋다. 찻잔 받침은 찻잔을 받치는 다구로, 차탁(茶托)이라고도 한다. 재료로는 도자기 · 은 · 주석 · 구리 · 나무 · 대나무 등이 사용되고, 형태는 원형 · 타원형 · 배형 등이 있다. 찻잔 등을 담는 쟁반이 다반(茶盤)인데, 대개 나무로 된 것이 좋다. 형태 및 크기는 다양하다.
찻숟가락[茶匙]은 차통의 차를 다관이나 다완(茶碗)에 옮기는 다구로 차칙(茶則)이라고도 한다. 말차용과 엽차용이 다르다. 차선(茶筅)은 찻사발에 찻가루를 넣고 탕수를 부은 다음 이를 휘젓는 데 사용하는 말차용 다구이다. 차전(茶筌)이라고도 하며, 대개 대나무로 만든다. 탕관에 물을 붓거나 끓은 물을 떠낼 때 사용하는 것으로 표주박이 있다. 조그만 박을 쪼개어 사용하거나 대나무로 자루가 달린 작자(杓子)를 사용하기도 한다.
찻수건[茶巾]은 찻잔 등을 닦는 데 쓰이는데, 차포(茶布)라고도 한다. 찻잔에 사용되는 것과 다른 다구에 쓰이는 것을 구분하는 것이 좋다. 무명베 등으로 만든 찻수건을 2, 3개 갖추고 번갈아 가면서 쓴다. 모든 다구를 거두어 진열하는 것을 구열(具烈) 혹은 찻상이라고 하는데, 상형(床型)과 가형(架型)이 있다. 나무나 대나무로 만든다. 고려 전기에 찻상에 다구를 진열하고 붉은 비단 상보로 덮었다는 기록이 있다.
법제된 차를 담아 보관하는 차통은 차의 진향을 보존할 수 있도록 잘 밀봉해야 한다. 재료는 은 · 주석 · 양철 · 자기 등이 쓰이고, 용기가 크지 않은 것이 차를 보관하는 데 좋다. 도자기류의 차통은 뚜껑이 잘 밀폐되지 않는 경우가 있어 주의를 요한다. 근래에는 흔히 양철로 된 차통이 쓰이며, 이중 뚜껑을 갖추고 있다.
차를 다리는 데 사용할 물을 담아 두는 그릇이 물항아리이다. 나무로 만든 물통, 도자기로 된 항아리, 청동물항아리 등이 쓰이곤 하였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고려청자물항아리가 소장되어 있다. 옹기류의 항아리를 사용해도 좋다. 찻잔을 씻은 물이나 차 찌꺼기 등을 담는 그릇을 개수통(改水筒)이라고 한다. 목재류 · 금속류 · 도자기류가 사용되고, 원통형 · 항아리 등의 형태가 있다.
차를 끓일 때 물은 매우 중요하다. 물은 차의 체(體)이기 때문이다. 차인들은 예로부터 물맛의 우열을 평하곤 했는데, 이를 품천(品泉)이라고 한다. 초의는 좋은 물의 여덟 가지 덕(德)으로 가볍고, 맑고, 차고, 부드럽고, 아름답고, 냄새가 없고, 비위에 맞고, 탈이 없어야 할 것을 지적하였다. 또한 급히 흐르는 물과 고여 있는 물은 좋지 못하고, 맛도 냄새도 없는 것이 참으로 좋은 물이라고 하였다.
고려 말 조선 초의 이행은 특히 품천을 잘하였다. 그는 충주달천(達川)의 물이 제일이고, 금강산에서 연원하여 한강으로 흐르는 우중수(牛重水)가 그 다음이며, 속리산 삼타수(三陀水)가 세 번째라고 평하였다.
신라시대의 다천(茶泉)으로는 사선(四仙)이 차를 달여 마셨다는 강릉 한송정의 다천과 효명(孝明)과 보천(寶川) 등이 차를 끓였다는 오대산 서대(西臺)의 우통수(于筒水)가 유명하였다. 이들 우물은 현재까지도 마르지 않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이규보가 기문(記文)을 쓴 바 있는 냉천정(冷泉亭)의 샘물이 유명하였고, 송악에 있던 안화사(安和寺)의 샘물 또한 이름이 있었다. 이숭인이 송악산 바위 틈에서 솟아나는 안화사의 샘물 한 병을 차 한 봉과 함께 정도전(鄭道傳)에게 선물한 바 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속리산 복천암(福泉庵)의 우물이 유명하였다.
신위(申偉)는 한보정(閑步亭)이라는 다실(茶室)을 짓고, 바위 밑에서 나는 샘물을 길어 차를 끓이곤 하였다. 김노경(金魯敬)은 두륜산 자우산방(紫芋山房)의 유천(乳泉)을 맛본 후 그 물맛을 높이 평가한 바 있고, 초의도 이 유천의 물맛을 자랑하였다.
좋은 샘물은 그때 그때 길어서 쓰면 좋지만, 샘물이 가까이에 없을 경우에는 물을 길어다 저장해서 쓰기도 한다. 물을 저장하는 데는 독이 적당하다. 새로 만든 독보다는 오래 쓰던 독이 좋고, 다른 용도로 쓰던 독은 좋지 않다. 독 아가리는 헝겊으로 덮는다. 물을 담은 독은 그늘진 마당 한가운데 놓고, 별과 이슬의 기운을 받게 하면 신령스러운 기운이 간직된다.
또 독 속에 흰 돌을 넣어 두면 물의 맛이 좋을 뿐만 아니라 물이 흐려지지 않는다고 전해진다. 현대의 도시인들은 대부분 수돗물을 쓰는데, 이를 다시 정수시키거나,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수도꼭지를 완전히 열어서 한참 동안 물을 흘려보낸 다음에 받아서 사용하는 것이 좋다. 한번 끓였던 물을 다시 끓인 물, 증류수처럼 김이 샌 물 등은 적당하지 않다.
옛날에는 화로나 풍로에 불을 피우고, 철병이나 차솥 등으로 물을 끓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가스불이나 커피포트 등이 흔히 쓰인다. 좋은 차맛을 내기 위해서는 물을 잘 끓여야 하는데, 이 때문에 차인들은 화력의 상태[火侯]나 물이 끓는 정도[湯侯]를 정확히 구별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곤 한다. 화력의 상태는 불꽃이 있는 숯불, 즉 활화(活火)가 좋다. 너무 센 불[武]이나 너무 약한 불[文]은 좋지 않다.
물이 끓는 정도를 분간하는 탕변(湯辨)에는 형변(形辨) · 성변(聲辨) · 기변(氣辨) 등의 방법이 있다. 물거품이 일어나는 정도를 보고 구별하는 방법이 형변이다. 물거품이 게눈[蟹眼] · 새우눈[蝦眼] · 물고기눈[魚眼] · 연주(連珠)와 같은 상태는 설끓은 물, 즉 맹탕(萌湯)이다. 물이 끓는 소리에 따른 구분이 성변이다. 초성(初聲) · 전성(轉聲) · 진성(振聲) · 해성(駭聲)의 상태는 맹탕이다. 무성(無聲)에 이르면 결숙(結熟)이다.
김이 나는 정도에 따라 변별하는 것이 기변이다. 김이 한 가닥, 두 가닥, 서너 가닥 나는 경우와 어지럽게 나는 경우는 모두 맹탕이다. 완전히 잘 끓은 물을 경숙(經熟), 그렇지 못하고 설끓은 물은 맹탕이라고 한다.
말차와 전차에 따라 그 끓이는 방법이 다르다. 말차는 찻가루 약간을 찻숟가락으로 떠서 다완에 넣고 끓은 물을 부어 다선(茶筅)으로 격불(擊拂)하여 거품이 잘 일게 해서 마신다. 전차의 경우에는 다관에 차와 끓은 물을 넣고, 차가 잘 우러났을 때 찻종에 따른다. 이때 차의 품질에 따라 탕수의 온도는 차이가 있게 된다. 대개 70∼90℃가 적당하다. 차를 다관에 넣는 것을 투차(投茶) 혹은 투교(投交)라고 한다.
투차의 방법에는 차를 먼저 넣고 탕수를 붓는 하투(下投), 탕수를 다관에 반쯤 붓고 차를 넣은 뒤 다시 탕수를 더 붓는 중투(中投), 탕수를 먼저 붓고 그 위에 차를 넣는 상투(上投) 등의 방법이 있다. 겨울에는 하투, 여름에는 상투, 봄 · 가을에는 중투를 하는 것이 좋다.
차의 1인당 기준은 3g, 3.3g, 3.7g 정도이다. 그러나 기호에 따라 가감할 수 있다. 물의 분량은 고급 차의 경우 20㎖, 중급 차의 경우 50∼90㎖, 하급 차의 경우 130㎖ 정도이다. 물론 물의 분량도 일정하지는 않다.
다관에서 차를 우려낼 때는 그 시간을 잘 조절해야 한다. 빠르면 차가 제대로 우러나지 않고 너무 늦으면 차의 향기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대개 고급 차의 경우 120∼150초, 중급 차의 경우 65∼120초, 하급 차의 경우가 30초 정도면 된다.
찻잔에 차를 따를 때는 차의 농도를 고르게 해야 한다. 차를 마실 사람의 숫자에 맞게 찻잔을 벌여 놓은 다음 찻잔을 왕복하면서 천천히 따른다. 대개 찻잔의 60% 정도를 따른다. 다관의 찻물은 마지막 한 방울까지 따라야만 재탕 때도 좋은 차맛을 보존할 수 있다. 차는 색(色) · 향(香) · 미(味) 세 가지가 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것이 좋다.
차의 색은 청취색(靑翠色)이 제일 좋고, 남백색(藍白色)은 다음이며, 그 밖의 황색 등은 품(品)에 들지 못한다. 차의 맛은 달고 부드러운 것을 상, 씁쓰레한 것을 하로 여긴다. 차의 향기는 독특한 것이기에 다른 향을 섞으면 좋지 못하다. 차는 색 · 향 · 미의 삼묘(三妙)를 감상하면서 천천히 마시는 것이 좋다.
명나라 서위(徐渭)의 <전다칠류 煎茶七類>에는 “차가 입에 들어가면 천천히 마신다. 단맛이 혀에 밀려오기를 기다리면 참맛을 얻을 수 있고, 다른 과일을 섞으면 향기와 맛을 모두 빼앗긴다.”고 하였다.
차를 마실 때는 손님이 귀한 것을 귀하게 여겼다. 장원(張源)의 <다록 茶錄>에는, “차를 마심에는 손님이 적은 것이 귀하다. 손님이 많으면 떠들썩하고 떠들썩하면 아취가 모자란다. 혼자서 마시는 것을 신(神), 두 손님을 승(勝), 3, 4명을 취(趣), 5, 6명을 범(泛), 7, 8명일 경우를 시(施)라고 한다.”고 하였다.
차를 끓여내고 마시는 등의 다사(茶事)가 끝나면 차그릇을 깨끗이 닦아 잘 정돈해 둔다. 차를 혼자서 마시거나 손님에게 접대하는 일에는 격식이나 예의도 문제가 되지만, 궁극적으로는 물을 끓여 간이 맞게 해서 마시는 일이다. 간이 잘 맞는 좋은 차가 되기 위해서는 물과 차 등이 알맞게 조화를 얻어 중정(中正)을 잃지 말아야 할 것은 물론이다.
다실의 분위기, 다구의 아름다움, 차의 성품, 차를 끓이는 여러 가지 일 등에 상징적인 의미를 담아 이를 다도정신이라고 한다. 한국의 전통 차시를 통하여 한국의 다도정신을 몇 가지로 유형화시켜 볼 수 있다. 다도의 수행은 각성하는 생활을 목적으로 한다. 차는 잠을 쫓아 준다. 잠은 혼미와 번뇌로 통한다. 한 잔 차로 두 눈이 밝아진다고 했으며, 차는 울적한 마음을 다스리고 막힌 가슴을 열리게 한다.
초의가 “차의 맑고 깨끗한 정기를 들여마실 때 대도(大道)를 이룰 날이 어찌 멀다고만 하랴!”고 했던 대도는 곧 깨달음이기도 하다. 차의 성품은 삿되지 않다. 즉, 무사(無邪)이다.
초의가 “예로부터 현성(賢聖)들이 함께 차를 사랑하였음은 차가 군자(君子)와도 같아 그 성품이 무사한 때문”이라고 한 것도 이를 강조한 말이다. 또한 한국의 다도정신에서는 중정이 강조되었다. 이는 중국의 다정신에서 강조하는 중용(中庸)이나 일본에서 강조하고 있는 화(和)와도 상통한다.
다도를 통한 수행은 고아한 인품을 추구한다. 이규보는 차를 ‘규중의 귀한 처녀’에 비유하였고, 이숭인과 김명희(金命喜)는 “좋은 차는 아름다운 사람과 같다.”는 구절을 즐겨 썼다. 이것은 물론 소동파(蘇東坡)의 차시에서 인용한 것이지만, 그만큼 차는 아름다운 사람과 같다고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차를 통해서 세속적이고 일상적인 것으로부터 초월하고자 하였다. “맑은 바람을 타고 티끌세상을 벗어나고자” 한 표현과 바람은 많다. 당나라 노동(盧同)이 쓴 다가(茶歌)의 영향이기도 하지만, 세속적인 것으로부터의 초탈을 희구하던 도가적인 다도정신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초탈이 세상을 등지는 것은 아니다. 다선일미(茶禪一味)는 한국은 물론 중국 · 일본 등에 두루 통하는 다도정신의 한 표현이다.
이규보의 차시 중에 “한 잔 차로 곧 참선이 시작된다.”는 구절은 차와 선이 한 맛으로 통하는 경지의 표현이다. 김정희는 초의에게 ‘명선(茗禪)’이라는 글씨를 준 적이 있고, 초의는 차를 마심은 곧 법희선열식(法喜禪悅食)이라고 강조하였다. 이와 같은 다선일미의 사상은 당나라의 백장(百丈) · 조주(趙州) 등에 의해 더욱 강조되었다.
다도는 불을 피우고, 물을 끓이며, 그 잘 끓은 물과 좋은 차를 간 맞추어 마시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취미생활이지만, 찻잔을 씻고 물을 길어 나르며 목마를 때 마시는 평범한 일을 통하여 진리를 발견하고 스스로를 닦아 가고자 하는 것이다. 선(禪)도 또한 평상심을 떠나 있지 않다. 이 때문에 차와 선은 한맛이 된다.
다례(茶禮)는 차를 마실 때의 예의범절, 즉 차에서 행사하는 예이다. 다실에서 차를 마실 때나 일반 가정에서 손님에게 차를 대접할 때 혹은 어떤 의식에 차를 사용할 때는 그 분위기에 어울리는 예의가 필요한데, 이때에 행해지는 모든 범절을 다례라고 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고려시대 이후부터 궁중의 여러 의식이 있을 때 다례가 행해졌다. 그리고 제례(祭禮)에서도 차례가 행해졌다.
조선 초기 성현(成俔)의 『용재총화 慵齋叢話』에 제사에 차를 쓴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고려 때부터 제례에 차가 사용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려시대 및 조선시대에는 궁중의 여러 행사에 다례가 행해졌다. 고려 때는 연등회 · 팔관회 등의 국가적인 명절과 중국의 사신을 맞이할 때 다례가 행해졌다.
또한 궁중의 중요 행사인 왕자의 책봉, 공주를 시집보낼 때, 원자 탄생을 하례할 때, 군신과 더불어 연회할 때 등에 행해졌다. 조선시대에는 중국 및 일본 사신을 맞이할 때 행하였다. 궁중에서 행한 다례는 의식의 성격에 따라 약간씩 달랐다.
고려시대에 행해진 팔관회에서의 다례는 다음과 같았다. 팔관회는 개경에서는 11월 14일[小會]과 15일[大會]에 거행되고, 서경에서는 10월에 거행되었다. 왼쪽의 집례관이 태자와 상공(上公)을 인도하여 세소(洗所)에 나가 손을 씻고 근시관이 차를 올리면, 집례관이 전각을 향하여 몸을 굽히고 권한다.
근시관이 올리는 차와 식사를 마련하고, 다음에 태자 · 공후백과 추밀 양쪽 부계(단상)의 시신을 위한 차와 식사를 마련하며, 좌우 집례관의 찬배로 태자 이후 추밀 · 시신이 모두 재배하고 자리에 나가 식사를 마치면 일어나서 읍례한다.
중계의 시신은 선 채로 식사를 받고 다음에 근시관이 차를 올린다. 다음에 태자 · 공후백 · 추밀 · 시신에게 차탕을 하사하면 집례관의 찬배로 모두 재배하여 차 받아 마시기를 마치고 읍례한다.
다음에 근시관이 차를 올리면 집례관이 전각을 향하여 몸을 굽혀 권하며, 그 다음에 태자 이하 시신이 차와 식사를 차리는데, 식사가 이르면 집례관의 찬배로 태자 이하의 시신이 모두 재배하고 자리에 나가 식사하고 마치면 일어나서 읍한다.
전각 위에서 차를 올리고 술을 올리며, 식사를 올리는 것과 태자 이하 시신에게 차탕을 하사하는 것 등은 모두 소회의 의식과 같이 한다.
조선시대 중국의 사신을 영접하던 다례에는 원접다례(遠接茶禮), 태평관(太平館)에서의 친림다례(親臨茶禮), 인정정(仁政殿)의 접견다례 등이 행해졌다. 중국 사신이 오는 길목에서 베풀어졌던 원접다례는 의주 · 정주 · 안주 · 평양 · 황주 · 개경 · 홍제원 등에서 행해졌다.
의식이 거행될 북쪽 벽에는 중국의 정사(正使)와 부사(副使)가 앉을 붉은 의자가 놓이고, 서쪽 벽에는 조선의 원접사와 영위사가 앉을 검은 의자가 마련된다. 대청의 기둥 밖 가까운 곳에 남북향으로 찻상인 다정(茶亭)이 놓인다.
주석으로 만든 찻병을 받든 집사(執事) 한 사람과 각기 찻종을 받든 네 사람이 동서의 기둥으로부터 들어와서 찻상 앞에 선다. 찻종을 받든 사람은 각기 찻종으로 차를 받고 잠시 꿇어앉았다가 올리면 사신들은 모두 내려와 선 채로 찻종을 잡는다. 사신들이 차 마시기를 끝내면 집사는 꿇어앉아서 찻종을 받는다. 이밖에도 인정전에서의 접견다례 등은 더 엄격하고 복잡한 절차에 따라 진행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사원에서 음다의 풍이 성행하였는데, 선가에도 일정한 다례가 행해졌겠지만 그 자세한 것을 알기는 어렵다. 아마도 당나라 백장 회해(百丈懷海)가 제정한 선승의 생활 규범인 『백장청규 百丈淸規』가 영향을 주었을 것인데, 여기에는 선가에서 행할 차례의 규범이 나열되어 있다.
유교적인 의식이 토대가 되어 있던 조선시대에는 다례 또한 유교의 영향을 받았다. 『가례』에 의하면, 관혼상제(冠婚喪祭)에 차례를 행하게 되어 있다. 관례 때는 사당에 고하며 절할 때 차례를 행하였다. 이때 주부가 점다(點茶)하여 찻병을 들어 아들에게 명하여 신전의 빈 잔에 차를 따르게 하거나, 며느리나 큰딸에게 명하여 차례를 행하기도 하였다. 혼례 때의 차례는 납채(納采) 때와 친영(親迎) 때 행하였다. 제례를 특히 차례라고 칭하는 것은 차로써 제례를 행하였기 때문이다.
『용재총화』에, “제사에는 여러 가지 과일과 인절미와 차와 탕과 술을 쓴다.”고 했던 것으로 보아 제사에 차가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옛적에는 제수로 다식(茶食)이 쓰였다. 다식에 대하여 이익(李瀷)은 “아마도 다식은 송나라의 대소용단(大小龍團)이 변한 것이 아닌가 한다. 차는 원래 끓는 물에 달이는 것인데, 가례에는 점다를 썼다. 즉 찻가루를 먼저 잔 속에 넣고 더운 물을 붓고 휘저었던 것으로 지금 제사 때 다식을 쓰는 것은 실은 점다에서 온 것이지만, 물건이 바뀌고 만 셈이다. 일반이 밤가루를 내어 물고기나 새 · 꽃 · 나뭇잎 모양을 만들어 쓰는 것은 곧 용단(龍團)이 변한 것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가례에 점다를 썼다는 것은 말차로 차례를 모셨다는 의미일 것이다.
차를 마시는 풍속이 유행하면서 우리 문화의 여러 방면에 영향을 주었다. 차를 주제로 한 시가 쓰였고, 다구는 공예에 영향을 주었으며, 차를 마시는 다실이나 정원이 생겨났다. 고려시대에는 음다의 풍이 유행하면서 정원이나 다실의 품격을 높여 주었다.
이자현(李資玄)이 선학(禪學)을 탐구하며 여생을 보냈던 청평산(淸平山)의 문수원(文殊院)에는 청평식암(淸平息庵)이라는 정원이 있었다. 이자현은 이곳에서 차를 즐기기도 하였다.
정안(鄭晏)은 유명한 차인이었는데, 세속의 영화를 벗어나 숲 속의 계곡에 숨어 살며, 그 거처를 일암(逸庵)이라고 하고, 세심정(洗心亭)이라는 조그만 정자를 지어 차를 끓여 마시며 마음을 씻었다. 혜심(慧諶)이 그 세심정기를 지었다.
최충헌(崔忠獻)의 모정(茅亭)은 성시(城市)를 벗어나지 않고도 운산(雲山)의 정취가 있어 사람의 마음을 맑게 해줄 수 있을 정도로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이규보가 기문을 쓴 바 있는 냉천정은 큰 바위가 있고, 차가운 샘이 고여 있으며, 10여명이 둘러앉아 차를 마실 수 있는 정자였다.
고려 말 조선 초기의 이행은 모옥을 짓고 살면서 차를 즐겼고, 성석연(成石珚)은 동산에 조그만 집을 지어 위생당(衛生堂)이라고 하고서 차를 끓였다. 이처럼 고려시대의 정원은 모정이 많았고, 차를 끓여 마시는 곳이기도 했다.
조선 후기의 차인들도 차 정원과 다실을 꾸며 놓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신위는 지방관으로 있을 때 한보정이라는 정자를 지어 차를 끓이는 곳으로 삼았다. 관아의 협문을 지나 좁은 길을 걸어 남산에 이르면 바위 아래 시원하고 깨끗한 옹달샘이 있는 곁에 세운 조그만 정자였다.
정약용은 강진의 다산초당(茶山艸堂)에서 정원을 꾸미고 차를 마시면서 10여년 세월을 저술생활에 몰두하였다. 정약용 · 초의 등과 교유했던 황상(黃裳)이 백적산(白磧山) 가야곡(伽倻谷)의 높은 언덕에 지었던 일속산방(一粟山房)은 돌샘[石泉]이 있는 차 정원이었다. 김정희는 그의 다실을 죽로지실(竹爐之室)이라고 하였다.
초의가 오랜 세월을 묻혀 살며 차생활을 즐겼던 두륜산의 일지암(一枝庵) 또한 유명한 차 정원이었다. 두륜산 꼭대기에 소나무와 대나무가 무성한 곳에 지은 일지암은 두 칸 정도의 초가였다. 뜰에 가득 꽃을 심었고 뜰 복판에는 연못이 있었으며, 추녀 밑에는 크고 작은 석조(石槽)를 마련해 둔 아름다운 차 정원이었다.
다구는 공예의 발달에 영향을 주었다. 특히 고려 때의 음다풍이 고려청자의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고려의 청자 다구로는 탕호(湯壺) · 비색소구(翡色小甌) · 청자다완(靑磁茶碗) 등이 있었다. 이 시기에는 철병과 다마 등이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왕실에서 사용되었던 은제찻잔(銀製茶盞)이 궁중의 유물로 전해지기도 한다.
조선 시대의 회화 중에는 차를 끓이는 장면이 흔히 등장한다. 차가 그림의 주제가 되기도 했던 것이다. 이경윤(李慶胤)의 그림 중에는 차 그림이 몇 점 있다. 다반 위에 달인 차를 내오는 시동(侍童)의 모습, 찻상 위에 차그릇이 있는 풍경, 또한 뱃놀이를 하면서까지 차를 끓여 마시던 풍습이 표현되기도 하였다. 차풍로 위에 차솥을 올려 놓고 시동이 부채질을 하면서 차를 끓이는 장면이 조선 후기의 많은 그림에 나타나고 있다.
김두량(金斗樑) · 심사정(沈師正) · 장승업(張承業) · 김홍도(金弘道) · 이인문(李寅文) · 이의양(李義養) · 이재관(李在寬) · 이한철(李漢喆) · 윤재홍 · 이명기(李命基) · 김수문(金壽門) 등의 그림 속에 차를 달이는 풍경이 묘사되고 있다. 이 중에서도 특히 김홍도의 <시명도 試茗圖>가 유명하고, 다승(茶僧)으로서 그림도 그렸던 초의의 <차공양도 茶供養圖>가 전해지기도 한다.
시명도는 가운데 파초가 있고, 그 뒤의 탁자 위에는 거문고와 책, 두루마리, 그리고 다반 위에 차그릇이 가지런하다. 그 옆 입 벌린 화덕 위에 배가 부른 찻주전자가 얹혀 있고, 더벅머리 시동이 부채질하는 그 옆에 사슴이 졸고 있는 한가로운 풍경이다. 김정희의 글씨 ‘명선(茗禪)’은 초의로부터 차를 선물받고 이에 답하기 위해 쓴 작품으로 유명하다.
끽다나 다구 등을 주제로 많은 시가 쓰였다. 이들 시를 ‘다시(茶詩)’라고 한다. 고려시대 이후로 승려나 문인들 사이에는 차가 중요한 선물의 하나였고, 차 선물을 받은 이들은 흔히 다시를 써서 화답하곤 했기에 많은 다시가 전해 오고 있다.
이규보는 노규선사(老珪禪師)로부터 조아다(早芽茶)를 선물받고 <유다시 孺茶詩>를 비롯한 8수의 다시를 남겼다. 이규보의 <유다시>를 읽은 손득지(孫得之) · 이윤보(李允甫) · 왕숭(王崇) · 김철(金轍) · 오주경(吳柱卿) 등이 이규보에게 화답시를 보내기도 하였다. 이들은 모두 차의 연원에 밝아 육우의 ≪다경≫을 무색하게 할 정도의 시를 썼다.
이인로는 <승원다마 僧院茶磨>라는 시를, 임춘은 <기다향겸상인 寄茶餉謙上人> · <다점주수 茶店晝睡> 등의 시를 썼다. 이들은 모두 무신집권기 죽림칠현(竹林七賢)에 속해 있던 문인들이다.
차를 즐기던 차인으로 학문과 시문으로 유명하기도 했던 이진(李瑱)은 해마다 정혜사(定慧社)의 만항(萬恒)으로부터 차를 선물받았고, 그때마다 으레 시로 화답했지만, 현재 그의 시는 남아 있지 않다.
이연종(李衍宗)의 <사박치암혜다 謝朴恥菴惠茶>는 그가 박충좌(朴忠佐)에게 받은 차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한 장편의 시이다. 고려 말 14세기 후반에 차를 즐기던 사람으로는 이제현 · 이색 · 한수 · 정몽주 · 이숭인 · 원천석 · 권정(權定) 등이 있었다.
이제현은 <사송광승기다시 謝松廣僧寄茶詩>를 남겼다. 그에게 차를 보내준 송광사의 승려는 그의 아버지 이진에게도 항상 차를 선물했던 혜감국사 만항의 제자였다. 그는 이 다시에서 “차는 술 마셔 불붙는 듯한 창자를 식혀 주고, 안개 서린 듯 흐린 눈을 맑게 해주는 참으로 좋은 약”이라고 하였다.
이색의 다시 10여 수가 전해진다. 그는 <영천 靈泉>이라는 시에서 샘물을 읊었고, 물이 끓는 소리를 즐기기도 하였다. 한수는 경상도 안렴사와 엄광선사(嚴光禪師)에게 차를 선물받고 쓴 2수의 다시를 남겼다.
정몽주는 <석정전다시 石鼎煎茶詩>에서 “눈보라 휘날리는 밤 그윽한 서재에 누워 돌솥에서 나는 솔바람 소리를 즐겨 듣는다.”고 읊었다. 또 이숭인은 <백렴사혜다 白廉使惠茶>에서 “좋은 차는 아름다운 사람과 같다.”는 소동파의 시 구절을 인용하기도 하였고, 차와 안화사(安和寺)의 샘물을 정도전에게 선물하면서 돌솥의 솔바람 소리 들어보기를 권하는 다시를 쓰기도 하였다.
고려 말 원주의 치악산에 은거했던 원천석은 <사제이선차혜다 謝弟李宣差惠茶>라는 시를 남겼다. 또한 고려 말 조선 초기의 권정은 남쪽의 옛 친구가 보내준 새 차를 선물 받고 쓴 <사우인혜다 謝友人惠茶>라는 시에서 “차가 사람의 잠을 적게 한다니 도리어 싫어라. 잠자면 걱정 잊는데 잠이 적으면 어찌할 것인가.”라고 차가 잠을 쫓아 주는 효능이 있음을 역설적으로 강조하기도 하였다.
고려시대의 선승들이 남긴 다시도 상당수 남아 있다. 대각국사 의천은 <화인사다 和人謝茶>라는 다시에서 “이슬 내린 봄동산에서 무엇을 구할 건가, 달밤에 차 끓이며 세속 근심 잊을까나.”라고 하면서, 선품(仙品)인 차는 수행하는 절간에 어울린다고 하였다.
천책은 어느 승려로부터 차를 받고 <사선사혜다 謝禪師惠茶>라는 시를 썼다. 그는 “맑은 바람이 겨드랑이에서 풀무질한다.”고 하여 차 한잔에 선사의 경지를 맛보았다. 혜심은 눈이 가득 내린 산사에서 눈이 녹은 물로 차를 다리며, <배선사장실자설다연 陪先師丈室煮雪茶筵>이라는 다시를 썼다. 충지(冲止) 또한 다시를 남긴 고승이다.
조선시대에 쓰여진 다시 또한 많다. 하연(河演)은 지리산에서 나는 차를 맛보고 <신다시 新茶詩>를 지어 차의 색 · 향 · 미의 뛰어남을 찬미하였다. 선다(仙茶)의 묘미를 즐기던 서거정은 김시습이 만든 차를 선물받고 <사잠상인혜작설차 謝岑上人惠雀舌茶>라는 시로 화답하였고, 또 <전다 煎茶> · <병중전다 病中煎茶> · <다조 茶竈> 등의 다시를 썼다.
김종직을 비롯한 그의 문인 남효온(南孝溫) · 정희량(鄭希良) · 조위(曺偉) 등도 차를 즐겼고, 또한 다시를 남겼다. 김종직의 <다원 茶園>이라는 다시는 함양 엄천사 북쪽에 다원을 만들고 그 기쁨을 노래한 것이다. 남효온은 <은당자명 銀鐺煮茗>, 정희량은 <야좌전다 夜坐煎茶> 등의 다시를 남겼다. 이목(李穆)은 장편의 다부(茶賦)를 지어 차의 5공(功) · 6덕(德)과 일곱 가지 효능(效能) 등을 노래하였다.
이밖에도 구봉령(具鳳齡)의 <독다경 讀茶經>, 심동구(沈東龜)의 <설수전다 雪水煎茶> 및 <차소동파전다운 次蘇東坡煎茶韻>, 이단하(李端夏)의 <음다 飮茶> 등의 다시가 전해진다. 또 김시습의 <양다 養茶> · <작설 雀舌> · <자다 煮茶> 등의 다시도 전해진다. 선승들은 조주풍의 차를 즐겼고, 서산(西山) · 태능(太能) · 일선(一禪) 등이 다시를 남겼다.
조선 후기에는 신위 · 정약용 · 김정희 · 이상적 · 홍현주 · 초의 · 범해 등의 다시가 유명하다. 신위는 <옥중전다>를, 정약용은 <걸명소>를, 김정희는 <혜산철명>을, 이상적은 <읍다>를, 초의는 『동다송』을, 범해는 <다가>를 각각 남겼다. 이 가운데에서도 <걸명소>, 『동다송』, <다가>는 뛰어난 작품으로 꼽힌다.
현재 우리 나라의 차는 전라도 및 경상도의 남쪽지방에서 생산되고 있다. 차의 재배면적은 약 1,400㏊이며, 연간 생산량은 약 1,200t 정도이다. 사원이나 가정에서 재배, 생산하는 경우도 있지만, 약 70여 크고 작은 제다업체에서 주로 생산하고 있다. 차의 연간 1인당 소비량은 약 40g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이상의 통계는 모두 1999년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현재 차관계 단체는 상당히 많이 있다. 한국차인연합회는 1979년에 창립되었던 한국차인회를 1984년에 개편한 것이고, 1983년에는 부산에서 한국다도협회가 설립되었으며, 11989년에는 한국차문화협회가 설립되었다. 재단법인 광주요다도문화연구회(廣州窯茶道文化硏究會)가 1980년에 설립되었다.
또 한국차인연합회에 등록된 각 지회는 그 수가 80개이고, 한국다도협회는 170개의 지회가 있다. 전국의 전문대학 및 대학의 차관계 모임은 50개 단체가 되고, 1982년 2월 6일에 전국대학다회연합회가 결성되기도 하였다.
다도를 교양선택 과목으로 교육하고 있는 대학으로는 숭의여자대학 · 부산여자대학 · 영남공업대학 · 국민대학교 등이 있다. 모두 1982년도 이후에 개강하였다. 부산여자대학에는 2001년도에 다도학과를 신설하였다. 그리고 성균관대학교 및 성신여자대학교의 특수대학원에는 다도전공을 1999년에 개설하였다. 1981년 태평양화학공업주식회사에서 설립한 다예관(茶藝館)은 차관계 문헌과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한국다도협회에서는 1983년에 다도박물관을 개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