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1년 2월 일본시찰단인 신사유람단의 수원으로 임명되어 조사(朝士) 조병직(趙秉稷)을 수행하였다.
이 유람단은 귀국하면서 각 방면에 걸친 상세한 문견사건(聞見事件), 즉 보고서를 제출하여 개화정책에 도움을 주었는데, 안종수는 일본의 농학자 쓰다[津田仙]와 접촉하는 한편, 농서를 구입해와서 서양의 근대농법을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소개한 『농정신편(農政新編)』을 편찬하여 1885년 광인사(廣印社)에서 간행하였다.
1886년 4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주사로 있었으나 김옥균(金玉均)의 여당으로 성토되어 마도(馬島)에 정배되었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전국적인 의병이 일어날 때 호남에서도 의병대장 기우만(奇宇萬)의 지휘 아래 장성 이하 13개읍이 휩쓸리고 있었다. 이때 나주부 참서관(參書官)으로 있다가 피살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