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개성(開城). 호는 화산관(華山館). 화원으로 사과를 지낸 종수(宗秀)의 아들이며, 김응환(金應煥)의 사위로, 후사가 없어 동생 명규(命奎)의 아들 인식(寅植)을 양자로 삼았다. 화원이었으며 찰방을 지냈다.
특히, 초상을 잘 그려 1791년(정조 15)에 정조어진원유관본(正祖御眞遠遊冠本) 도사(圖寫)의 주관화사(主管畫師)로 활약하였고, 1796년에는 김홍도(金弘道)와 「서직수초상(徐直修肖像)」을 합작하였다. 산수화는 화중인물과 바위의 모습, 필법 등에서 김홍도의 화풍을 짙게 반영하고 있어 독자적인 개성은 뚜렷하지 못한 편이다.
석양의 뱃놀이를 소재로 삼은 「장범선유도(張帆船遊圖)」에서는 김홍도의 영향을 따르면서도 괴석(怪石)에 명암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양감을 표현하는 등 서양화법을 단편적으로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이밖에 나비를 잘 그렸다고 하나 전하는 작품은 없다.
유작으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서직수초상」·「관폭도(觀瀑圖)」·「산수인물도」 등과 호암미술관 소장의 「송하독서도(松下讀書圖)」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