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개성(開城)이다. 자는 사수(士受)이고, 호는 화산관(華山館) · 오로(五露)이다. 화원으로 사과(司果)를 지낸 이종수(李宗秀)의 아들이자, 김응환(金應煥)의 사위이다.
28세 때인 1783년에 규장각 차비대령화원 선발에 응시한 기록이 있어 이미 그 이전에 도화서 화원으로 활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1784년에 강세황(姜世晃)의 71세 초상화를 제작한 이후로 강세황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었다. 1789년에는 동지사(冬至使) 수행화원으로 김홍도(金弘道)와 함께 베이징[北京]에 파견되었으며, 이후 화원으로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였다. 1790년에는 용주사 후불탱 제작에 주1으로 참여하였다. 1791년 정조 어진 도사(圖寫) 때는 어용(御容)을 그리는 주관화사(主管畫師)를 담당하였고, 1793년에는 그간의 활약에 대한 상전으로 장수도(長水道) 찰방에 임명되었다. 1796년의 정조 어진 도사에도 주관화사로 참여하였다.
이명기는 18세기 후반 중국을 통해 유입된 서양 화풍을 조선의 초상화법에 수용하였으며, 이후의 초상화법을 결정할 만큼 큰 영향을 남겼다. 그의 초상화에서는 필선과 주2에 의한 전통적인 묘사가 현저하게 줄었으며, 음영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입체적이고 생동감 도는 인물 표현을 구사하였다. 이명기의 작품으로 30여 점에 이르는 초상화가 전하고 있는데, 「강세황초상」, 「채제공초상(蔡濟恭肖像)」, 「서직수초상(徐直修肖像)」 등 많은 수가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명기의 작품 중에는 채제공, 유언호(兪彦鎬), 오재순(吳載純) 등 정조 대 명재상의 초상화가 다수 포함되어 있다. 당시 고위 관료들의 초상화를 전담할 정도로 이명기의 화법이 궁중과 사대부 사이에서 높은 명성을 얻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