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단 바탕에 채색하였으며, 크기는 세로 440㎝, 가로 350㎝이다. 한 폭의 비단으로 바탕을 삼았기 때문에, 일반적인 비단 한 폭 사이즈를 고려하면 특별 주문으로 제작했을 것으로 보인다. 1972년 경기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화면 중앙 상단에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약사불과 아미타불을 좌 · 우 양쪽에 배치하고, 그 주변에 제자들, 보살중(菩薩衆), 천부중(天部衆)을 그려 삼세불(三世佛)의 세계를 가시화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사찰의 주전각인 대웅전에 석가모니불의 설법 모임을 그린 영산회상도와 약사불의 설법 모임인 약사불회도, 아미타불의 설법 모임인 아미타불회도를 각각 3폭으로 조성하여 봉안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가 18세기 중반 이후에는 이 3폭의 불화를 한 폭으로 구성하는 형식이 자리를 잡았다.
이 불화 역시 석가모니불을 비롯한 세 부처의 설법 모임을 한 폭 형식으로 구현하였다. 석가모니불은 약사불과 아미타불에 비해 약간 높여 배치하였고, 삼존불 주위로 여러 존상(尊像)을 도해하였다. 석가모니불 아래쪽에는 석가불의 제자인 가섭과 아난이 있고, 그 아래쪽에 문수와 보현보살이 시립해 있다. 약사불 아래쪽으로는 그 권속인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아미타불 아래쪽으로는 관음보살과 세지보살이 있다.
삼존불 옆으로는 천부중(天部衆)인 제석천과 범천이, 그 바로 아래쪽에 두 보살이 배치되어 있다. 삼존불 위쪽으로는 십대제자 중 나머지 제자들과 용왕과 용녀, 2위의 타방불이 있다. 사천왕은 화면의 아래쪽에 크게 두 천왕이, 위쪽에 작게 두 천왕이 있다.
그리고 약사불의 주1에서 솟아나는 비로자나불과 아미타불의 육계에서 솟아오르는 노사나불을 주2처럼 아주 작게 그렸다. 석가불 · 약사불 · 아미타불의 삼세불의 세계와 비로자나불 · 노사나불 · 석가불의 삼신불(三身佛)의 세계를 함께 형상화한 삼신삼세불(三身三世佛)의 세계를 나타낸 것이다.
이 불화는 『수원지령등록(水原指令謄錄)』 등의 사료를 통해 1790년 사찰 창건 당시 김홍도(金弘道)와 이명기(李命基) 등 궁중 화원에 의해 그려졌다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서양 화법의 한 유형인 음영법이 부처와 존상의 안면을 비롯한 구름 표현 등에 다수 나타나고 있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창건 당시의 불화가 산실되고 화승들에 의해 새롭게 그려졌다는 설도 주장되고 있다. 그 외 창건 당시의 작품을 후대에 보수하였다는 설도 있다. 불화의 제작 연대와 봉안처, 시주자 등을 알 수 있는 화기(畫記)가 없는 데다, 18세기와 19세기의 양식적 요소가 공반되어 있기 때문이다.
화기는 없지만, 석가모니불 대좌 아래쪽의 사각형 공간 안에 흰색 안료로 쓴 축원문이 세로 4줄로 적혀 있다. ‘주상전하수만세 자궁저하수만세 왕비전하수만세 세자전하수만세(主上殿下壽萬歲 慈宮邸下壽萬歲 王妃殿下壽萬歲 世子殿下壽萬歲)’라는 왕과 왕실 인사의 안녕을 비는 축원 문구이다. 여기서 ‘자궁저하’는 사도세자(思悼世子, 17351762)의 부인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 17351815)를 의미한다.
그런데 문구를 자세히 살펴보면 희미한 3줄의 묵서를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적외선 촬영 시에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따라서 축원 문구는 원래 3줄이었는데, 어떤 이유에서 다시 쓸 필요가 있어 그 내용을 주색(朱色)으로 칠하고 다시 4줄을 쓴 것으로 보인다. 1790년 제작설을 주장하는 연구자는 처음에 삼전하의 축원문을 썼다가 자궁저하를 위해 개서했다고 본다. 이상적인 불국토를 표현하기 위한 채색과 필선, 축원문 등에서 왕실 원당에 봉안된 불화로서의 품격과 상징이 돋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