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싯돌
부싯돌
과학기술
개념
산소와 물질이 화합하여 연소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과학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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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불은 산소와 물질이 화합하여 연소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과학용어이다. 불은 빛과 열을 내는 에너지로서, 인류문명을 발전시킨 원동력이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크게 다른 존재로 군림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불의 발견과 이용에 있었다. 구석기시대부터 불은 어둠을 밝히고 추위로부터 인간을 보호해 주며, 음식물 조리, 흙을 빚어 굽거나 쇠붙이를 녹여 가공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아울러 생명력과 창조력의 상징이자 무서운 파괴력으로 사악함을 물리쳐 정화하는 힘을 가진 것으로 여겨져, 민속 등 여러 문화 속에서 예술로 승화되기도 했다.

정의
산소와 물질이 화합하여 연소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과학용어.
개설

불은 빛과 열을 내는 에너지로서, 인류문명을 떠받쳐 준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는 크게 다른 존재로 이 세상에 군림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불의 발견과 이용에 있었다.

구석기시대부터 인간이 불을 사용해 왔음은 이미 밝혀져 있는 일이다. 불은 어둠을 밝혀 주는 중요한 수단이었으며, 또한 추위로부터 인간을 보호해 주고 음식물 조리와 흙을 빚어 굽거나 쇠붙이를 녹여 가공하는 데 이용되었다.

이렇게 널리 문명의 불씨가 되었던 불은 또한 인간에게 여러 가지 상상력의 대상으로서 역사를 살찌워 주기도 하였다. 흔히 그것은 생명력 또는 창조력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불은 또 가지고 있는 무서운 파괴력의 연상으로 흔히 사악한 것을 물리치는 청정(淸淨)한 힘 또는 정화의 힘을 가진 것으로 여겨졌다.

인간 기술의 원천인 불은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그 나름의 전개과정을 보여주었고, 상징으로서의 불 또한 역사의 뚜렷한 자취를 민속이나 관행 속에 남겨 주었다.

불의 역사

자연의 불

어느 곳에서나 마찬가지로 자연에서 일어나는 불과 사람이 만들고 보존해가는 불이 있다. 자연히 발생한 불에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벼락으로 일어나는 불과 땅에서 솟아오르는 지진 · 화산 등의 지각활동으로 일어나는 불도 있다. 그런가 하면 산에서 나무끼리 부딪쳐서 저절로 불이 일어나는 일도 있다.

우리나라 역사에도 이런 자연적인 불에 대한 기록은 적지않게 남아 있다. 역사상 가장 처음으로 기록된 화재는 132년(신라 지마왕 21) 궁궐의 남문에 불이 난 경우이다. 그 뒤에도 삼국시대고려, 그리고 조선시대를 통하여 많은 화재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런데 이들 화재의 대부분은 원인이 설명되어 있지 않고, 또 당시로서는 가장 대형 건조물이었던 궁궐 등이 피해를 입은 경우가 많다. 이는 당시 사람들은 이런 불이 자연히 일어난다고 믿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물론 지금 생각해보면 이들 대부분은 실화이거나 아니면 일부 방화였을 가능성이 높겠지만, 당시에는 그런 생각이 별로 강하지 않았다.

실제로 불이 저절로 일어날 수 있다는 인식은 널리 퍼져 있었다. 벼락이 떨어져서 건물 등이 불에 타다 남은 흔적들은 흔히 이곳 저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또 333년(백제 비류왕 30) 5월에는 별똥이 떨어져 왕궁에 불이 나서 민가까지 태웠다는 『삼국사기』의 기록도 있다.

이처럼 하늘에서 떨어져 일어난 불이라는 뜻에서 ‘천화(天火)’라고 기록하기도 하였다. 1324년(충숙왕 11) 3월에는 궤동리에서 불이 나 바람도 없이 번져 많은 사람이 죽었다 하여 사람들은 이를 ‘천화’로 여겼다고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또 조선 초에도 비슷한 일이 있어, 1417년(태종 17) 윤5월에 평안도 의주통사 허풍(許豐)의 집에 벼락이 쳐서 불이 나고 그의 아내가 벼락을 맞은 일이 있었는데, 이를 『태종실록』은 ‘천화’라 규정하고 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자연의 불 외에 땅에서 저절로 솟아오르는 듯한 자연적인 불도 있었다. 신라 진평왕 때인 609년(진평왕 31) 정월에 경주 모지악(毛只嶽)의 땅 속에서 불이 일어나 가로 4보, 세로 8보, 깊이 5자의 땅을 10월까지 태우고 꺼졌다는 기록도 보인다.

또 657년(무열왕 4)에는 역시 경주 토함산에 불이 일어나 3년이나 계속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이런 기록은 적지않게 남아 있다.

1445년(세종 27) 함경도 경성에서 올라온 보고에 따르면, 그 곳 봉동에서는 가로 32자 반, 세로 12자 넓이의 땅이 타고 있었다고 하며, 1450년(문종 즉위년)에는 경상도 상주에서 역시 땅에서 저절로 불이 일어났다는 기록이 있다.

바로 이 경우를 비롯한 몇 가지의 지화(地火)에 대한 기록을 소개한 허봉(許篈)『해동야언』은 상주에서 이러한 보고가 있자 임금은 내관 이효지(李孝智)를 보내어 현장조사를 실시하였고, 그는 현장에서 타고 남은 돌덩이를 가져왔는데 이 돌을 불에 올려 놓았더니 불에 타더라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에 아직 석탄이 알려지지 않았을 때 이효지가 상주에서 석탄을 가져다가 태워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땅에서 일어나는 자연의 불 중에 화산의 경우를 들지 않을 수 없다. 한국사에는 단 한 번 화산임이 분명한 불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1002년(목종 5) 6월 탐라산(지금의 한라산)의 네 곳에서 붉은 용암이 솟아 나와 닷새 만에 그쳤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당시의 화산 폭발은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았던 듯 하지만, 이 땅에서 있었던 마지막 화산활동의 기록임이 확실하다. 왕실에서는 대학박사 전공지(田拱之)를 한라산에 파견하여 그 그림을 그려오게 하였다.

이러한 자연적인 불에 대하여 당시 사람들은 ‘불귀신(화귀)’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수도 있었고, 또 재이설(災異說)에 좇아 지상의 잘못에 대한 하늘의 응징으로 여긴 경향도 강하게 보인다.

즉, 정치가 잘못되고 또는 어떤 인물의 행실이 잘못되었을 때 불이 일어난다고 해석하는 수가 많았다. 또 이런 화재는 때로는 그에 대한 조짐이 있어서 미리 예측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1090년(선종 7) 3월 어느날 밤에 크게 천둥 번개가 치더니 신흥창(新興倉)에 불이 나 많은 재물이 다 타버리고, 불꽃이 하늘을 찔렀다.

이에 어사대일관을 비판하여 “화재의 일어남에는 반드시 조짐이 있었을 터인데, 어찌 그런 보고가 없었는가?”하고 추궁하자, 태사승(太史丞)이 지난해에 화성이 천곤성(天困星)에 접근하여 이를 보고했으나 태사국 지사 최사겸(崔士謙)이 이를 조정에 알리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에 두 관리가 모두 처벌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인공의 불

역사시대에 들어오기 이전부터 우리나라에서는 다른 지역과 비슷하게 충격법이나 마찰법으로 불을 만들어 사용할 줄 알았다. 충격법으로 불을 만들려면 부싯돌(차돌)을 황철광으로 세게 쳐서 불꽃을 만들고, 거기에 마른 쑥 같은 인화하기 쉬운 것을 달아 불이 붙게 했다.

마찰법은 구멍 뚫린 나무판을 고정시키고 그와 직각으로 나무막대를 구멍 속에 넣어 세게 마찰하여 나무막대에 불을 붙이는 방식이다.

이런 원시시대의 방법 외에도 오목거울이나 볼록렌즈를 써서 햇빛을 모아 불을 일으키는 방식도 일찍부터 알려져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오목거울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이미 2세기부터의 일로 알려져 있고, 화경(火鏡)으로서의 오목거울은 양수(陽燧) 또는 금수(金燧)라고 알려졌다.

오목거울은 고려 때 많이 만들어졌고, 17세기 초에 간행된 허준『동의보감』에는 오목거울로 햇빛을 모으고 거기에 마른 쑥을 대놓으면 불을 붙일 수 있다고 적혀 있다.

또 햇빛을 모아 똑같은 원리로 불을 만들 수 있는 볼록렌즈는 이미 통일 이전의 신라 때부터 혹은 그 전부터 화주(火珠)라는 이름으로 사용되었음이 확실하다. 그러나 실제로 일반 서민들이 불을 필요에 따라 새로 만들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대개 가정에서는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지켜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화로에 보관한 불씨를 죽이지 않고 지키는 일이야말로 그 집안 며느리 또는 주부의 가장 중요한 의무였다. 민담에 전해오는 불씨를 지키기 위하여 온갖 고초를 겪는 며느리의 이야기가 그런 사정을 잘 보여 준다.

일반 가정에서는 불씨를 대대로 지켜가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정부에서는 때로 새 불을 만들어 쓰는 격식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면 조선시대 병조에서는 해마다 다섯 차례 불을 다시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이 5회의 개화(改火)는 각각 입춘 · 입하 · 토왕절 · 입추 · 입동에 행하며, 그 때마다 바닥으로 쓰는 널빤지 나무와 그 구멍에 넣고 마찰하는 막대가 각기 다른 종류를 쓰게 정해져 있었다( 『만기요람』 군정편 2).

그러나 더욱 중요한 불을 새로 만드는 의식으로는 청명 때에 내병조(內兵曹)에서 실시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동국세시기』에 따르면 청명(淸明) 때 정부에서는 느릅나무버드나무로 불을 일으켜 각 관청에 나누어 준다고 적혀 있고, 『열양세시기』에는 같은 일을 한식 때 행했던 것으로 적고 있다.

한식에 내병조에서 버드나무를 뚫어 새로 불을 만들어 임금에게 바치면 임금은 그 불씨를 각 관청과 대신들에게 내려준다는 것이다. 『열양세시기』에 이 일을 한식날에 행한 것처럼 기록된 것은 잘못이고, 『동국세시기』의 기록처럼 불을 만들어 새로 나눠 준 일은 청명날에 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 이유를 과학적으로 따져보면 청명은 시기로 볼 때 한식과 같은 날이거나 아니면 하루를 앞서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청명은 24절기의 하나로 동지의 순간에서 꼭 104일 4시간 10분 정도 뒤인데, 한식은 동지 뒤 105일째의 날을 지정한 잡절이다.

한식에 음식을 데워 먹지 않는 풍습은 바로 청명에 새로 만들어 나눠 준 불이 시간이 걸려야 고관들의 집에 도착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불도 일년 내내 같은 불을 계속해서 쓴다면 더러워지거나 기운이 쇠진한다는 뜻에서 옛사람들은 새 불을 일으켜 새 봄을 맞이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불을 만드는 방법은 1880년대 후에야 근대적인 것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한성주보』에 보도된 것처럼 조선에서 처음으로 성냥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영국인이 1885년 8월 서울의 양화도(楊花渡)에 성냥공장을 세우면서부터였다. 때를 같이 하여 석탄석유가 연료로 한국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석탄에 대한 아주 초보적인 지식은 이미 조선 초에 알려져 있었음이 밝혀져 있지만, 그것을 제대로 알기 시작한 것은 훨씬 뒤의 일이었다. 석유 또한 개화기에 들어와 외국에서 수입하여 시중에서 판매하면서 특히 등유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연료가 알려지기 시작한 개화기는 또한 불에 대한 전혀 다른 세계가 열린 그런 시기였다. 처음으로 전기에 대한 근대적 지식이 퍼지면서 ‘제2의 불’로서 그것이 알려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천둥 번개는 일찍부터 알려져 있었고, 또 비단옷을 문지르면 ‘탁탁’하는 소리를 낸다는 것쯤은 이익(李瀷)『성호사설』에도 기록되어 있다. 이것으로 이미 18세기 또는 그 전에 정전기현상에 대해 관찰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더욱 근대적인 정전기현상에 대한 기록은 19세기 초 이규경(李圭景)이 남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당시 서울에 뇌법기(雷法器)를 가진 사람이 있었는데, 이것을 돌리면 번쩍번쩍하면서 불을 내며 여러 사람이 서로 손을 잡고 둘러서면 자극을 주기도 한다는 기록을 남겨 그것이 정전기 발생장치였음을 말해 준다.

실제로 전등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미국의 에디슨 전기회사에서 수입한 전기시설이 궁궐 안에 설치되어 전등불을 환히 밝힌 때인 1884년 이후의 일이다.

1898년 4월 조선 황실과 미국인들의 협력으로 설립한 한성전기회사가 처음으로 동대문 발전소에 120㎾ 발전기를 설치하여 서울 진고개 일대에 전등을 달아 불을 켠 것이 우리나라에 ‘제2의 불’이 켜진 시초였던 셈이다.

전기는 전신과 전차 등에도 이용되면서 자리잡기 시작했지만, 한국전쟁이 끝난 1950년대 후반까지 전기 사정은 어려운 형편이었다. 경제발전과 함께 한국에서 불은 곧 ‘제3의 불’이라는 원자력까지 포함하기 시작했다. 원자력 발전은 원자 폭탄의 개발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1942년에 이탈리아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과학자 페르미는 자신이 설계한 CP-1에서 처음으로 우라늄 핵분열 연쇄반응을 성공시켰다. 그 후 1945년에 원자폭탄을 개발하여 전쟁에 직접 이용하는 비극을 목격한 인류는 1951년부터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연구에 박차를 가했다.

1953년에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유엔에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제창했으며 미국이 보유한 원자력기술을 세계에 공개했다. 이후 많은 국가에서 원자력발전에 관한 연구를 활발히 진행했다. 1956년에는 영국에서 최초로 상업용 원자로가 가동되었으며, 1957년에는 미국에서 원자력 발전소가 가동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는 1962년에 트리가 마크 Ⅱ(TRIGA Mark-Ⅱ) 연구용 원자로가 처음으로 가동되면서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했다. 1971년에 기공된 우리나라 최초의 원자력발전소인 고리 1호기는 1978년부터 상업 운전을 시작했다. 그 후 1973년 석유파동을 거치면서 석유의 대체 에너지로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1999년 말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동 중인 원자로는 총 16기로 전기 생산량이 세계 8위에 해당하며, 우리나라 총 전기 생산량의 40% 이상(정확하게 41.39%, 1999년 현재, IAEA 보고서)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1979년 미국 스리마일 섬의 원자력 발전소 사고나 1986년 소련의 체르노빌 원자로 붕괴 사건은 원자력 발전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체르노빌 사건으로 인한 사망자는 31명에 불과했지만 방사성 낙진으로 13만 4,000명의 주민이 영구히 이주하고 그 후 60년 이내에 구소련과 유럽에서만 2만∼4만 명이 방사능오염으로 사망할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 사건 후 원자력은 위험하다는 인식이 퍼져 선진국에서 시민들의 반대로 핵발전소 건설이 지연되고 원자로의 주문이 취소되어 원자력산업은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형편이다. 또한 원자력 발전소 가동시 필연적으로 나오는 방사성 폐기물 오염은 심각한 환경 문제로 제기되고 있다.

전기가 조명을 위한 불로서 원시적인 불을 완전히 대체한 것과 달리, 열을 얻는 방법으로서의 불은 전기보다는 다른 것이 널리 이용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나무를 때서 밥을 짓고 방을 덥히던 방법은 석탄을 사용하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특히 석탄 사용은 1960년대 이후 늘어나어 다섯 가지의 연탄으로 규격화되어 난방용의 주류를 이루다시피 했고, 그 뒤에서야 산에 나무가 울창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난방용 석탄 사용은 급격하게 감소했다. 1998년 현재 에너지 소비 중 석탄의 비율은 20.7%에 불과하다. 1988년에는 1년간 1,413만 4000톤의 석탄이 채굴되었으나, 이후 급격하게 감소되어 1991년에는 658만 톤이었고, 1999년에는 39만 6000톤에 불과했다.

우리나라의 석탄 매장량은 약 15억 톤 정도이며 그 중 반이 경제적 효용성이 있어 채굴 가능성이 있다. 각종 가스는 우리나라에서 새로운 형태의 불로 점점 중요성을 더해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스가 처음 이용된 것은 1909년 11월 3일, 용산에 있는 가스 제조공장에서 가스등용으로 점화식을 가지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민간용 도시가스는 1972년 5월에 서울시 직영으로 용산구 이촌동에 LPG/AIR 방식으로 3천 가구에 공급하기 시작했고, 그 해 11월 14일 강서구 염창동에 나프타 분해방식으로 공급한 것이 처음이었다.

1986년부터는 인도네시아에서 LNG를 수입하여 도시가스용으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현재는 인도네시아, 보르네오, 오만, 카타르 등에서 수입하고 있다. 발전용 및 가정용 등으로 연간(2000년 추정치) 약 1,415만 톤이 사용되고 있는데 이것은 2000년 기준으로 보면 에너지 총소비량의 8.4%에 이른다.

이와 함께 석유 역시 중요한 연료로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우리나라에 처음 석유가 들어온 것은 1880년대 미국의 스탠다드 석유회사의 제품을 수입하면서부터이다. 알렌이 지은 『Korea Fact & Fancy』의 연표에는 1898년에 서울 시내에서 석유등이 점등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때부터 석유가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다.

오늘날에는 석유가 차지하는 비율이 가장 큰데, 2000년 1/4분기 기준으로 에너지 총소비량 중 석유가 차지하는 비율은 62.3%나 된다. 같은 기간에 원유의 수입 총량은 2억 2000만 배럴에 달한다.

최근에는 깨끗하고 거의 무한정한 태양열을 이용한 태양열주택 등이 건설되어 태양을 직접 이용하거나 태양전지를 이용한 발전, 태양열을 이용한 발전, 풍력 발전, 소수력 발전, 파력 발전, 조력 발전, 해양 온도차 발전 등의 대체에너지 개발이 계속되고 있다.

또한 제4의 불이라고 할 수 있는 핵융합 에너지에 대해 세계 각지에서 연구의 박차를 가하고 있다.

불의 이용

불을 이용한 것 가운데 우리나라 역사상 특이하게 발달한 경우로 우선 온돌의 예를 들지 않을 수 없다. 온돌은 우리나라에서 기원전부터 발달하기 시작한 독특한 난방방식으로 지금까지 거의 대부분의 우리 나라 사람들이 선택하는 안방 난방법으로 남아 있다.

함경북도 웅기의 석기시대 유적에 이미 온돌의 원시형태가 남아있고, 중국의 문헌에는 삼국시대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겨울에는 긴 구덩이를 만들어 밑에서 불을 때 방을 데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만주와 몽고지역에도 온돌과 비슷한 모양의 것들이 전해오는 것을 보면 온돌의 발달은 선사시대부터 동북아시아민족, 주로 부여족을 중심으로 발달하여 그 뒤에 서로 다른 형태로 진화해 온 것으로 보인다.

온돌은 방고래를 만들고 그 위에 납작한 돌을 판판하게 놓아 구들장을 만들어 진흙을 발라 다듬은 다음, 그 위에 장판을 하는 방식으로 발달하였다. 아궁이에 불을 때면 그 열과 연기가 방고래의 모양을 따라 한 길 또는 여러 길로 통하여 굴뚝으로 빠져 나가는데, 그 사이에 방고래를 고르게 가열하여 그 열이 방바닥을 데우는 방식이다.

이 난방법은 시설 경비도 싸고 다른 방법보다 열효율도 높아서 땔감이 넉넉하지 않았던 우리나라에서는 아주 합리적인 난방방법이었다. 이런 장점 때문에 고려시대까지는 온돌방식이 전국에 퍼졌던 것으로 보인다. 온돌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난돌(暖堗) · 온돌(溫堗) 등의 이름으로도 불렸고, 중국식으로는 화갱(火炕)이라는 이름도 가졌다.

시설과 열효율에서 모두 경제적인 온돌은 고장도 별로 없고 간단하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난방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불편함이 있고, 또 온도를 필요에 따라 조절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것이 단점이었다.

뿐만 아니라 방바닥만 뜨거울 뿐 방 윗부분은 추워서 흔히 ‘외풍이 심한’ 단점이 있었다. 그 때문에 자연히 우리나라 전통사회에서는 의자에 앉아 생활하는 좌식생활을 어렵게 한 것으로 보인다.

이 단점들을 보충하기 위해 발달한 온돌의 보조장치가 화로였다. 그러나 땔감을 절약해야 하는 형편에서 화로는 자연히 난방의 보조 구실보다는 흔히 담뱃불을 붙이거나 혹은 불씨를 지키는 방법으로 더 큰 몫을 했다.

온돌방식은 지금까지도 한국인 생활양식에서 기본 난방방식으로 이용되고 있다. 8 · 15광복 후 점차 나무 대신 연탄이 사용되면서 연탄가스가 구들장 틈 사이로 새어 들어와 인명을 해치는 일이 자주 일어났고, 그 피해는 지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점차 늘어나는 아파트의 경우, 대개가 중앙집중식 난방을 택하고 있어서 불이 직접 각 세대의 아궁이에 지펴지는 것은 아니지만, 거의 대부분의 아파트는 지금도 온돌방식을 선택하고 있다. 물론 그 온돌 밑으로 불기운과 연기 대신에 가열된 물이 통과하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서민들에게 화로는 온돌의 보조 난방기구로서는 큰 몫을 하기 어려웠지만, 관청이나 넉넉한 집안에서는 난방의 보조수단으로, 그리고 간단한 열기구로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화로는 어느 집에나 있었고, 특히 추운 겨울에는 가족들이 모두 모여드는 곳에 화로가 놓이게 마련이었다.

서민들은 보통 질화로나 무쇠화로를 사용했지만 부자들은 돌화로나 놋쇠화로를 널리 사용했다. 화로에는 삼발이를 놓고 찌개 등 음식을 데우기도 하고 약탕기를 올려놓기도 했으며, 담뱃불을 붙이거나 또는 바느질할 때 인두를 달구는 데에도 사용했다. 화로는 운반용으로 특별히 작게 만들어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는 불씨 운반용이기도 했지만, 대개 여행용인 경우가 많았고 재료도 질화로에서 돌 · 무쇠 · 놋쇠 · 백동 등으로 다양해졌으며, 장식을 한 고급품도 만들어졌다. 이 손화로[手火爐]는 풍속화에도 그려져 있다.

화로의 가열기구 노릇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풍로(風爐)이다. 그러나 아궁이에서 직접 가열하거나 화로를 이용하는 일 외에 풍로를 널리 쓸 필요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널리 보급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풍로가 널리 사용된 것은 오히려 숯 생산이 늘고 근대화 바람이 불어, 도시에서 여름철에 간단한 방법으로 불을 피워 사용할 필요가 있을 때 주로 이용되었다.

불을 이용한 통신수단, 즉 봉수(烽燧)는 근대 통신수단이 등장하기 전에는 가장 빠르고 정확한 방법이었다. 이미 삼국시대에 봉수제도가 있었던 기록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지만, 횃불과 연기를 써서 정보를 멀리까지 전달하는 본격적인 봉수제도가 정착한 것은 1149년(의종 3)부터라고 기록에는 나와 있다.

십리 또는 그 이상의 거리마다 그 지역에서 가장 높은 산봉우리에 봉화터를 만들어 봉수꾼을 상주시켜 관리하게 하였다. 조선 초 세종 때 확립되고 그 뒤 조선시대에 실시된 제도에 따르면 전국을 연결하는 봉수대는 모두 673개였고, 이들은 해안에 나타난 적들에 대해 서울로 보고하게 되어 있었다.

보통 때에는 횃불을 1개로 하다가 적이 나타나면 2개, 적이 접근하면 3개, 국경을 넘어 들어오면 4개, 아군과 접전하면 5개를 올리는 방식이었다.

국경지방 전지역을 엮어놓은 이 봉수제로 위급상황을 보고하는 데는 12시간 정도면 어느 곳에서 시작된 보고라도 서울에 도착할 수 있었고, 그 본부는 목멱산, 즉 지금의 남산이었다.

횃불을 신호용으로 사용한 것은 원시시대부터 어디서나 쓰는 방법이었고, 해안에서 밤에 횃불을 지펴 바다에 나가 있는 배들을 안내한 것도 조선시대에 이미 사용된 방법이었다.

그것이 정식 등대(燈臺)로 발달한 것은 서양식 항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뒤부터의 일이다. 처음 우리나라에 등대가 세워진 것은 한말 인천에서였고, 1908년에는 잠깐 등대국(燈臺局)이라는 관서를 두어 해안 항해의 안전을 담당하게 한 일도 있다.

지금은 등대가 중요한 해안 요충지마다 설치되어 있고, 사용하는 불빛은 횃불 대신 먼 거리를 비춰줄 수 있는 현대식 조명등으로 바뀌었다. 전쟁무기로서도 불은 아주 중요한 몫을 차지해 왔다. 우리 역사에서도 마찬가지로 태고시대부터 전쟁에 화공법이 널리 사용되었음을 많은 기록에서 알 수가 있다.

또 삼국시대 김유신(金庾信)은 별이 떨어졌다 하여 군사들이 동요하는 것을 막기 위해 다음날 밤에 연을 만들어 그 위에 등을 달아 띄워올림으로써 어제 떨어진 별이 오늘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는 소문을 퍼뜨려 군사들의 동요를 막았다는 기록도 전한다.

그러나 기름 입힌 헝겊 따위를 화살에 감아 불을 붙여 적선에 쏘아 불을 일으키는 화공법은 화약의 발명으로 일대 혁명을 거치게 된다. 그리고 화약의 발명은 중국에 이어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두번째로 빨리 이루어낸 일이다.

『고려사』에 의하면, 화약이 제대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1377년(우왕 3) 고려에서 처음으로 화통도감(火㷁都監)을 만든 때쯤의 일이다. 불과 수년 전까지는 중국에서 작은 분량의 화약을 사다가 왜구와의 전투에 이용하기도 했던 고려는 화약의 국산화에 성공함으로써 중대한 역사적 전환을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즉, 최무선(崔茂宣)의 화약 발명과 그와 함께 만들어진 몇 가지 화약무기들은 당시 해안지방을 노략질하던 왜구 소탕에 결정적으로 도움이 되었다. 이 유리한 입장을 잘 활용하여 당대에 지도자로 떠오른 사람이 뒤에 조선왕조를 개창한 이성계(李成桂)였다.

염초 · 황 · 숯가루를 섞어 만드는 화약은 화살을 쏘거나 철환을 발사하는 장치를 발달시켰고, 화살을 연발로 쏘아댈 수 있는 화차(火車)태종 때에 처음 고안되어 문종 때 다시 만들어졌으며, 같은 장치가 임진왜란 때 활용되기도 하였다.

왜란 때에는 화포장 이장손(李長孫)에 의하여 500보를 쏘아 잠시 뒤 폭발하게 만든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 같은 화약무기도 개발되었고, 각종 크기의 대포도 만들어졌다.

조선 초에 이미 안정된 나라를 세우고 있던 조선왕조는 화약의 보급을 억제하고, 특히 그 제조비밀이 일본에 전파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삼남 해안지방에서는 화약을 만들지 않았으며, 세종 때에 만든 화약병기에 대한 해설서 『총통등록(銃筒謄錄)』은 비밀 속에 만들어 절대 필요한 것만 보급했던 까닭에 지금은 아예 전하지도 않는다.

이런 화약기술은 임진왜란 때 중화기에 관한한 일본보다 여전히 유리한 조건에 있게 하였고, 그 때문에 바다에서의 싸움은 일본보다 유리한 편이었다.

그러나 이런 화약은 근대 서양에서 화약이 발명되어 대량으로 만들어낸 화약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어서 19세기 조선의 해안에 밀고 들어온 서양의 근대식 대포와 군함을 이길 수는 없었다.

대포가 화약을 쓴 불의 힘을 이용한 무기라면, 사실은 서양의 군함 또한 불의 힘을 이용하여 증기기관을 돌려 동력을 얻는 불의 힘으로 달리는 배였다. 그것은 화륜(火輪), 즉 증기기관으로 달리는 배, 화륜선이었다.

조선시대의 지도층이 화륜의 중요성에 눈뜨기 시작한 것은 개국 직후의 일이었다. 이미 중국에 들어온 서양 지식을 통하여 서양의 근대식 화륜선에 대한 지식을 얻고 있던 조선의 왕과 신하들은 개국과 함께 일본을 시찰하면서 더욱 그 위력에 놀랐다.

1876년 개국과 함께 처음으로 일본에 수신사로 다녀온 김기수(金綺秀)와의 대화에서 고종은 일본이 가장 중히 여기는 것은 전선 · 화륜 · 농기 등이라는데, 이것이 사실이냐고 묻고 있다. 또, 김기수가 일본에서 화륜 하나가 힘든 일 여러 가지를 간단하게 해내는 것을 보고 크게 감탄하는 장면이 있기도 하다.

그에 앞서 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은 1866년 대동강에서 좌초한 미국 배 셔먼호의 화륜을 서울 한강에 끌어다가 그것을 다시 움직여 보려고 시도한 일이 있다.

화륜만 떼어다가 다시 배를 만든 것인지 또는 배를 대개 그대로 끌어다가 한강에서 시험했던 것인지는 기록에 분명하지 않지만, 대원군의 명령으로 화륜선이 만들어졌으나 석탄이 없던 시대여서 숯을 때서 화륜을 움직이는 바람에 속도가 1분에 10여 보 정도여서 실제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

비록 실패는 했지만, 불의 힘으로 수증기를 내는 증기기관을 처음으로 움직여본 사건이었다. 한말 증기기관은 기차와 기선의 도입으로 실제로 이 땅에 등장하였다.

그러나 그것들은 서양의 기계를 그대로 수입하여 사용한 경우였고, 우리 기술이 눈뜨기 훨씬 전에 조선왕조가 일제의 손아귀로 넘어가는 바람에 불을 이용한 교통수단은 일제강점기에야 비로소 자리를 잡게 되었다.

불은 산업발달의 중심 수단으로 중요한 구실을 해왔다. 언제부터인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신라 진흥왕 이래 역사에 기록된 화전(火田)은 전통사회에서 볼 수 있었던서민 생활의 한 모습이었다. 이렇다 할 산업이라고 꼽기 어려운 이 농업 양식은 산이나 들에 불을 질러 태워버린 후 그 땅에서 농사를 짓는 가장 쉬운 농경지 획득의 방법이었다.

대체로 이 생활양식은 전통시대를 통하여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따라서 화전을 금하는 시책이 내려졌지만 실효를 얻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이들은 일종의 유랑민으로 세금이나 병역 등의 의무를 저버린 백성이었기 때문에 정부가 이를 막아보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반층의 착취가 심해지고 생활기반인 토지를 잃은 농민들은 흔히 유랑민이 되어 화전경작을 하는 경우가 많아져 1936년 통계에는 전국에 화전민이 120만 명이며, 그 중 80%가 강원도 · 평안도 · 함경도의 산간지대에 분포한 것으로 나와 있다.

김홍도의 풍속화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불이 실제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산업수단으로 이용된 경우는 대장간에서 금속을 다루는 그림으로 상징되듯 단연 공업에 이용한 경우일 것이다.

자기(瓷器)를 만들어 구워내려면 도요(陶窯)가 필요했는데, 전국에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도요지들이 많이 흩어져 있다. 쇠와 그 밖의 금속을 제련하고 가공하는 데에도 불은 없어서는 안 되었다.

삼국시대 이래의 많은 금속공예품 · 금동불상 · 종 · 금속활자 등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금속문화 유물에서 우리는 불이 이들 문화 발전에 얼마나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던가를 생각하게 된다.

오락으로도 불은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특히 밤의 놀이에서 불은 절대적으로 중요했다. 특히 연등행사는 불교의 융성과 함께 삼국시대부터 이미 널리 행해졌으며 고려 초부터는 더욱 성행하였다. 팔관회와 더불어 고려 때의 2대 명절이었던 연등회는 팔관회가 서울에서만 치러졌던 것과 달리 전국 행사로 열렸다.

원래 2월 행사였던 연등회는 고려 의종 때부터 정월 보름으로 바뀌더니, 조선시대로 들어와서는 불탄일인 4월 초파일로 변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불꽃놀이는 고려 말 화약의 수입과 함께 궁궐의 행사로 자리잡았으나, 조선시대에는 오히려 그리 널리 사용되지 않은 것 같다. 광복 후 서양식을 모방하여 각종 체육대회에 이용되고 있다.

1988년 서울올림픽대회에서 성화를 켜놓았던 것은 「올림픽헌장」에 따라 공식행사의 하나로 그리스에서 운반해온 성화였다.

그러나 이를 모방하여 한국은 이미 1956년 제37회 전국체육대회 때부터 강화도 참성단에서 성화를 채취하여 경기장으로 릴레이해 와서 대회기간 동안 불을 피웠고, 이 전통은 그 뒤 전국체육대회는 물론 다른 체육대회에서도 따르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장례는 대개 매장을 원칙으로 발달해 왔지만, 불교의 수용과 함께 화장 관행도 서서히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신라의 제30대 문무왕은 화장을 유언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대개 삼국시대 후기부터 특히 불교도들 사이에 화장이 성행하기 시작했고, 신라의 임금 가운데 여러 명이 화장한 것으로 밝혀져 있다.

고려 때까지도 화장 관습은 제법 성행하여 많은 화장 골호(骨壺)가 발굴되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따르던 조선시대에는 화장이 기피되어 오다가 최근에는 토지가 협소하고 환경 문제로 인한 자각이 일고 전통 사고방식이 깨지면서 차차 화장의 습관이 자리잡아가고 있다.

불의 이용은 실로 이루 다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하다. 이상 대체로 살펴본 것 외에도 전통사회에서 불은 형벌의 도구로도 쓰여졌고, 지금은 대학생들이 그들의 반정부운동에 화염병을 던져 서울 거리를 불바다로 만들기도 한다.

이와 같은 여러가지 불의 이용에는 항상 화재의 위험이 따른다. 실제로 역사에는 여러 차례의 심한 화재 기록이 남아 있다. 또, 그런 화재를 미리 막거나 일단 일어난 불을 초기에 진압하려는 노력도 있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조선 초기에는 병조 · 의금부 · 형조 · 한성부 · 수성금화사(修城禁火司) 등에서 숙직하는 관리들이 화재를 막기 위해 순찰을 돌았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의금부에서 화재 감시자로 하여금 종루에 올라가 지키게 하여 궁궐은 물론 민가에도 화재가 났을 때에는 종을 쳐 이를 알리고, 각 관아와 민가에서도 소화 책임자의 감독 아래 불 끄는 일에 인원을 동원하는 제도가 있었다.

또 한때는 금화도감을 두어 화재방지에 힘쓰기도 하였고, 방화벽을 쌓고 요소에 방화수를 준비하기도 하였다. 또 화재를 일으킨 자에 대해서는 그 경중에 따라 처벌했는데 심한 경우에는 교수형을 받기도 했다.

상징으로서의 불

불은 그것이 인간에게 주는 여러 편리함 못지않게 강한 상징성을 가지고 인간의 정신생활에까지 깊은 영향을 주어왔다. 활활 타오르는 불꽃은 솟아오르는 생명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졌고, 또 그 파괴력은 더럽고 사악한 것을 물리쳐 주는 정화의 표상이라 여겨졌다.

민간에서 고사를 지낼 때 소지(燒紙:종이를 불살라 공중으로 올리는 일)하는 일이나, 제사 등에 향불을 피우는 일은 모두 불이 가지고 있다고 믿는 신통력을 빌려 하늘과 땅, 이승과 저승, 산 자와 죽은 자를 서로 통하게 하려는 노력이다.

이러한 불의 상징적 의미가 가장 잘 나타나는 곳은 전통적인 놀이와 세시풍속이다. 가장 잘 알려진 세시풍속으로는 정월대보름 전날 밤의 불놀이를 들 수 있다.

흔히 ‘쥐불놀이[鼠火戱]’라고 알려진 이 놀이는 정월 열나흗날 밤에 아이들이 논둑과 밭둑에 불을 지르고 노는 것으로 ‘논두렁 태우기[畦畔燒]’ · ‘횃불놀이[炬火遊]’로도 알려져 있다.

『동국세시기』에 따르면, 정월의 상해일(上亥日)과 상자일(上子日), 즉 돼지날과 쥐날에는 횃불을 피워 풍년을 비는 행사가 있었다. 궁중에서는 나이 젊고 지위가 낮은 환관 수백 명이 횃불을 땅 위로 이리저리 내저으며 “돼지 주둥이 지진다.”며 돌아다녔고, 곡식 씨앗을 태워 주머니에 넣고 재신 등에게 나눠 주었다.

또 상자일에는 불에 콩을 볶으면서 ‘쥐 주둥이 지진다.’고 했고, 충청도에서는 사람들이 떼를 지어 횃불을 피우며 ‘쥐를 태우는 불[燻鼠火]’이라 하였다. 이 기록들은 꼭 일치하지 않는다. 정월 열나흗날이 꼭 상자일과 일치하지는 않을 터이니 이 풍속은 날짜에서 약간의 혼란이 있은 채 계승되어왔던 것으로 보인다.

쥐는 눈이 밝아 언제나 밤에 활동하기 때문에 밤에 불을 피워 쥐의 눈을 지지겠다는 뜻도 담고 있었다고 해석되며, 불길이 잘 솟아오르는가에 따라 그 해 농사의 길흉을 점쳤다고도 알려져 있다.

또 이 행사는 흔히 마을사람들 사이의 횃불싸움으로 번지는 일이 많았다. 이 역시 불을 가지고 악귀를 쫓아버리고 새해 농사와 운수의 대통을 비는 행사였다.

거의 전국에서 행해진 횃불싸움[炬火戰]은 대보름날 저녁에 마을과 마을 사이에 벌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식구 수대로 싸리나 짚으로 홰를 만들고 두 마을 사람들이 약속된 장소에 모인 다음 농악을 울리며 흥을 돋운 다음 서로 횃불을 휘두르며 싸우는 것이다. 이기는 쪽의 마을에는 풍년이 든다는 식으로 해석되었음은 물론이다.

역시 정월 열나흗날 밤과 다음날 새벽에 걸쳐 마당에 모닥불을 피우고 이 불을 뛰어넘으며 일 년 운수를 비는 풍속도 있다. 솔가지나 아주까리대 등을 쌓아 모닥불을 피워놓고 아이들은 자기 나이만큼 이 불을 뛰어넘는데, 집집마다 솔가지와 아주까리대가 타면서 내는 소리가 요란하다.

불길이 높이 솟아오르고 탁탁 소리가 잘 나야 잡귀가 모두 물러나고 보리농사가 잘 된다는 것이다. 불이 줄어들 때 이 불을 뛰어넘으면 병에 걸리지 않고 운수가 대통한다는 것도 이 불에 얽힌 해석이다.

대보름에는 초저녁에 횃불을 들고 높은 곳에 올라가 먼저 달을 보는 사람이 길하다고 여겼다. 또 그때의 달빛을 보고 일 년의 풍흉을 점치기도 하였다. 횃불과 달빛이 모두 경우에 따라 풍흉을 점치는 수단이었던 셈이다.

사악한 것 또는 귀신을 쫓아주는 불로서는 대개 귀신 붙은 물건을 불에 태워서 귀신을 쫓는 방법과 연기를 내어 귀신을 물리치는 방법이 있었다. 이런 사고방식은 불은 양(陽)이며 귀신은 음(陰)이라는 생각과 연결되어 더욱 합리화되어 왔다고 생각된다.

질병의 원인을 여러 가지 귀신이 몸에 들어와 생기는 것으로 파악하던 전통사회에서는 특히 전염병이 돌면 그 귀신을 물리치기 위해 환자 물건을 불에 태우는 방법을 널리 사용하여 결과적으로는 오늘날의 위생 처리 효과를 얻기도 하였다.

언제부터인지 우리나라에서는 부엌의 부뚜막에 조왕(竈王)할머니를 모셨다. 조왕은 부엌을 지키는 신으로 해마다 연말이면 그 집안식구들의 품행을 하늘에 알린다고 생각했다.

불을 담당하는 신이라고 생각했던 조왕할머니에게는 더러움을 씻어주는 신통력이 있다고 해서 옛 풍속에는 먼 여행에서 돌아오거나 초상집에서 돌아온 사람을 먼저 부엌에 들러 나오게 하였다.

귀신과는 좀 달리 도깨비는 때로는 엉뚱하고 때로는 장난기 어린 일을 하는 것으로, 밤에는 도깨비가 있는 곳에 도깨비불이 생긴다고 믿었다. 보통의 불이 양의 불이라면 도깨비불은 음의 불이라 여겼고, 따라서 도깨비불은 낮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불은 그 자체가 생명력의 상징이어서 지금도 이사간 집에는 성냥 등 불을 일으키는 것을 사들고 인사가는 풍습이 전해 온다. 새 살림이 불처럼 왕성하게 일어나라는 기원을 이렇게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불은 그 자신 영원한 것이라기보다는 생명을 가진 것처럼 여겨졌고, 그러므로 때로 새 불을 일으켜 사용하고 옛 불은 꺼버리는 것이 옳다고 여겼다.

새 불을 만들어 각사에 나누어 주는 날로 『동국세시기』에는 청명을 들고, 『열양세시기』에는 한식을 들고 있다. 청명과 한식은 같은 날이거나 하루 차이로 오게 되어 있는데, 청명에 새 불을 만들었다는 것이 더 정확하다.

한식에 찬 음식을 먹는 풍속은 바로 청명에 새로 만든 불이 제때에 전해지지 않아 그럴 수밖에 없는 경우이고 보니, 차게 먹는 습관이 생겼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한식에 찬밥을 먹는 이유로는 개자추(介子推)의 전설이 유명하다. 그러나 중국 전설인 개자추의 이야기는 조선 초 세종 때에도 이미 믿을 수 없는 전설이라고 있었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한식은 동지 후 105일째의 날인데, 이 때쯤이면 바람이 심하고 건조하여 화재 위험이 많기 때문에 조심하는 뜻에서 하루 동안 불을 피우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세종 때에는 한식을 화재단속 특별기간처럼 생각하여 금화관리들에게 특별경계를 지시한 일이 있다.

이처럼 한식은 원래 청명에 새로 만든 불이 아직 전해지지 않아 찬밥을 먹던 관습 그대로보다는 불조심하라는 뜻의 실용적인 명절로 정착해 버렸다. 그런데 실제로 새 불이 언제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도 반드시 기록이 일치하는 것만은 아니다.

『만기요람』 군정편에 보면, 1년에 5차의 개화(改火)가 있었다고 되어 있는데, 입춘 · 입하 · 토왕(土旺) · 입추 · 입동 때가 바로 개화하는 날이며 이렇게 새로 만든 불을 각 궁에 진상한 뒤 나눠준다고 적혀 있다.

똑같은 내용이 『경국대전』 병전에도 남아 있다. 5차의 개화는 때마다 사용하는 나무가 다르며 그것도 기록되어 있다. 청명은 여기 규정된 5차의 개화일과는 맞지 않는다. 조선시대에는 초기에 매년 5차 개화하던 규칙이 후세에 청명 때 한 번으로 바뀐 것인지도 모르겠다.

불은 고마우면서도 두려운 것이며, 또한 잘 지켜야 하는 것이 불씨였기 때문에 그에 상당한 말들이 여러 가지 전해 온다. 남의 집에서 불을 담아오면 그 집에는 재수 없는 일이 생긴다는 말은, 불씨를 잘 지켜서 꺼뜨리는 일이 없어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불 좋다.’고 말하면 나쁘다는 말은 불을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뜻이며, 그 밖에 담뱃불을 붙이면 해롭다는 경우도 많이 전해 오는데, 이것들은 모두가 불조심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보다 포괄적인 의미에서 불은 오행사상과 연결되어 아주 널리 활용되었다. 금 · 목 · 수 · 화 · 토의 오행은 얼핏 보기에 서양의 4원소설과 같은 원소 개념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4원소설과 달리 오행의 다섯 원소는 물질의 종류로만 이해되기보다 오히려 그 밖의 다른 넓은 응용범위를 만들어갔다. 물질 세계를 오행으로 나눈 것은 물론, 인간의 가치의 세계까지 오행으로 이해하려 하였고, 계절의 변화와 역사까지 오행으로 설명하였다.

여하튼 불에 상응하는 것으로 색깔은 붉은색, 방향은 남쪽, 5장(臟) 가운데에는 심장, 계절 가운데에는 여름, 숫자로는 7과 2 등이 있다. 그 밖에도 10간 12지는 물론, 얼마든지 많은 종류의 것이 오행에 상응한다고 여겼다.

또 오행은 그것들 사이에 있는 상관관계로도 중요한 구실을 하는데, 특히 상승(相勝)과 상생(相生)의 관계가 대표적이다.

이에 따르면 화승금(火勝金)으로 불은 쇠를 이기며, 수승화(水勝火)로 물은 불을 이긴다. 또 상생관계에 의하면 화생토(火生土)로 불은 흙을 낳고, 목생화(木生火)로 나무는 불을 낳는다. 오행의 상관관계는 지금까지 오랜 역사를 통해 이름의 돌림자를 고르는 것부터, 사주 등의 운명을 점치는 데 이르기까지 널리 응용되어 왔다.

돌림자 고르는 데 상생관계를 이용할 경우에는 돌림자에 목(木)이 있는 사람은 아들의 돌림자로를 화(火)가 들어 있는 글자를 고르고, 다시 그 아들 돌림으로는 토자(土字) 돌림을 고르는 식이다. 자연의 여러 가지 이상한 현상들도 오행사상에 따라 분류해서 이해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고려사』 오행지에는 이런 기록이 오행의 분류에 따라 기록되어 있는데 불에 속한 재이(災異)로는 당연히 들어 있어야 할 화재 외에도 여러 가지가 포함되어 있다.

겨울에 얼음이 얼지 않는 것, 겨울에 유난히 따뜻한 경우, 겨울철에 꽃이 피는 것, 하늘이 붉게 되는 현상, 화성의 이상한 움직임, 꿩이 모이는 현상, 그 밖에는 서지(瑞芝)와 주초(朱草) 같은 상서로운 일도 불에 관련된 자연현상으로 이해되었다.

오행설의 불에 얽힌 가장 흥미있는 경우로는 지금 경복궁 정문 앞 양쪽에 돌로 깎아 세워놓은 해태를 들 수 있다. 1864년 갑자기 정권을 잡은 대원군 이하응은 권위를 되살리기 위해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경복궁을 중건하였다.

그런데 과거 경복궁에 불이 자주 난 이유를 풍수설에 따라 그 맞은 편에 있는 관악산이 화기를 내뿜고 있기 때문이라고 믿은 그는 관악의 불기운을 이기기 위해 경복궁 정문 앞에 해태를 세운 것이다.

해태는 전설적으로 물짐승이기 때문이다. 그는 또 관악산 꼭대기에 구덩이를 파고 용을 묻었는데, 이 또한 용이라는 물짐승으로 불기운을 막으려는 노력이었다.

이와는 반대로 불짐승의 전설도 있었다. 조선 후기의 소설 「불가사리전」에 따르면 고려 말 송도(松都)에 있던 불가사리는 곰의 몸집에 코끼리의 코, 물소의 눈과 소의 꼬리, 그리고 호랑이 다리를 가지고 쇠붙이라면 무조건 집어먹고 자랐다고 한다.

그런데 이 짐승은 화살이나 창 따위로는 물리칠 수 없지만, 불에만은 꼼짝 못한 것으로 되어 있다. 쇠붙이를 물리치는 것은 쇠가 아니라 불이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동국세시기』
『만기요람(萬機要覽)』
『경국대전』
『성호사설(星湖僿說)』
『오주연문장전산고』
『한성순보』
『한국민속대관』(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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