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에는 조선시대에만 5종의 화차가 있었다. 첫번째 화차는 1409년(태종 9) 최해산(崔海山)이 군기부정(軍器副正)이 되어 아버지 무선(茂宣)의 뒤를 이어 각종 화약무기를 연구하던 끝에 완성한 것이다.
작은 수레[小車]에 철로 만든 날개를 단 철령전(鐵翎箭)을 장진한 수십개의 동통(銅㷁:청동으로 만든 총)을 실은 것으로서, 화약을 사용하여 발사하도록 되어 있다.
두번째 화차는 1451년(문종 1) 문종이 손수 창안한 문종화차(文宗火車)이다. 왕세자시절부터 화약무기연구에 많은 관심을 가졌던 문종은 즉위할 즈음 화차의 연구에 몰두하여 이 제도를 완성시켰다.
그 구조는 두 바퀴가 달린 수레 위에 총통기(銃筒機)나 신기전기(神機箭機) 중 하나를 올려놓고 사용한 우리의 독창적인 무기로서, 세계 역사상 흔하지 않게 왕이 직접 발명하고 대량으로 제작하여 사용한 훌륭한 무기이다.
문종화차의 수레는 지름 87㎝짜리 바퀴 2개 위에 길이 2.3m, 너비 74㎝의 차체가 올려진 상태로 나무로 제작되었으며, 2명이 끌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차체 위에는 4전총통(四箭銃筒:細箭 4개를 동시에 쏠 수 있는 총) 50개를 설치한 총통기나 로켓형 화기인 소신기전(小神機箭)·중신기전(中神機箭) 100개를 꽂아 동시에 발사할 수 있는 로켓발사틀인 신기전기를 장치하여 사용한 위력 있는 무기였다.
문종화차의 특징은 수레의 차체 아래에 작은 기둥을 세우고 그 밑에 바퀴를 부착시킴으로써 최대발사각도를 43° 가까이까지 되게 하여 화차에서 발사되는 발사물인 세전이나 로켓인 신기전의 사정거리를 최대한 길게 발사각도를 조절할 수 있도록 한 점이다.
또 총통기를 이용할 경우 동시에 세전 200발을 쏠 수가 있고, 신기전기를 이용할 경우 소신기전이나 중신기전 100발을 발사하여 3, 4명이 화차를 이용하면 적군 50∼100명이 할 수 있는 효과를 올릴 수 있는 점이다. 문종화차는 1451년에만 모두 700대 이상이 제작되어 전국의 해안과 성문 앞에 배치된 중요한 화기였다.
세번째 화차는 문종화차의 총통기에 4전총통 대신 주자총통(宙字銃筒) 50개를 설치하여 사용한 것인데, 주자총통은 1490년(성종 21)경 세종 때 제작된 삼총통(三銃筒)에 붙인 새 이름이다.
주자총통은 피령전(皮翎箭:가죽날개를 붙인 화살)이나 화전(火箭), 그리고 2개의 총알을 발사할 수 있는 다목적용 총으로서, 현존하는 세종 때의 총으로서는 가장 많은 40∼50개가 남아 있다.
네번째 화차는 임진왜란중인 1592년(선조 25) 변이중(邊以中)이 문종화차를 개량하여 만든 것으로, 수레 위에 40개의 승자총(勝字銃)으로 총통기를 설치하고 총의 심지를 이어서 차례로 쏘게 한 것이다.
이 변이중의 화차는 박진(朴晉)이 경주탈환전(慶州奪還戰)에서, 권율(權慄)이 행주산성 전투에서 각각 사용하여 큰 전과를 세웠고, 수군이 군함에 설치하여 사용하기도 하였다.
다섯번째 화차는 19세기 초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변이중의 화차에서 사용된 승자총 대신에 조총 50개를 설치한 것이다. 10개의 조총을 한 층으로 다섯 층을 쌓아 만들었으며, 한 층의 10개 조총이 한 곳에 붙어 있어 한 번에 한층의 조총을 장전할 수 있도록 개량되었다.
화차의 좌우에는 방패를 부착시켰다. 현존하는 화차는 없으며, 다만 채연석의 연구에 의하여 1980년에 복원된 문종화차가 행주산성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