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돌은 열원을 이용하여 바닥을 데우고, 다시 바닥의 열기로 방안의 공기를 데우는 대류의 원리를 이용한 난방 방식으로, 실내에서 신을 벗고 바닥에 앉거나 눕는 좌식의 주생활 문화를 형성한 주요 원인이다. 중국 북부 지역에도 일부 공간의 바닥을 데워 사용하는 캉[坑]이 있지만, 방바닥 전면을 데우는 온돌은 우리나라만의 고유한 방식이다.
집을 짓기 시작하던 신석기시대 움집에는 노(爐)에서 피운 불로 난방과 취사 및 조명을 하였다. 청동기시대에는 난방을 위한 노와 취사를 위한 부뚜막이 분리되었으며, 초기 철기시대가 되어서야 온돌의 원시형이라 할 수 있는 고래식 구들과 굴뚝 시설이 나타났다.
이후 바닥 난방의 주요 구조부인 고래는 'ㄱ'자형 고래, 쌍줄고래, 세줄고래와 같이 여러 줄의 고래로 진화하다가 고려 후기에 이르러서야 방바닥 전체에 고래를 설치하고 구들장을 까는 전면온돌 구조의 완성을 보았다.
전면온돌이 시설되기 시작한 고려 후기 이래로, 온돌 설치가 가장 적극적으로 이루어진 시기는 17세기다. 현상학적 계기는 임진왜란, 인조반정, 이괄의 난, 병자호란 등으로 파괴된 건축물을 복구하면서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여름 한발(旱魃)과 겨울 추위가 계속되는 이상기후에 있었다.
17세기 온돌의 설치가 지역과 계층 구별 없이 급증하자, 땔감 수급으로 인해 경제적 · 자연 환경적 문제가 발생하였고, 온돌에 대해서는 긍정적 · 부정적 견해가 병존하였다. 그러나 온돌은 병증치료나 인간적인 배려 측면에서 효과를 발휘하여 점점 더 사회에 확대되었다.
온돌 사용의 증가에 따라 18세기에는 난방 효율 증대를 위한 건축적 변화까지 이끌어 냈다. 이전에 비해 온돌방의 칸을 적게 잡아 난방 체적을 줄였으며, 온돌방 주변에 수납공간이나 가퇴(假退)를 두어 열 완충공간을 만들었고, 다중창호를 설치하여 외부의 한기를 적극적으로 차단하였다.
건축적 변화까지 이끌어 낸 전통적인 온돌은 아궁이에서 장작이나 숯에 불을 붙여 그 열기가 고래를 통과하면서 바닥을 따뜻하게 하는 직접 가열식 난방으로 취사와 난방이 동시에 가능한 구조였다. 근대 이후 열원이 연탄에서 가스, 기름, 전기 등으로 바뀌고 바닥에는 고래 대신에 온수파이프나 전기 패널을 설치하여 난방하면서 아궁이는 사라졌다.
연료를 주입하는 곳에서 바로 불을 피우는 것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취사를 위한 공간이 분리되었다. 건축재료도 불에 강한 철, 시멘트, 유리 등이 등장하면서 이전보다 화재에 대한 염려가 줄어들게 되었다.
온돌문화는 한국의 총체적인 주거문화로 바닥 난방 및 생태환경 활용 기술뿐만 아니라 한국인의 생활관습과 규범이 포함되어 있다. 온돌을 통해 난방을 하는 생활방식은 주택, 실내건축, 가구의 형식뿐만 아니라 대중문화에도 영향을 주어 한국을 대표하는 ‘온돌방’ 문화로 대중화되었다.
온돌문화는 오래전부터 전승되고 지속적으로 재창조되어 한국 사회의 주생활과 대중문화에 영향을 미쳐온 사회문화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유산으로 한반도가 처했던 혹한의 기후환경에 지혜롭게 적응하고 대처해 온 한국인의 창의성이 발현된 문화라는 점에서 가치가 인정되어 2018년 4월 30일 국가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유산)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