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산고택은 조선 후기의 문신인 만산(晩山) 강용(姜鎔)이 1878년에 건립한 가옥이다. 강용은 벼슬길이 생겨도 나아가지 않던 인물로, 1905년(고종 42)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을사의소(乙巳擬疏)를 올려 늑약에 동조한 오적대신을 참형으로 다스리고 위협으로 체결한 늑약은 성립될 수 없음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을사늑약 이후에는 집 근처에 학문소인 태고정(太古亭)을 지어 망국의 한을 학문으로 달래며 남은 여생을 후학 양성에 힘썼다.
경상북도 북부 지역 사대부가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ㅁ’자 형 평면으로 전면에 사랑이 자리하고, 그 뒤에 가족들의 생활공간인 안채가 자리하고 있으며, 좌우 익랑은 고방과 부엌으로 구성되어 있다. 출입은 측면으로 한다.
서실(書室)은 정면 2칸, 측면 1칸, 우진각 지붕의 건물로 모두 온돌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망와에 “광서(光緖) 6년 경진(庚辰) 4월”이라는 명문이 있어 1881년에 건축 행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별채 칠류헌(七柳軒)은 영친왕을 비롯한 조선 말기의 여러 문인들과 학문을 교류하던 장소로 전면에 퇴를 둔 정면 4칸, 측면 2칸 건물이다. 건물의 기능에 걸맞게 온돌방과 마루방 사이에 분합들문을 설치하여 공간을 확장할 수 있게 하였다.
강용의 아호인 '만산(晩山)'을 판각한 현판은 흥선대원군이 친필로 써서 하사한 것이며, 서실 처마 밑에 있는 ‘한묵청연(翰墨淸緣)’ 편액은 영친왕이 8세 때 쓴 글이어서 왕실과의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