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최초의 주간신문으로, 1886년 1월 25일 ≪한성순보 漢城旬報≫의 복간형식으로 박문국(博文局)에서 창간되었다. 이 신문은 한지책자형(韓紙冊子型)의 양절(兩折)로 인쇄되었으며, 4호활자가 사용되었다.
편집체재는 1단제로서 1면 16행, 1행 40자, 1호 16면 또는 18면씩 발행되었다. 규격은 세로 22.5㎝, 가로 16.5㎝였다. ≪한성순보≫가 한자만을 사용한 데 반하여 이 신문은 최초로 국한문을 혼용하였고, 내용에 따라 순한글 또는 순한문만을 쓰기도 하였다.
이 신문은 창간사에서 밝히고 있듯이, 임금에게 충성하고 백성을 깨닫게 하는 것을 최대의 사명으로 삼았다. 1884년 4월 19일김윤식(金允植)이 통리아문독판(統理衙門督辦)에 임명되면서 발간작업이 추진되었다.
즉, 갑신정변으로 ≪한성순보≫가 폐간되자 조야(朝野:조정과 재야)에서는 다시 신문 발간의 필요성이 거론되었으며, 김윤식 역시 신문이 개화의 도구로서 매우 유익함을 인식하고, 정변의 뒷수습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신문의 속간을 추진하게 되었다. 이에 5월 12일 고종은 박문국을 광인사(廣印社)로 옮겨 신문을 발간하라고 명하였다.
광인사는 그 해 3월한성 성 내에 설립된 근대적 시설을 갖춘 민간 출판사였다. 그러나 광인사에서 신문을 속간하는 데는 애로가 있음을 알고, 6월 12일 인쇄시설을 갖춘 박문국을 중건하는 방향으로 방침을 바꾸었다.
이에 따라 활자를 비롯하여 일체의 인쇄시설을 일본에서 도입하고 10월 28일≪한성순보≫의 편집을 맡았던 장박(張博)·오용묵(吳容默)·김기준(金基駿) 외 이명륜(李命倫)·진상목(秦尙穆)·이혁의(李赫儀)·권문섭(權文燮)·정만교(鄭萬敎)·이홍래(李鴻來) 등 6명을 보강하여 신문속간작업에 나섰다.
11월 22일 이들 외 박세환(朴世煥)·현영운(玄映運)이 보강되었다. 그 뒤 이혁의 대신 추백엽(秋栢燁)으로, 권문섭 대신 한중철(韓重喆)로 편집요원이 교체되었으며, 1886년 말부터는 7, 8명의 주사가 더 임명되었다.
1888년 7월 7일 박문국이 폐지됨에 따라 총 120여 호를 발행하고 폐간되었다. 그러나 현재 실물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여서 정확하게 몇 호까지 발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