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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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신문 창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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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에, 경성신문사에서 상인들의 이익을 위하여 창간한 상업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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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898년에, 경성신문사에서 상인들의 이익을 위하여 창간한 상업 신문.
내용

우리나라 최초의 상업신문으로, 원래 농상공부(農商工部)의 발행인가 일자는 3월 8일이었으나 정식 인가 전인 3월 2일에 창간호가 나왔다.

윤치호(尹致昊)가 사장을 맡고, 정해원(鄭海源)이 사무원으로 한성 전동(典洞) 소재 윤치호의 자택에서 발행되었다.

윤치호는 농상공부대신에게 낸 인가청원에서, “아국상무(我國商務)가 흥왕(興旺)ᄒᆞ기ᄅᆞᆯ 위ᄒᆞ야 온갓 물건(物件)의 시치(時値)와 인민(人民)의 소문소견(所聞所見)을 기재(記載)ᄒᆞ고 호왈(號曰) 경성신문(京城新聞)이라ᄒᆞ와…… 각항상민(各項商民)의 이익(利益)을 조(助)코자 ᄒᆞ오니……”라 하여 상업신문으로서의 창간취지를 밝혔다.

이 신문은 주 2회간으로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에 발행되었으며, 순국문만을 사용하였고, 소형판 2면으로 편집체재는 3단제를 택하였고, 1단은 36행, 1행은 20자였다.

이 신문은 『독립신문』과 대체로 비슷한 편집방식을 사용하여 제호 밑에 논설을 싣고, 이어 관보(官報)·외보(外報)·잡보(雜報) 등을 게재하였다.

신문값은 한장에 엽 5푼, 1개월분 선납에 14돈, 1년분 선납에 엽 4냥2돈이었으며, 외방의 독자에게는 별도로 우송료를 받았다.

이 신문은 11호(1898년 4월 6일자)부터는 ‘대한황셩신문’으로 제호가 바뀌어 계속 발행되다가 1898년 9월남궁 억(南宮檍)이 판권을 물려받아 ‘황성신문’으로 개제, 창간하였다.

참고문헌

『한국언론사연구』(정진석, 일조각, 1983)
『한국언론연표』(계훈모 편, 관훈클럽신영연구기금, 1979)
『한국신문백년』(한국신문연구소, 1975)
『한국신문사연구』(이해창, 성문각, 1971)
『한국신문사』(최준, 일조각,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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