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상업신문으로, 원래 농상공부(農商工部)의 발행인가 일자는 3월 8일이었으나 정식 인가 전인 3월 2일에 창간호가 나왔다.
윤치호(尹致昊)가 사장을 맡고, 정해원(鄭海源)이 사무원으로 한성 전동(典洞) 소재 윤치호의 자택에서 발행되었다.
윤치호는 농상공부대신에게 낸 인가청원에서, “아국상무(我國商務)가 흥왕(興旺)ᄒᆞ기ᄅᆞᆯ 위ᄒᆞ야 온갓 물건(物件)의 시치(時値)와 인민(人民)의 소문소견(所聞所見)을 기재(記載)ᄒᆞ고 호왈(號曰) 경성신문(京城新聞)이라ᄒᆞ와…… 각항상민(各項商民)의 이익(利益)을 조(助)코자 ᄒᆞ오니……”라 하여 상업신문으로서의 창간취지를 밝혔다.
이 신문은 주 2회간으로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에 발행되었으며, 순국문만을 사용하였고, 소형판 2면으로 편집체재는 3단제를 택하였고, 1단은 36행, 1행은 20자였다.
이 신문은 『독립신문』과 대체로 비슷한 편집방식을 사용하여 제호 밑에 논설을 싣고, 이어 관보(官報)·외보(外報)·잡보(雜報) 등을 게재하였다.
신문값은 한장에 엽 5푼, 1개월분 선납에 14돈, 1년분 선납에 엽 4냥2돈이었으며, 외방의 독자에게는 별도로 우송료를 받았다.
이 신문은 11호(1898년 4월 6일자)부터는 ‘대한황셩신문’으로 제호가 바뀌어 계속 발행되다가 1898년 9월남궁 억(南宮檍)이 판권을 물려받아 ‘황성신문’으로 개제, 창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