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익계 신문의 하나로, 1945년 11월 1일 김형수(金亨洙) 등이 일본인 소유의 『조선상공신문(朝鮮商工新聞)』의 사옥과 시설을 구입하여 창간하였다.
편집인 겸 발행인은 김형수, 편집국장은 이상호(李相昊)이었다. 발행소는 서울 중구 을지로 2가 199였으며, 구독료는 1개월에 9원이었다.
처음에는 『국민신보(國民新報)』로 제호를 정하였으나, 경영진과 종업원의 계약조건이 성립되지 않아 발행을 하지 못하고 있다가 후에 『중앙신문』의 제호로 발행되었다.
광복 후 최초의 블랭킷판 신문을 시도하였다. 이 신문은 창간호에 김용환(金龍煥)의 「박첨지」라는 연재만화를 게재하고, 박종화(朴鍾和)의 신문소설 「민족」을 연재하여 주목을 끌었다.
또, 개화기의 『독립신문(獨立新聞)』의 편집체재와 유사하게 1면의 맨 우측 상단에 사설을 실었다. 이 신문은 이른바 ‘진보적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좌익계의 논조를 띠어, 1946년 5월 14일 이후 3차에 걸쳐 우익청년들의 습격을 당하였다.
미군정 당국은 이 신문이 계속 군정을 비판하자, 1946년 9월 6일 신문사를 수색하여 이상호·황대벽(黃大闢)·유택규(柳澤奎)·오재동(吳在東)·진수동(陳壽東) 등을 구속하고 이 날짜로 무기한 발행정지처분을 내렸다.
발행정지처분을 받은 지 약 4개월 후인 1947년 4월 19일 경영진을 새롭게 하여 B4판으로 속간하였으나 판권소유로 인한 내부 갈등으로 말미암아 미군정당국에 의하여 폐간당하였다. 정확한 폐간일자는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