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 시집온 며느리에게 불씨를 꺼뜨리지 말도록 당부한다. 며느리는 밤을 새우면서 불씨를 꺼뜨리지 않도록 노력하지만, 벌거벗은 동자가 나타나서 오줌을 싸고 사라져 불씨를 꺼뜨리게 된다. 동자를 쫓아가 산속을 헤매다가 아이가 결국 동자삼이어서 동자삼을 캐와 큰 부자가 되었다는 것이 결말이다.
이 이야기는 종래에는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지켜 내려는 불의 기원 신화적 면모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해석했다. 또 야래자적 설화의 변이 소인이 들어가 있는 것으로 보고 야래자 설화와의 관련성을 논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불씨를 지키는 것과 불씨를 꺼뜨리는 것의 상충과 이러한 설정이 지닌 의미를 다양하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
며느리가 불씨를 지키는 것은 불씨로 표상되는 생명의 순혈주의적 지속성을 말한다. 불씨가 꺼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혈통적인 단일성을 지속해야 한다는 말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단일적 순혈주의적 존속을 방해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것은 벌거벗은 동자가 나타나서 불씨에 오줌을 싸서 꺼뜨리는 것이다. 아이가 벌거벗고 나타나서 오줌을 싸는 것은 불씨를 지키려는 것에 적대적인 행위가 된다. 다른 말로 고쳐서 말한다면 순혈주의적 존속성을 해치는 행위이다.
자신의 혈통을 강조하면서 지켜 오던 불씨를 꺼뜨리고 자신의 오줌을 넣어 주는 기형적 행위는 이른바 수부지모의 신화 전통과 관련이 있다. 야래자로 상징되는 인물이 등장하여 여성을 가임시키고 이를 추적하게 하는 이야기의 결과물들이 백제의 무왕, 후백제의 견훤 등의 이야기에서 다수 발견된다. 불씨를 꺼뜨린 존재를 찾아 나서면서 마침내 발견한 것이 동자삼이고 이것을 팔아서 부자가 되었다는 것은 불씨를 지키는 것과 모순되거나 연관성이 적은 결합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외지에서 피를 공급받아 혈통적 다양성을 보강하던 방식과 깊은 관련이 있을 개연성이 있다.
변이형에서는 동자삼이 아니라 은항아리가 되기도 하고, 벌거벗은 동자가 아니라 “다팔다팔한 모지랑 머리에 노랑 저고리 빨간 치마 입은 조그만 계집애가 살금살금” 들어오기도 하는 등 극심한 차이를 보인다. 벌거벗은 동자와 꼬까옷을 입은 계집애는 대조적이다. 여기서 해석에 이견이 생기게 되는데 무엇이 본질인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 원형적으로 본다면, 벌거벗은 동자여야 하고 오줌을 누는 행위가 동일한 것으로 보아 같은 이야기의 원형이 변이되었을 것이다.
설화의 변이를 가능하게 하는 또 하나의 이야기 유형이 〈동자삼(童子蔘)〉 이야기이다. 부모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자신의 아이를 삶아서 달인 물을 먹이는 효행 이야기이다. 서당에 간 아이가 오자 아이를 삶아서 달인 물을 부모님께 드렸는데, 이튿날 아이가 와서 솥을 열어 보니 동자삼이 들어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유형의 이야기가 서로 간섭하면서 유형적 변이를 일으키고 아이가 들어와서 부자가 되거나 새로운 혈통이 첨가되는 이야기의 변형이 일어나면서 며느리 이야기의 중심이 이동한 결과가 바로 이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대대로 내려온 불씨 설화는 본질적으로는 불씨를 지켜 내는 이야기이다. 불씨를 지피는 행위는 본래 화덕이나 아궁이에서 연료를 때는 행위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연료가 황금이나 값진 것으로 변화하는 것에 여러 가지 이야기의 변이가 첨가되면서 이러한 이야기의 변형이 이루어졌을 개연성이 있다. 중국이나 대만, 북방 수렵민들, 일본에서도 불씨를 지켜 내는 이야기들이 있어 비교 설화학적 관점에서도 중요한 설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