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에 한양을 건설한 뒤 화재를 예방하기 위하여 인접한 가옥과 가옥 사이에 방화장(防火墻)을 쌓고, 요소(要所)마다 우물을 파고 방화기기(防火器機) 등을 설치한 바 있다.
1426년(세종 8) 2월에 화적(火賊)의 방화로 큰불이 일어나자, 곧 금화도감을 설치하여 화재의 방지와 개천과 하수구의 수리 및 소통을 담당하게 하고, 화재를 이용한 도적들을 색출하게 하였다. 관원은 제조(提調) 7인, 사(使) 5인, 부사(副使)·판관(判官) 각각 6인을 두었다.
그러나 앞서 1422년 2월에 설치한 바 있는 성문도감(城門都監)과 함께 금화도감이 크게 할 일이 없어짐에 따라 이해 6월에 두 도감을 합하여 수성금화도감(修城禁火都監)이라 하고, 수성·금화업무 외에 하천·도랑 소통, 도로·교량 수축 등의 일을 맡게 하였다.
그 뒤에도 수성금화도감은 업무가 그렇게 많지 않아 1460년(세조 6) 5월에 중앙 각 관서의 대폭적인 인원감축 및 불요불급한 기구축소 때 도감을 폐지하여 수성의 업무는 공조(工曹)로, 금화의 업무는 한성부로 이관하였다.
그러다가 1481년(성종 12) 3월에 그동안 소방업무의 해이(解弛)로 화재가 자주 일어나고 도둑질을 위한 방화가 많아지자, 금화도감을 다시 부활하자는 논의가 일어나 앞서 폐지하였던 수성금화도감이 부활되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수성금화사(修城禁火司)로 격상되어 『경국대전』에 법제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