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중요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유산)로 지정되었다. 주로 해남 · 완도 · 무안 · 진도 등 전라남도 해안일대에서 성행되어왔다. 노래와 무용과 놀이가 혼합된 부녀자들의 놀이로 주로 추석날밤에 행하여지며 정월대보름날밤에 하기도 한다. 명칭은 ‘강강수월래’ 또는 한자로 ‘强羌水越來(강강수월래)’로 표기하는 일도 있으나 ‘강강술래’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진양조로 느리게 노래를 부를 때는 ‘강강수월래’로 길게 발음된다. 기원에 대하여는 여러 설이 전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이순신(李舜臣)과 관련되어 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해남 우수영에 진을 치고 있을 때, 적군에 비하여 아군의 수가 매우 적었다. 그래서 이순신은 마을 부녀자들을 모아 남자차림을 하게 하고, 옥매산(玉埋山) 허리를 빙빙 돌도록 했다.
바다에서 옥매산의 진영을 바라본 왜병은 이순신의 군사가 한없이 계속해서 행군하는 것으로 알고, 미리 겁을 먹고 달아났다고 한다. 이런 일이 있은 뒤로 근처의 마을 부녀자들이 서로 손을 잡고 빙빙 돌면서 춤을 추던 관행이 강강술래로 정착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강강술래>의 기원은 이순신의 창안에서 비롯된다는 주장이 있다.
한자로는 ‘强羌水越來(강강수월래)’라고 표기하고, ‘강한 오랑캐가 물을 건너온다.’는 해석은 바로 여기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강강술래>는 원시시대의 부족이 달밤에 축제를 벌여 노래하고 춤추던 유습(풍습)에서 비롯된 민속놀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고대로부터 우리 나라 사람들은 달의 운행원리에 맞추어 자연의 흐름을 파악하였고, 따라서 우리 나라 세시풍속에서 보름달이 차지하는 위치는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즉, 달이 가장 밝은 추석날이나 정월대보름날이면 고대인들은 축제를 벌여 춤과 노래를 즐겼고, 이것이 정형화되어 <강강술래>로 전승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전승된 <강강술래>를 이순신이 의병술(擬兵術)로 채택하여 승리를 거둠으로써 널리 보급되고 더욱 큰 의미를 부여받게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놀이의 진행과정 및 방법은 다음과 같다. 추석이 가까워지면 소녀들에 의하여 <강강술래>가 시작된다. 이른바 ‘아기 강강술래’이다. 소녀들이 수명 또는 10여명이 모여 손과 손을 잡고 마당에 원을 그리면서 빙빙 돌며 노래하고 춤을 춘다.
이렇게 며칠을 계속하다가 음력 8월 14일 밤이나 15일 밤에는 어른들에 의해 본격적인 <강강술래>가 벌어진다. 동쪽 산 위에 만월이 솟아오르기 시작하면 젊은 아낙네와 큰애기들이 마을의 넓은 마당이나 평지에 모여든다. 20∼30명의 젊은 부녀자들이 모이고 달이 뜨면 아낙네들은 손과 손을 잡고 오른쪽으로 돌면서 <강강술래>를 시작한다.
목청 좋고 소리 잘 하는 여인이 맨 앞에 서서 메기는 소리를 하면, 나머지 사람들은 “강강술래” 하고 받는 소리를 한다. 노래는 처음에는 진양조의 느린 가락으로 부르다가 중모리 · 중중모리로 차츰 빨라져서 마지막에는 자진모리로 매우 빠르게 부르며, 이에 따라 춤도 빠른 속도로 추게 된다. 한바탕 뛰고 노는 시간은 일정하지 않고, 맨 앞에서 노래를 선창하는 사람의 능력에 따라서 길 수도 짧을 수도 있다.
‘강강술래’ 소리는 구절마다의 후렴이며, 가사는 일정하게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고, 가창자에 따라 즉흥적으로 얼마든지 길게도 짧게도 부를 수가 있으며, 가락 또한 완급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따라서 <시집살이노래>나 <베틀가>가 중간 중간에 삽입될 수도 있고, 타령이나 노랫가락의 구절이 삽입되는 수도 있다. 가락은 육자배기와 마찬가지로 미 · 라 · 시 · 도 · 레의 전형적인 남도악의 계면조로 되어 있다.
○진양조
(선창) (후렴)
술래술래 강강술래 강강술래
술래좋다 강강술래 강강술래
달떠온다 달떠온다 강강술래
동해동창 달떠온다 강강술래
팔월이라 한가위날 강강술래
술래술래 강강술래 강강술래
각시님네 놀음이라 강강술래
(중략)
○중모리 · 중중모리
오동추야 달은밝고 강강술래
우리임생각 절로난다 강강술래
임아임아 노이나마라 강강술래
너줄라고 해온보신 강강술래
너안주고 누구를줄까 강강술래
(중략)
○자진모리
술래술래 강강술래 강강술래
강강좋다 술래돈다 강강술래
앞에가는 군사들아 강강술래
발맞춰서 뛰어가세 강강술래
곁에사람 보기좋게 강강술래
먼데사람 듣기좋게 강강술래
억신억신 뛰어가세 강강술래
(하략)
<강강술래>의 춤은 우리 나라 춤 가운데서 유일하게 손을 잡고 추는 집단무용으로 원무(圓舞)를 기본으로 하고, 중간에 여러 놀이가 삽입된다. 왼손을 앞으로 하고 오른손을 뒤로 돌린 자세에서 왼손으로 앞사람의 오른손을 잡고, 오른손으로 뒷사람의 왼손을 잡아 원형을 만든다. 잡을 때는 손가락을 오므려서 상대방의 손가락과 얽어 쥐게 된다.
선창자의 노래에 맞추어 서서히 발을 옮겨 원을 그리면서 왼쪽으로 돈다. 처음에는 진양조로 느린 가락에서 시작하는데, 이를 ‘늦은강강술래’, 또는 ‘긴강강술래’라고 한다. 그러다가 중모리 · 중중모리장단의 ‘중강강술래’에서는 보통 걸음보다 약간 느린 걸음으로 돌다가 가락이 차츰 빨라지면서 가볍게 어깨놀림이 시작되고, 손의 잡음도 넓어지면서 원이 넓게 벌어진다.
자진모리장단의 ‘자진강강술래’에서는 가락이 급해지며 춤도 여기에 맞추어 빨라진다. 발디딤은 ‘하나’에 왼발 무릎을 굽혀 올리면서 원주 상으로 양발을 뛰고, ‘둘’에는 왼발을 오른발 앞으로 교차하여 힘차게 왼발로 마당을 밟는다. 이러한 동작을 반복하면서 원주 상을 돌아가다가 속도가 아주 빨라지는 마지막에는 손을 힘차게 흔들면서 1박에 두발을 연달아 뛰면서 돈다.
그래서 아낙네들은 ‘한바탕 뛰자.’고 한다. 이렇게 원무를 추다가 흥이 나면 중간에 다른 놀이들이 삽입된다. 예컨대 <남생이놀이> · <멍석말이> · <고사리꺾기> · <청어엮기> · <문열기> · <기와밟기> · <쥔쥐새끼놀이> · <가마등> · <도굿대당기기> · <수건찾기> · <품고동> · <봉사놀이> 등이 잇달아 놀이를 한층 즐겁게 만든다.
<남생이놀이>는 원무의 원 안에 두세 사람이 자유롭게 뛰어들어 가락에 맞추어 손을 위로 들거나 춤추면서 뛰어다니다가 제자리로 들어가면, 다음에 다른 사람이 뛰어들어 같은 모양의 춤을 추게 되는 것을 말한다. <멍석말이>는 마치 멍석을 말듯이 맨 앞의 선두가 작은 원으로 춤 형태를 바꾸고 모두 한 덩어리가 되면, 속에서부터 풀며 나오는 춤이다.
<고사리꺾기>는 춤추는 사람들이 모두 앉고 맨 앞의 선두가 일행을 끌고 앉은 사람의 팔 위로 차례로 넘어가서 모두 일어서는 동작이며, <청어엮기>는 어깨 밑으로 빠져나가는 동작, <문열기>는 모두 허리를 굽혀서 앞사람의 허리를 두 팔로 끌어안고 두 사람이 팔을 들고 만든 문 밑으로 빠져나가는 동작이다. <쥔쥐새끼놀이>는 꼬리따기놀이와 같은 동작으로 상대방의 꼬리를 잡으려고 한다.
<가마등>은 가마타기놀이의 모의희(模擬戱)로 두 사람이 손을 잡아 井자형으로 가마모양을 만들어 그 위에 한 사람을 태우고 마당을 돌아다닌다. 이 놀이는 편을 갈라 일정한 거리까지 갔다오는 경주를 벌이기도 한다.
이와 같은 놀이들에는 동요풍의 노래가 삽입되어 불려진다. <강강술래>에 이처럼 여러 유희가 혼합되는 것은, 1년에 한 번 맞이하는 만월의 명절에 흥겨운 판이 벌어져 여러 놀이가 한 마당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놀이나 노래에 일정한 순서가 있는 것이 아니고, 이끌어 가는 사람에 의하여 얼마든지 신축성 있게 놀이가 진행될 수 있다. 또한, 한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초저녁부터 시작하여 밤이 깊도록 놀기 때문에 선창자도 교체되고 이에 따라 놀이도 다양하게 전개될 수 있다.
1966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 계승되고 있다. 예능보유자로 창(唱)에 양홍도(梁紅道)와 김길임(金吉任)이 인정되었는데, 이 중 양홍도가 사망한 뒤에 최소심(崔小心)이 인정되었으나 사망하였고, 그 뒤 1993년박용순(朴龍順)이 인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