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기시(軍器寺)에 소속된 화포장(火砲匠)으로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라는 포탄을 만들어 공을 세웠다.
비격진천뢰는 특히 폭발시간을 조절할 수 있는 목곡(木谷)이 들어 있는데, 이것은 그의 발명으로 알려져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경상좌도병마사 박진(朴晉)은 좌도의 군사 1만여 명을 이끌고 경주성 아래에 육박하였지만 적의 반격으로 안강까지 후퇴하였다.
그러나 야음을 이용, 병사들에게 성 아래에 잠복하게 하여 대완구로 비격진천뢰를 발사하였다. 성 안 객사 앞에 떨어진 비격진천뢰의 구조나 내용을 모르는 적들은 모여들어 이리저리 굴려보다 폭파하여 즉사자 30여 명이 발생하였고, 실신하여 한참만에야 일어난 자도 많았다.
이를 두려워한 적들은 다음날 성을 버리고 서생포로 도망하였고, 이 승리로 인하여 좌병사 박진은 성 안에 들어가 남은 곡식 1만여 섬을 도로 찾았다는 기사는 비격진천뢰의 창의성을 말해주는 좋은 보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