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개더미는 인류가 조개를 채집한 다음 먹고 버린 조개껍질을 폐기하면서 형성된 생활유적이다. 조개무지 또는 패총(貝塚)이라고도 한다. 주로 조개껍질로 구성되지만 다양한 음식물 쓰레기를 비롯하여 부서진 석기와 토기 등도 포함되어 있다. 선사시대 문화를 복원하는 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유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신석기시대부터 출현하였다. 동해안 지역보다는 조수간만의 차이가 큰 남해안과 서해안 지역에 밀집되어 있다. 규모가 작고 출토 유물이 빈약한 서해안과 달리 남해안에서는 장기간에 걸친 주거와 관련된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조개무지라고도 하며 한자어로는 패총(貝塚)이라고 한다. 조개더미는 주로 조개의 껍질으로 구성되나 이외에 다양한 음식물 쓰레기를 비롯하여 더 이상 쓸모없는 부서진 석기, 토기 등 일상적인 생활 쓰레기가 포함되어 있다. 인류가 식량자원으로서 조개류를 채집하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 구석기시대의 테라 아마타(Terra Amata)유적으로 미루어 볼 때, 약 30만년 전인 것으로 추정된다.
인류가 본격적으로 조개류를 채집하여 전 세계적으로 조개더미가 출현하는 것은 약 1만년 전의 완신세기에 들어서인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 성과에 따르면 조개더미의 출현은 그 보다 훨씬 앞선 약 20만년 전까지 소급된다. 이러한 이른 시기의 조개더미유적은 핀나클 포인트(Pinnacle Point)유적을 비롯한 남아프리카 남부 해안에 위치하고 있는 중기 구석기시대의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유적에서 다수 발견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조개더미가 출현하는 것은 신석기시대부터이다.
조개더미는 19세기 중엽 덴마크의 동물학자 스틴스트럽(Steenstrup)과 고고학자 워사에(Worsaae) 등에 의해 인류가 남긴 유적으로 인식된 이래 고고학적으로 특히 선사시대 문화를 복원하는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유적으로서 주요한 연구 대상이 되어 왔다. 고고학적인 조개더미 연구는 유적과 유물의 편년 연구, 생업경제 연구, 고환경 연구, 유적 점유 양상 연구 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특히 최근의 조개더미 연구는 자연과학의 발달에 힘입어 점차 과학적이고 객관화 되고 있는 추세이다. 탄소 · 질소동위원소 분석을 이용한 식생활 연구, 성장선 · 산소동위원소 분석을 이용한 고환경 및 유적 점유 계절성 연구 등이 대표적인 연구사례이다.
우리나라에서의 조개더미 연구는 일제강점기인 1900년대 초의 김해 회현리 조개더미의 발굴에서 비롯되었다. 그 후 많은 조사를 통해 현재 전국적으로 약 597개소의 조개더미가 확인되었으며, 동일 지역에 형성된 시대가 다른 조개더미를 모두 계산하면 총 698개소에 이른다. 이러한 조개더미는 대부분 해산 조개류를 주체로 하는 함수(鹹水) 조개더미이며 주로 해안가나 도서지역에 분포한다. 시대별로 보면 수렵 · 채집경제 단계였던 신석기시대의 조개더미가 322개소(46.1%)로 가장 많다. 이어 청동기시대에는 76개소(10.9%)로 급격히 감소하다가 삼한 · 삼국시대에 233개소(33.42%)로 다시 증가한다. 이후 통일신라 6개소(0.8%), 고려 · 조선시대 23개소(3.3%), 시대 미상 38개소(5.4%)이다.
지역별로 조개더미의 분포를 살펴보면, 남해안지역 211개소(35.2%), 서해안지역 340개소(56.8%), 동해안지역 30개소(5.0%), 제주도 20개소(3.3%)이다. 서해안과 남해안지역에 조개더미가 다수 분포하는 것은 조개류 채집에 용이한 자연환경적 요인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즉 동해안지역은 조수간만의 차가 작은 암초성(巖礁性) 해안이 발달되어 조개류 서식과 채집에 적합하지 않다. 따라서 함경도를 제외한 동해안지역에서는 조개더미가 드물다. 이에 비하여 남해안과 서해안지역은 조수간만의 차가 크고 간석지가 발달되어 조개의 서식과 채집에 적합한 환경을 이루고 있어 조개더미가 밀집 · 형성되어 있다.
신석기시대 조개더미는 현재까지 남해안지역 110개소(34.1%), 서해안지역 185개소(57.4%), 동해안지역 23개소(7.1%), 제주지역 4개소(1.2%) 등 모두 322개소가 발견되었다. 이 가운데 남해안지역의 부산 동삼동 조개더미 · 범방동 조개더미, 김해 수가리 조개더미, 통영 연대도 조개더미 · 욕지도 조개더미 · 상노대도 조개더미, 여수 송도 조개더미 · 안도 조개더미, 완도 여서도 조개더미, 서해안지역의 정주 당산 조개더미, 온천 궁산 조개더미, 시흥 오이도 조개더미, 부천 시도 조개더미, 동해안지역의 웅기 서포항 조개더미, 청진 농포동 조개더미, 울산 세죽리 조개더미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웅기 서포항과 부산 동삼동유적은 신석기시대의 전 기간에 걸쳐 형성된 대규모 유적으로서 각각 동북지방과 남해안지방의 신석기문화 편년 설정을 위한 기준 유적이 되고 있다.
서해안지역의 조개더미유적은 대체로 규모가 작고 출토 유물이 빈약한 편인데 비해 남해안지역의 조개더미는 규모가 크며 다양한 종류의 유물이 다량 출토된다.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서해안지역 조개더미는 자원 이용을 위해 한시적으로 점유된 한정 행위 장소 또는 야외 캠프형 유적으로, 남해안지역 조개더미는 장기간에 걸친 주거와 관련된 근거지형 유적으로 보고 있다. 서포항, 궁산, 오이도, 송도, 동삼동유적을 비롯한 다수의 신석기시대 조개더미유적에서는 주거지도 함께 발견되어 조개더미의 점유 양상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또한 남해안지역의 상노대도, 욕지도, 연대도, 안도, 동삼동, 범방 조개더미 등에서는 무덤이 발견되어 조개더미 지역에 장기간 점유되었음을 말해주며 신석기시대의 매장풍습은 물론 형질인류학적 연구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준다. 한편 이러한 남해안지역의 신석기시대 조개더미에서는 일본 규슈〔九州〕산 흑요석제 석기, 돌숟가락〔石匙〕 · 죠몽〔繩文〕토기 등 규슈에서 유행하던 양식의 석기와 토기들이 출토되어 두 지역 주민의 이동과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청동기시대 조개더미는 남해안지역 15개소(19.7%), 서해안지역 57개소(75%), 동해안지역 2개소(2.6%), 제주도 2개소(2.6%) 등 총 76개소가 알려졌다. 다른 시대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매우 적으며 단독으로 형성된 경우가 적고 다른 시대의 조개더미와 중복되는 경우가 많다. 북한 지역에서는 나진 초도 조개더미와 웅기 서포항 조개더미를 제외하고 조사된 예가 거의 없으며, 대부분 남한 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청동기시대에 조개더미가 급감하는 양상에 대해서는 농경사회로의 생업경제 변화 또는 해수면 변동 등에서 그 요인을 구하고 있다. 그러나 해수면 변동에 관한 구체적인 자료가 없고 후행하는 원삼국시대 · 삼국시대에 조개더미가 급증하는 현상으로 볼 때 단순히 생업경제의 변화로 설명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청동기시대의 대표 유적인 안면도 고남리, 보령 소송리 조개더미 등에서 다양한 동물유체가 출토되고 있어서 농경사회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수렵과 어로를 병행하였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청동기시대에 해안지역에서 조개더미가 급감하는 요인에 대해서는 다각도의 검토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그 당시 토지 이용 양상의 변화도 하나의 요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청동기시대에는 농경사회가 되면서 해안지역보다는 내륙의 평야지역을 선호하게 되었고 실제로 내륙에서 유적의 발견 빈도가 월등히 높다. 이와 같은 토지 이용 양상의 변화는 해안지역 조개더미의 급감을 초래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최근 낙동강 중 · 지류역에서 재첩을 주체로 하는 담수(淡水) 조개더미가 다수 발견되고 있어 당시 농경을 하면서 주변의 내륙 수계에서 조개류 채집 등의 생업활동을 전개하였을 개연성이 보인다. 이러한 개연성에 대하여는 내륙지역에 대한 조사를 통해 밝혀져야 할 것이다.
원삼국 · 삼국시대 조개더미는 남해안지역 86개소(36.9%), 서해안지역 124개소(53.2%), 동해안지역 8개소(3.4%), 제주도 15개소(6.4%) 등 모두 233개소가 알려졌는데 대부분 원삼국시대의 조개더미이다. 대표 유적으로는 김해 회현리 조개더미 · 봉황동 조개더미, 양산 다방동 조개더미, 부산 낙민동 조개더미, 고성 동외동 조개더미, 사천 삼천포 늑도 조개더미 · 방지리 조개더미, 창원 성산 조개더미, 진해 웅천 조개더미, 해남 군곡리 조개더미, 군산 남전, 강릉 초당동, 제주 곽지리유적 등이 있으며 해안이나 큰 도서 지역, 해안가 고지에 입지하는 경우가 많다. 이 시대에 조개더미가 다시 급증하는 현상과 고지성 조개더미의 등장에 대하여는 집단간 긴장 고조, 어로의 전문화, 교역의 발달, 제의 행위, 기후 및 해수면 변동 등에서 그 요인을 찾고 있다.
이 시대 조개더미는 주로 해안지역이나 도서지역에 입지하며 주변에 주거지 등 관련 유구가 배치되어 생활 거점의 역할을 한 정주적인 성격을 띤다. 또한 조개더미의 규모가 크고, 철기 · 뼈연모〔骨角器〕등 생업 · 생산과 관련된 유물과 유구, 점뼈〔卜骨〕 · 소형토기 등 제의 관련 유물과 중국 및 왜계의 외래계 유물을 다수 포함하는 특징이 있다. 이러한 외래계 유물로는 늑도, 방지리, 동외동유적 등에서 발견된 야요이〔彌生〕토기, 회현리와 군곡리유적의 화천(貨泉), 늑도유적, 성산유적에서 발견된 오수전(五銖錢)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중국과 일본에서 성행한 점뼈가 출토되는 점으로 미루어 당시 중국, 일본과의 교류와 주술행위가 행해졌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 시대 조개더미는 해로를 통한 주변 지역과의 교역활동의 거점 역할을 하였으며 조개더미지역에서는 조개류 채집, 어로 등의 생업활동 뿐만 아니라 뼈연모, 철기 제작 등의 생산 활동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조개더미는 일반적인 유적에서는 얻기 어려운 다양한 정보를 담고 있는 고고학적으로 중요한 생활유적이다. 조개더미를 구성하는 조개껍질은 탄산칼슘을 주성분으로 하기 때문에 조개더미를 알칼리성 환경으로 만들어주며 산성 토양에 의해 분해되기 쉬운 조개껍질 비롯한 다양한 동 · 식물성 음식물 쓰레기, 사람뼈 등 유기물로 된 자연유물과 뼈연모 등을 잘 보호해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연유물과 인공유물은 과거의 환경, 식생활, 유적 점유 양상, 생활상, 나아가 문화를 복원하는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