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회현리패총은 경상남도 김해시에 있는 원삼국시대~삼국시대의 패총이다. 사적 제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구(舊) 회현리패총과 봉황대유적 등을 묶어 김해봉황동유적으로 확대 지정되었다. 김해 지역 금관가야인들의 중심 거주 지역으로 왕궁터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며, 주위를 봉황토성이 둘러싸고 있다. 가야인들의 생활상을 보전하고 있는 타임캡슐이라 할 수 있다.
1907년 일본인 학자 이마니시 류〔今西龍〕에 의해 처음으로 발견되어 ‘김해패총’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이후 조선총독부가 1934년 고적2호로 지정하면서 ‘김해회현리패총(金海會峴里貝塚)’이라는 정식 이름을 붙였다. 광복 후 1961년에 사적2호로 지정되었으며, 2000년에는 인근의 봉황대유적을 묶어 ‘김해봉황동유적’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이마니시 류의 조사를 시작으로 하여 일제강점기에만 모두 8회에 걸친 조사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고적 조사 보고로서 정식 보고가 된 것은 2회에 불과하며, 나머지는 조사자의 회고록이나 발표문을 통해 단편적으로 알려져 왔다. 광복 후에는 1992년 부산대학교박물관에 의한 봉황대 언덕에 대한 조사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봉황동유적과 주변 일대에 대하여 70여 회의 시 ·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봉황토성을 비롯하여 다양한 생활 유적을 확인하는 성과를 거두었지만, 대부분의 조사가 도로 개설, 택지 개발에 따른 소규모 구제(救濟) 발굴이어서 종합적인 유적의 성격과 구조를 밝히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김해시에서는 가야 왕궁터의 복원과 정비를 목적으로 해당 지역의 토지를 지속적으로 사들이고 있으며, 최근에는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현, 국립가야문화유산연구소)에 의해 ‘가야 왕궁 및 고도 조사 연구’ 사업의 일환으로 연차적인 중장기 발굴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패총은 봉황대 언덕의 동남쪽 끝부분에 있는데, 높이 6m, 길이 동서 120m, 남북 30m 규모의 남부지방을 대표하는 원삼국시대 생활 유적이다. 일제강점기 조사에서는 중국 화폐 화천(貨泉)을 비롯하여 탄화미(炭化米), 다수의 타날문토기(打捺文土器) 등이 발견되었다. 고인돌, 돌널무덤, 독무덤 등도 발견되어 이 일대가 패총이 형성되기 전 청동기시대부터 지속적인 삶의 터전으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조사된 김해패총에 대해서는 유리건판을 비롯하여 당시의 각종 공문서, 현재 일본에 있는 자료까지 모두 포함된 보고서가 최근 간행되어 전체의 모습과 내용이 드러나게 되었다.
부산대학교박물관이 조사한 구(舊) 봉황대유적은 봉황대 언덕 자체의 유적 존재 여부를 파악하기 위한 시굴 조사(1차)와 봉황대 진입로 개설 구간 조성에 따른 구제 발굴 조사(2차)이다. 시굴 조사에서는 패총, 주거지, 도랑 등이 조사되었으며, 유적의 형성 시기는 2~6세기로 추정된다. 유물은 화로형토기(火爐形土器) 긴몸통항아리, 시루, 고배(高杯), 짧은목항아리, 그릇 받침, 작은 칼, 골각기(骨角器) 등이 출토되었다. 발굴 조사에서는 단면 U자형 도랑의 일부분이 확인된 것이 주목되며, 출토 유물은 시굴 조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금관가야 왕궁터로 추정되는 봉황동 일대의 시굴 조사를 통해 봉황동유적의 분포 범위가 봉황대 언덕을 중심으로 하여 주변 일대 전역에 이른다는 점이 명확해졌으며, 구 회현리패총을 비롯하여 북쪽으로는 김해 대성동 고분군(金海大成洞古墳群)까지도 연결된다. 또한, 봉황대 진입로 구간과 현재의 가야 궁허비(宮墟碑)가 세워져 있는 지역 일대가 금관가야의 중심 주거 지역인 것으로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
2000년대 이후의 조사에서는 소방도로 개설 구간이나 택지 조성에 따른 구제 발굴에 의해 봉황토성의 일부가 드러난 점이 큰 성과이다. 저습지의 펄층을 정리하여 바닥으로 사용하였으며, 토성의 외벽에는 계단식으로 돌을 쌓았다. 또한, 내부에서 확인된 기둥 열, 흙주머니와 판축(板築) 등의 흔적이 발견되어, 성을 쌓는 데 다양한 축성 기술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다양한 구제 발굴 조사를 통해 봉황동 일대 곳곳에서 삼국시대 문화층(文化層)이 확인되었는데, 지상식 · 수혈식 주거지를 비롯하여 땅 위에 기둥을 세우고 그 기둥 위에 바닥을 만든 고상건물(高床建物), 경작유구(耕作遺構), 수혈 등 다양한 유구들이 조사되었다. 유적마다 중심 시기는 다르지만, 2~6세기를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에서는 그동안 금관가야 왕궁터로 추정되어 오던 곳을 2015년부터 발굴 조사를 해 오고 있는데, 청동기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기의 문화층이 확인되었다. 청동기시대~원삼국시대의 문화층은 대체로 봉황대 언덕에서 동쪽 평평한 지대로 이어지는 지점을 중심으로 분포하며, 4세기 이후의 문화층은 유적 전역에 분포한다. 범람 등으로 인해 부분적으로 유실되기도 하였으나 대체로 문화층의 퇴적은 두껍게 나타난다.
김해회현리패총에서 출토된 유물 중 가장 주목을 받아 온 것은 두드림 기법으로 만들어진 회청색 토기와 적갈색 토기이다. 처음에는 원삼국시대를 대표하는 김해식 토기로 불리었지만, 회청색 토기는 삼국시대의 도질토기(陶質土器)와 차이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고, 제작 기법과 소성(燒成)이 전혀 다른 한 무리의 원삼국시대 토기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 토기는 와질토기(瓦質土器)로 명명되었다.
즉 김해회현리패총에서는 적색연질토기(赤色軟質土器), 와질토기, 도질토기가 모두 출토되어, 원삼국시대~삼국시대 김해 지역의 토기 문화상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이 과정에서 계통, 제작 기법, 용어 등을 둘러싸고 연구자 간의 많은 논쟁이 있었기 때문에 당해 시기 토기 변천과 그 연구에 있어 학사적으로도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
1934년 김해회현리패총에서 발견된 옹관(甕棺)은 일본의 야요이시대〔弥生時代〕 전기 말~중기 초의 옹관이다. 옹관의 형식학적 편년이 발달한 일본에서는 김해회현리패총을 표식으로 하여 김해식 옹관을 설정하였고, 일본 고고학에서는 긴카이시키〔金海式〕 옹관으로 부르고 있다. 옹관에서는 한국식 청동기 문화를 대표하는 동검(銅劍)과 동사(銅鉈)가 출토되어 한일 병행 관계를 설정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특히 1920년 조사에서 출토된 중국 화폐 화천(貨泉)은 신(新)나라 시기인 8~23년 때 발행된 왕망전(王莽錢) 중 하나로 주조 연대가 명확하고 통용 기간이 짧아 연대 추정에 결정적 단서가 되는 중요한 유물이다. 김해회현리패총 출토 화천은 불에 그을리고 도끼 등으로 찍어 깨뜨리려는 행위가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는데, 항해의 안전 등을 기원하는 의례 중에 폐기되는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구(舊) 회현리패총을 포함한 봉황동유적은 김해 지역 금관가야인들의 중심 거주 지역이었고, 왕궁터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며, 주위를 봉황토성이 둘러싸고 있다. 가야인들의 생활상을 오롯이 보전하고 있는 타임캡슐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