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봉황동 유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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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봉황동 유적 전경
김해 봉황동 유적 전경
선사문화
유적
문화재
경상남도 김해시에 있는 청동기시대 이후 집터와 고인돌 · 건물터 관련 생활유적.
이칭
이칭
김해봉황대유적(金海鳳凰臺遺蹟), 봉황대유적
국가지정문화재
지정 명칭
김해 봉황동 유적(金海 鳳凰洞 遺蹟)
지정기관
국가유산청
종목
국가유산청 사적(1963년 01월 21일 지정)
소재지
경남 김해시 봉황동 253번지 외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김해 봉황동 유적은 경상남도 김해시에 있는 청동기시대부터 삼국시대 사이에 형성된 집터·고인돌·건물터 관련 생활 유적이다. ‘김해 회현리조개더미’로 알려진 이 유적은 봉황대가 있는 구릉과 주변 지역으로 봉황대유적이라고도 한다. 청동기시대 유적으로는 고인돌과 돌널무덤이 있으며 삼한시대 유적으로는 조개더미와, 집자리, 환호 등이 나왔다. 출토유물은 토기, 숫돌, 나무빗, 철 찌꺼기 등이 있다. 발굴조사 결과 삼국시대부터 대규모 취락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유적은 금관가야 읍락의 중심지로 추정되고 있다.

목차
정의
경상남도 김해시에 있는 청동기시대 이후 집터와 고인돌 · 건물터 관련 생활유적.
개설

봉황대가 있는 독립구릉과 주변 지역 일대의 유적은 1907∼1935년 일본인 이마니시〔今西龍〕, 우메하라〔梅原末治〕, 하마다〔濱田耕作〕 등에 의해 수차례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김해 회현리조개더미’로 널리 알려졌다.

그 뒤 1991년 부산대학교박물관에 의해 사적지정구역을 제외한 봉황대 구릉의 전체에 대한 시굴조사와 1992년 봉황대 진입로 개설구간 100여 평, 그리고 2000년 봉황동 406번지 일원 등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유적의 전체 성격이 어느 정도 밝혀졌다. 2002∼2004년 경남발전연구원, 2003년 경남고고학연구소, 2004년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현, 국립가야문화유산연구소)에 의해 봉황대 주변유적이 발굴조사되었다.

주변유적 조사에서는 조선시대 구덩〔竪穴〕을 비롯해서 석열유구, 삼국시대 주거지, 주혈, 호안 시설, 굴립주 건물지, 경작지, 토기가마, 토성 등의 유구가 확인되어 봉황대를 비롯한 주변 일대에 청동기시대에서 삼국시대 사이에 형성된 생활유구가 분포하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부산대학교박물관에서 조사한 내용에 의하면 유적은 봉황대 구릉 정상부에 환호(環濠)와 집자리가 있고 그 아래 경사면에 조개더미〔貝塚〕가 형성되어 있으며 구릉 아래 평지에도 환호와 집자리가 밀집 분포하고 있다. 현재 주택지가 조성되어 있는 평지에는 지표의 3∼4m 아래에 삼한시대 집자리가 잘 남아 있다.

내용

청동기시대에 해당하는 것은 고인돌〔支石墓〕과 돌널무덤〔石棺墓〕이고 삼한시대의 것은 조개더미와 집자리, 환호이다. 삼한시대 문화층에서는 점토대토기(粘土帶土器)와 민무늬토기〔無文土器〕가 출토되어 한국식동검〔細形銅劍〕과 동사(銅鉈)가 출토된 독널무덤〔甕棺墓〕과 시기적으로 일치하고 있다.

문화층의 주류를 이루는 것은 3∼6세기대의 삼한 후기와 삼국시대 유구와 유물이다. 진입로 개설구역의 집자리 유적은 크게 두 시기로 구분되는데 하층에서는 환호와 3∼4세기의 집자리, 부속시설〔竪穴〕, 기둥구멍 등이 확인되고 상층에서는 5∼6세기대의 집자리와 부속시설, 기둥구멍 등이 확인된다. 상층과 하층사이에는 바다모래층이 두텁게 쌓여 있는 것으로 보아, 바닷물의 침범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하층의 환호는 너비 2.5m, 깊이 1.5m의 단면 V자형이다. 내부에서 덧띠토기, 굽다리토기, 흑색마연토기(黑色磨硏土器) 등이 출토되었다. 상부에 3세기대 제46호 집자리가 설치되어 3세기 이전에 그 기능이 상실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집자리는 제46호가 가장 잘 남아 있었으며 길이 8.8m의 방형으로 추정된다. 이 집자리는 주위에 너비 1m의 도랑을 파고, 바닥에는 흑색 · 황색 · 적색의 고운 흙을 다져 깔아 습기를 방지하였다.

그 밖에 제24 · 25 · 37 · 51호의 대형 집자리도 같은 구조이며 소형 집자리는 길이 3.6m, 너비 2.4m의 타원형으로 바닥시설과 주구(周溝)는 없다. 그리고 집자리의 부속시설로 추정되는 길이 2∼3m의 타원형, 원형, 방형의 구덩이가 있다. 형태상 집자리와 비슷하지만 주거공간으로 이용하기에는 협소해 창고나 작업공간으로 추정된다.

상층에는 대형 집자리는 없고 평면 타원형의 길이 3∼5m인 소형 집자리가 있다. 지붕은 통나무 서까래에 대나무와 갈대를 엮어 만든 초가집이다. 벽체는 지름 3㎝의 나무에 갈대를 끈으로 엮고, 볏집을 썰어 섞은 흙을 발라 만들었다. 집자리 외에 부속시설과 기둥구멍 등은 하층과 동일하다. 제2호 집자리에서는 송풍관과 철 찌꺼기가 확인되었다. 철 찌꺼기는 성분분석 결과, 단야(鍛冶)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서 철의 단야도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출토유물은 토기가 대부분이며, 그 밖에 숫돌, 뼈연모〔骨角器〕, 손칼〔刀子〕, 나무빗, 철 찌꺼기, 동물뼈 등이 있다. 상층에서 출토된 토기로는 연질의 옹(甕)과 발(鉢), 통형기대(筒形器臺), 단경호(短頸壺), 시루와 경질의 고배(高杯) 등이 있다. 연질토기가 가장 많고, 특히 통형기대가 다수 출토되는 점이 주목된다.

하층에서는 연질토기가 대부분이지만 경질과 와질토기도 출토되었다. 기종 구성은 상층과 유사하지만, 상층에 없는 소형기대(小型器臺)와 화로모양토기〔爐形土器〕등도 출토되었다. 뼈연모는 사슴뿔로 만든 손칼자루〔刀子柄〕와 화살촉이 많고, 장신구, 송곳, 점뼈〔卜骨〕등이 1∼2점씩 출토되었다.

의의와 평가

봉황동 유적은 이제까지의 발굴조사 결과, 청동기시대에는 고인돌과 돌널무덤이 일부 조성되었으나, 삼한시대부터 대규모 취락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인근에서 호안석, 접안시설, 수상가옥지, 토루(土壘) 등이 최근 조사되어 이 유적은 금관가야 읍락의 중심지로 추정되며 인접한 대성동 고분군과 함께 당시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참고문헌

『김해봉황동저습지유적』(부산대학교박물관, 2007)
『김해봉황동380-176-2,16번지』(대성동고분박물관, 2007)
『김해봉황동442-7번지』(부산대학교박물관, 2006)
『전금관가야궁허지』(부산대학교박물관, 2006)
『김해가야인생활체험촌조성부지내유적』(경남발전연구원, 2006)
『김해봉황동380-24번지유적』(경남발전연구원, 2005)
『김해봉황동단독주택부지시굴조사보고서』(창원문화재연구소, 2005)
『봉황토성』(경남고고학연구소, 2005)
『김해회현동소방도로구간내유적』(경남발전연구원, 2004)
『김해회현리패총』(부산대학교박물관, 2003)
『김해봉황동409-7번지유적』(경남발전연구원, 2001)
『김해 봉황대유적』(부산대학교박물관, 1998)
『金海貝塚發掘調査報告』(朝鮮總督府, 1923)
집필자
심봉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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