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 송현동 고분군 ( )

목차
관련 정보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 송현동 고분군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 송현동 고분군
고대사
유적
문화재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에 있는 삼국시대 가야의 앞트기식돌방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이칭
이칭
송현동고분군, 창녕송현리고분군
국가지정문화재
지정 명칭
창녕송현동고분군(昌寧松峴洞古墳群)
지정기관
국가유산청
종목
국가유산청 사적(1963년 01월 21일 지정)
소재지
경남 창녕군 창녕읍 송현리 20-1번지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목차
정의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에 있는 삼국시대 가야의 앞트기식돌방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개설

창녕 송현동고분군은 북서쪽으로 인접한 교동고분군과 함께 목마산(牧馬山) 남쪽 기슭에 직경 20m 이상의 대형고분을 비롯해서 중 · 소형 고분 30여 기가 분포하고 있다. 1963년 1월 21일에 사적으로 지정되었다가 2011년 7월 28일에 지정 해제되고 사적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으로 재지정되었다. 면적은 216,360㎡이다.

이 고분군은 1917년 일본인 학자 이마니시〔今西龍〕에 의해 처음으로 수십여 기가 분포하는 것이 보고되었다. 본격적인 조사는 2001년 경남문화재연구소에 의해 지표조사가 실시되어 21기의 고분이 분포하고 있는 것이 확인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확인된 고분 가운데 제2∼7호분에 대해서는 정비복원을 위한 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그 과정에서 제6·7호분은 유구의 중요성이 인정되어 학술적인 정밀발굴조사로 전환되었고 조사도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현, 국립가야문화유산연구소)가 담당하게 되었다. 발굴조사는 2004년 4월 20일부터 2006년 3월 24일까지 3차에 걸쳐서 330일간 실시되었다.

내용

송현동고분군 제6·7호분은 남북으로 연접한 표형분(瓢形墳)으로서 남쪽의 제6호분이 북쪽의 제7호분보다 먼저 축조되었다.

그중 제6호분은 원모양에 가까운 상태로 외형이 잔존하고 있었는데 구획 성토한 봉토는 높이 8.5m, 직경 22m의 원분이었다. 경사면을 반지하식으로 굴착해서 축조한 돌방〔石室〕은 북쪽에 입구를 둔 앞트기식〔橫口式〕으로 길이 8.5m, 폭 1.4∼1.6m, 높이 2.2∼2.6m, 장축 N-13°C-W의 규모였다. 앞트기부〔橫口部〕북쪽 단벽을 제외한 나머지 세 벽을 깬돌〔割石〕으로 상부가 내경하도록 쌓고 그 위에 8매의 장대석을 걸쳐 평천장을 이루었다. 바닥에는 널〔木棺〕을 안치했던 깬돌으로 축조한 널받침〔棺臺〕이 있고 내벽 곳곳에 점토 또는 벽석 위에 산화제이철과 망강을 혼합해서 만든 흑갈색 안료가 도장되어 있었다.

유물은 중간의 널받침을 중심으로 그 양단에는 짧은목항아리〔短頸壺〕, 긴목항아리〔長頸壺〕, 뚜껑굽다리접시〔有蓋高杯〕, 적갈색토기 등이 놓여 있었고 널받침에는 칠기류와 철제 농 · 공구류, 말갖춤〔馬具〕류 등이 있었다.

북쪽에 있는 제7호분은 경작지 개간으로 인하여 봉토 상부가 깎여나가 잔존 높이 5.6m, 직경 20m의 장타원형 원분으로 남아 있는데, 봉토는 역시 구획 성토되었다. 경사면을 절개해서 묘역을 정지하고 돌방을 배치한 후 밀봉하고 봉토를 완성하는 순서는 전자와 동일하였다. 돌방은 북쪽에 입구를 둔 앞트기식으로 길이 8.4m, 폭 1.8m, 높이 2.3∼2.6m 규모이며 앞트기부가 있는 북쪽 단벽을 제외한 나머지 세 벽을 깬돌으로 상부가 내경하도록 먼저 쌓았다. 그리고 그 위에 9매의 장대석을 걸쳐 평천장을 이루도록 하고 바닥에는 녹나무〔樟腦木〕로 만든 원통모양널〔圓筒形木棺〕을 안치한 널받침이 중앙에 있었다. 이 널받침과 앞트기부 사이의 공간 바닥에는 각재 12매를 깔아두었고 앞트기부 바깥에는 길이 2.4m 무덤길이 있었다.

유물은 중간의 널받침을 중심으로 양단벽 아래 공간부와 널 그리고 널 동서 양쪽에서 확인되었다. 초본류 또는 초본류를 가공한 유기물질로 깔거나 덮어 중첩되게 또는 소쿠리와 같은 용기에 담아서 부장하였다. 그중 널은 길이 3.3m, 너비 80∼90㎝의 세장방형으로 단면은 초승달과 같은 형태이며 두께는 9㎝ 정도이다. 널을 포함해서 토기류, 금속류, 목제류 등 모두 600여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남벽 아래 공간에서는 주로 긴목항아리〔長頸壺〕, 연질유개발(軟質有蓋鉢), 뚜껑굽다리접시〔有蓋高杯〕, 뚜껑접시〔蓋杯〕, 굽다리접시〔高杯〕세트 등의 토기류와 쇠도끼〔鐵斧〕, 쇠손칼〔鐵刀子〕, 목제 절판세트, 국자모양칠기, 봉상칠기 등이 놓여 있고 뚜껑접시 안에서는 복숭아 · 참외씨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널 동쪽에서는 봉상칠기, 컵모양목기, 큰입작은항아리〔廣口小壺〕, 화살, 짧은목항아리 등이 놓여 있었고 서쪽에서는 말갖춤류와 무기류, 봉상칠기, 부채손잡이와 순장(殉葬)한 20대 여성의 치아가 발견되었다. 또한 앞트기부 아래 공간에서는 둥근바닥짧은목항아리〔圓底短頸壺〕, 굽다리긴목항아리〔臺附長頸壺〕, 참다랑어 뼈가 담긴 뚜껑굽다리접시〔有蓋高杯〕, 금제가는고리귀걸이〔金製細環耳飾〕, 쇠도끼〔鐵斧〕, 각재, 사람뼈 등이 있었다. 그밖에도 봉토 조사과정에서 대형토기조각과 말〔馬〕치아 등 제사유물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2006∼2008년 사이에도 인접한 제15∼17호분이 조사되었다. 그 중에서 길이 8.56m, 폭 1.7m, 높이 2.25m 규모의 앞트기식돌방을 가진 제15호분에서 순장된 사람뼈 4구가 발견되어 양호한 1구를 복원하였다. 그 결과, 복원된 1구의 사람뼈는 16세 여성〔송현아이〕의 것으로 추정되는 등 송현동고분군에 대한 다양한 방면에서 심도 있는 연구가 진행 중에 있다.

의의와 평가

송현동고분군은 지금까지 소개된 고분의 구조와 축조기법 그리고 돌방 내부에서 출토된 유물의 특징을 참고하면, 5세기 중반에서 6세기 전반 사이에 축조된 창녕지역의 유력한 지배자의 무덤으로 판단된다. 이 고분군은 창녕지역과 신라와의 관계, 일본열도와의 교류관계를 해명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참고문헌

『창녕송현동15호분출토 순장인골복원연구』(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2010)
『창녕송현동고분군 6·7호분 발굴조사개보』(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 2006)
『창녕교동·송현동고분군 정밀지표조사보고서』(경남문화재연구원, 2004)
『창녕송현동고분군시굴조사 약보고서』(경남문화재연구원, 2001)
『朝鮮古蹟調査報告書』(朝鮮總督府, 1918)
집필자
심봉근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