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경상남도 양산 하북정 유적의 조선시대 후기 논과 1992년의 광주 신창동 유적의 삼한시대 밭, 경기도 하남 미사리 유적의 삼국시대 밭 등을 시작으로 한 경작유구 조사는 2011년 5월 현재, 밭은 58개 유적(청동기시대 12, 초기철기시대∼삼한시대 8, 삼국시대 21, 기타 36, 시대별 총 유적수는 78개소), 논은 42개 유적 (청동기시대 15, 초기철기시대∼삼한시대 2, 삼국시대 16, 기타 9, 시대별 총 유적수는 66개소) 이상이 조사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청동기시대 전기 말부터 논·밭이 확인되며, 이후 원삼국시대∼삼국시대에 이르면 밭은 북위 38°선까지, 논은 37°선까지 각각 확인되고 있다.
밭의 입지는 청동기시대부터 곡류하천의 활주사면부나 자연제방의 미고지에서 미저지에 걸쳐 만든 예가 많다. 특히 미저지에는 하천의 홍수범람 때문에 유기물 성분, 미사질(실트질) 성분이 쌓이는 곳이어서 자연비옥도를 의식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초기철기시대∼삼국시대로 오면서 구릉 사면부, 선상지 곡저평야(이하 곡)에도 밭이 만들어진다.
한편 산지·구릉지 입지의 청동기시대 유적에서는 타제의 굴지구(堀地具), 벌채용 돌도끼가 많이 출토되므로 화전(火田)농사가 있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오히려 자연적으로 유기물이 쌓이는 평지에 초기의 화전이 전개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밭의 명칭을 살펴보면, 6∼7세기에는 백전(白田), 전(畠)으로 표기되며, 전(畠)은 일본 고대의 밭 명칭〔畠, 陸田〕과 같은 점이 주목된다. 이후 합전(合田), 상전(桑田), 마전(麻田)처럼 재배작물 위주의 표현도 나타난다. 화전 관련 기록으로는 신라 문무왕대의 화종역경(火種力耕), 소목전(燒木田) 등이 있다.
밭의 종류를 보면, 이랑 고랑이 열을 이루어 반복조성된 것이 청동기시대 이래로 가장 일반적이다. 둑이나 도랑으로 구획하기도 하고, 그렇게 하지 않기도 하는데, 둑으로 구획한 것 가운데에는 이랑폭이 매우 넓어 육묘대(陸苗垈)처럼 보이는 것도 있다. 최근에는 도랑으로 둘레를 구획한 내부면에서 이랑 고랑 흔적이 있는 밭도 확인되고 있다. 이외에 작물을 심은 흔적인 작은 구멍〔小穴〕이 무리를 이루는 것도 있으며, 조선시대의 만전(縵田)처럼 이랑 고랑이 없는 것도 있다.
밭의 운용방식은 다양하였다. 논들이 있는 곳 일부에 밭을 조성하거나 논과 인접한 예도 확인되고 있다. 또 삼국시대 무렵부터 논과 밭을 전환 이용한 예도 최근 여럿 확인되고 있는데, 조선시대의 회환농법(回換農法)이나 일제강점기의 윤답(輪畓)처럼 주기적인 논·밭 반복형태로 보기도 하고, 아예 이모작(二毛作)의 증거로 보는 견해도 있다.
청동기시대 밭 가운데에는 이랑 고랑렬이 인접 하천의 흐름방향과 직교하게 만들어지다가 이후 홍수범람으로 매몰되고 나면 직교·평행 모두 만들어지는 예도 있다. 또 각각의 용도를 가진 이랑 고랑이 시간이 흐르면서 그 폭이나 비율이 달라지거나, 이랑의 폭이 넓어지기도 한다. 이를 휴한농법이 극복되어가는 단계, 하나의 밭에서 이랑 고랑의 폭을 바꾸는 농법으로 전환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또 이랑 고랑의 요철(凹凸)이 거의 없어진 밭을 휴경으로 보기도 한다. 청동기시대는 시비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단계이므로 지력 회복을 위해 일정기간 밭의 방치·휴경과 이동이 예상되나 잡초종자분석과 같은 자연과학적인 분석 결과가 뒷받침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밭은 홍수범람이나 바람에 날아온 모래로 덮이기도 하는데, 다시 갈아엎어 이전의 이랑 고랑을 바꾸어 복구한 예도 있다. 또 청동기시대 이래로 밭에서는 밭작물과 함께 벼(밭벼)가 재배되기도 하였고 콩류나 근채류 같은 것이 재배된 사례도 있어 재배형태도 다양했음이 짐작된다.
초기의 논은 곡(谷)이나 중·소 하천의 배후습지 등에 주로 만들어졌다. 특히 곡은 대규모의 치수가 필요 없고 하천범람의 피해가 적으며, 곡 안쪽에서 솟아나는 물은 양은 적지만 안정적이어서 논에 물대기가 쉬운 이점이 있다. 또 곡내가 습지화하면 논을 만들기도 쉽다. 청동기시대∼삼국·통일신라시대 논토양의 색조가 어둡고 점성이 강한 것도 이 때문인데 자연비옥도 의존형임을 알 수 있다.
이후 논은 점차 대하천의 범람원이나 해안평야, 단구면, 구릉 사면부에도 조성된다. 고려∼조선시대의 논토양이 색조가 밝고 모래성분이 많은 것은 당시의 사회경제적 요구 때문이다. 즉, 논 조성에 적합치 않은 하천 퇴적물이 쌓인 곳까지도 논을 조성했는데, 논을 만든 이후에는 논토양 내의 철·망간 같은 성분이 아래층으로 빠져나가서 논토양의 색깔이 밝아졌던 것이다.
논과 벼의 명칭으로는 문헌기록상 3세기에는 벼가 표현된 도전(稻田)으로 나타나다가 6∼7세기 무렵에는 수전(水田)이라는 토지위주의 표현이나, 답(畓)이라는 고유문자로 바뀐다. 8∼9세기 무렵 이후부터는 답으로 통용되어감과 동시에 저답(渚畓), 오답(奧畓)처럼 논의 상태나 위치에 따른 표현도 등장한다. 벼 품종으로는 통일신라시대에 처음으로 만생종이 보이며, 고려시대로 오면서는 만생종과 조생종의 분화가 정착하고 있다. 동일품종의 연작에 따른 감수 회피, 노동력의 분산, 각종 재해로부터의 회피를 꾀한 것으로 보인다.
논의 종류는 평면형태에 따라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하나는 소위 계단식 논으로 현재의 다락논과 같다. 등고선에 평행하면서 비교적 정연하게 조성되었으며, 후대로 올수록 논 하나의 면적이 넓어지는 경향이 있다. 다만 쟁기, 써레를 사용하는 축력경(畜力耕)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또 하나는 논둑을 가진 소위 소구획의 부정형논으로, 역시 경사 여부에 따라 논 면적이 달라지는 경향이 있다. 이외에 중간 형태와 같은 것도 존재하여, 논 형태를 세분하거나 별도의 종류로 구분하는 견해도 있다.
일본에서는 이랑 고랑을 가진 논도 확인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일제강점기 북한 지역의 해안평야에 그러한 사례가 있다. 또 논둑이 아예 없는 논이 존재할 수도 있다. 하천의 자연제방에 의해 폐쇄된 곡내의 저습지처럼 사람 허리까지 빠지는 배수 불량의 논에는 논둑없이 막대기를 꽂아 경계를 표시하는 사례도 있기 때문이다.
논을 사용한 흔적으로 논면에서는 작물을 심은 흔적, 사람이나 소의 발자국 흔적, 사용 농기구의 흔적 등이 확인된다. 특히 작물을 심은 흔적과 사람의 발자국 흔적을 통해 모내기를 했는지 직파재배인지의 여부, 작업에 참가한 인원수와 작업방식을 추정하기도 한다. 또한 사용된 농기구의 흔적을 통해 축력 농기구인지 인력 농기구인지, 인력 농기구라도 가래〔삽〕인지 화가래〔괭이〕인지 여부, 농기구의 사용 각도와 사용자의 모습을 추정하기도 한다. 이미 삼국시대의 논에서는 쟁기흔적과 써레 추정 흔적, 사람과 소의 발자국이 함께 확인되기도 하였고, 많은 소 발자국 흔적이 무질서하게 찍힌 휴경상태의 논이 가축방목지로 추정되는 사례도 있다.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 논·밭은 모두 중국에서 기원한 것으로 추정되나, 이미 발달된 단계의 논·밭농사가 전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초기의 논·밭농사는 곡이나 하천변에 퇴적되어 있는 유기물을 이용하는 방식이 많았으며, 논은 대부분 수확량이 낮은 습답∼반습답이었다. 게다가 밭의 연작에 따른 지력 소모와 논의 노후화현상 때문에 일정기간 경작한 뒤 방치 혹은 휴경하고 다른 곳으로 이동해 경작하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아마도 지역의 생태계에 기초해 초기 논·밭의 조성과 운용방식, 재배형태는 다양하였으며, 수확량 측면에서 시대·지역적 격차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다양성과 격차를 가진 논농사가 일본 북부 규슈[九州] 지방에 전파되었다.
한편 고고학 분야에서는 논·밭농사의 생산력이 청동기시대 문화의 물질적 기초가 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또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우리나라는 청동기시대 이래로 밭농사가 주체이면서 동시에 밭·논농사의 혼합경영 형태가 이어져온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