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때 조사된 유적으로 알려져 있으나, 현재는 택지 개발과 도시화로 인해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으며 정확한 위치도 알기 어렵다. 1929년 3월 13일부터 4월 4일까지 조선총독부박물관의 후지다 료사쿠〔藤田亮策〕 등에 의해 처음으로 공식적인 발굴 조사가 행해졌다. 조사된 내용은 분명하지 않지만, 남겨진 유리건판 사진을 참고로 하면 옹관(甕棺)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토기들과 골각기, 조개껍데기 등이 출토되었다.
이 조사에 대한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는데, 1929년 당시 출토 유물 대장에는 수안동패총으로 되어 있고, 1930년의 조사 보고문에는 낙민동패총이라고 되어 있는 점이 참고가 된다.
방치되어 있던 유적이 다시 주목받게 된 것은 1967년부터 1970년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 의해 실시된 네 차례의 발굴 조사에 의해서이다. 철 생산 유구를 비롯하여 여러 종류의 토기들과 골각기, 조개껍데기 및 동물유존체 등 다양한 유물이 확인되어 당시 생활상을 복원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확보되었다.
지금까지 조사된 성과에 의하면 3~4세기가 중심 시기로 판단되지만, 전후에 해당하는 유물들도 출토되고 있다. 1970년에 조사 구간을 포함한 낙민동 100-3번지 일대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이후 사적의 범위가 축소되는 등의 부침이 있었지만, 지속적으로 사적 주변을 매입해 나가고 있다.
현재에도 사적 일대의 잦은 시설 공사에 따른 간헐적인 시 · 발굴 조사가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는데, 그 결과들로 미루어 보아 현재의 택지 아래에 매우 넓은 범위로 유적이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2019년 부산광역시 동래구에서 실시한 동래패총의 종합 정비계획 수립 보고서에 의하면, 부산수안동패총(釜山壽安洞貝塚)은 현재의 사적 범위에서 북동쪽으로 약간 떨어진 구 동래역사로 추정된다. 1929년의 발굴 조사 위치로 추정되는 곳이다. 부산수안동패총은 현재의 사적 범위보다 훨씬 넓었을 동래패총과 인근의 부산복천동고분군 집단의 생활 터전 일부에 해당하는 유적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