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탑리에는 신라시대의 오층전탑(五層塼塔)과 석불(石佛)이 전하고 있는데, 이 부근 야산의 중턱 여기저기에 수십 기의 고분이 분포되어 있다.
그 중 비봉산(飛鳳山 : 빌배봉)의 한 줄기가 송리 2동을 향해 동쪽으로 뻗어 내려가는 능선상에 위치한 대형고분이 1963년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에 의해 발굴 조사되었다.
이 고분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내리는 산줄기를 따라 축조되었다. 봉토(封土)는 동서 지름 21m, 남북 지름 10m인 타원형이며 서쪽이 얕고 동쪽이 높은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봉토는 자갈이 섞인 흙과 편암(片岩)으로 이루어졌다.
봉토 안의 동서 양쪽에는 장축이 남북이고 평면 높이가 서로 다른 2개의 대형 장방형 돌덧널[石槨]이 있으며, 동쪽 돌덧널의 서북 1.5m 지점에는 딸린 덧널[副槨]이 달려 있다. 또한 이 봉토의 서쪽에서는 또 하나의 봉토가 있었던 흔적이 발견되어 그 속에서 작은 돌덧널과 독널[甕棺]이 조사되었다.
대형고분 안에 동서로 5.3m 가량 떨어져 축조되어 있는 동서 돌덧널의 벽은 모두 깬돌[割石]을 가지런히 쌓아 동서벽은 안쪽으로 기울도록 하였으며 북벽은 수직으로 쌓아올렸다. 남벽은 돌덧널의 입구로 매장이 끝난 뒤 밖에서 쌓아 막은 앞트기식[橫口式]이기 때문에 벽면은 불규칙한 상태로 되어 있었다.
돌덧널의 바닥 안쪽에는 따로 돌을 쌓아 시상(屍床)을 만들어 시체를 안치시켰다. 동쪽 돌덧널에는 6구, 서쪽 돌덧널에는 5구가 들어 있어 가족묘로 추측된다. 돌덧널 위에는 각각 10매 내외의 넓은 판돌을 뚜껑돌로 덮었으며, 그 위를 다시 깬돌로 덮었다.
딸린 덧널과 작은 돌덧널도 으뜸덧널과 마찬가지로 깬돌을 쌓아올린 구조였다. 독널은 2개의 깊은 바리형 항아리를 이어 맞춘 이음식[合口式]이었다.
돌덧널은 조사 당시 이미 도굴당한 상태였지만 그 밖의 무덤칸에서도 출토유물은 많지 않았다. 동쪽 돌덧널에서는 철제 꾸미개와 이기(利器), 딸린 덧널에서는 각종 항아리와 굽다리접시 등 토기가 출토되었다.
한편, 서쪽 돌덧널에서는 금제 귀걸이 등 꾸미개와 철제 이기가, 서쪽의 작은 돌덧널에서는 항아리가 출토되었다. 이 고분의 토기들은 대체로 신라계의 양식을 보여주면서도 굽다리접시 등의 굽모양이나 굽구멍의 형식에서는 오히려 가야계에 가까운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고분의 축조시기는 으뜸돌덧널이 앞트기식으로 축조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로 비정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