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금세공(細金細工)·입금세공(粒金細工)·필리그리(Filigree)라고도 부른다. 그 접착 방법은 백랍(白蠟)·붕사(硼砂)·불꽃 등을 이용하였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으나 현존 유물의 상태로 보아 불확실하다.
우리 나라에서는 평양 석암리(石巖里) 9호 낙랑무덤 출토의 띠고리장식[鉸具裝飾]에서 처음 나타난다. 크고 작은 7마리의 용을 돋을새김한 금판을 바탕으로, 금실로 금판 가에 테두리를 돌리고 내부에 금실과 금알갱이로 용의 모습을 꾸몄으며, 곳곳에 청색의 비취를 박아 넣었다.
누금세공은 특히 신라에서 크게 성행하였는데 귀고리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었고, 반지·팔찌·드리개[垂飾]·구슬·곱은옥[曲玉]의 금모(金帽) 등 장신구와 칼자루장식·말띠드리개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귀고리에서는 달개[瓔珞]·드리개장식의 가장자리를 꾸미는데 많이 쓰이나, 경주 보문동 부부총(夫婦塚) 출토의 귀고리는 굵은고리[太環] 표면에 금알갱이로 거북등과 꽃잎무늬를 세밀하게 장식하였다.
백제의 예로는 공주 무령왕릉 출토의 곱은옥의 금모에 나타난 것이 가장 섬세하고 대표적인 것이나 양적인 면에서 신라에 미치지 못하고, 가야의 경우에도 일부 귀고리에 나타나는 정도이다.
고구려에서는 현재까지 출토된 예가 없다. 누금세공의 기법은 원래 이집트의 12왕조 때에 출현하여 메소포타미아·그리스 등지에서 성행한 것으로 중국에서는 한대(漢代)에 나타난다.
우리 나라에는 한나라의 영향으로 낙랑을 통해 들어왔다는 견해도 있으나, 중국의 중원(中原)에서는 누금세공 유물의 출토 예가 많지 않고 평양 석암리9호분의 띠고리장식 자체가 북방계 문물이고 신라의 금관·보검·뿔잔·굽다리접시 등도 서역적·북방적 성격의 유물인 것으로 보아, 중앙아시아를 통한 북방 유목문화의 영향으로 받아들여졌을 가능성이 더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