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천군 ()

대동여지도 중 함경남도 단천 부분
대동여지도 중 함경남도 단천 부분
인문지리
지명
함경남도의 동단부에 있는 군.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함경남도의 동단부에 있는 군.
개관

동쪽은 함경북도 학성군, 서쪽은 풍산군·북청군, 남쪽은 동해, 북쪽은 갑산군, 함경북도 길주군과 각각 경계를 이루고 있다.

동경 128°27′∼129°04′, 북위 40°21′∼41°12′에 위치하며, 면적 2,385.71㎢, 인구 18만 8575명(1945년 현재)이다. 1개 읍 8개 면 122개 이로 되어 있으며, 군청 소재지는 단천읍 서상리이다.

자연환경

북부의 함경산맥으로부터 세 지맥이 군내로 뻗어 있다. 첫째는 마천령산맥으로 안반덕산(安班德山, 1,830m)·덕만산(德滿山, 1,506m)·용연산(龍淵山, 1,597m) 등이 솟아 함경북도와 경계를 이룬다.

둘째는 두류산맥으로 군의 중앙부로 뻗어 내려 복개봉(覆蓋峰, 1,565m) 등이 솟아 있다. 셋째는 남서쪽의 북청군·이원군과의 경계에 있는 마운령산맥으로 검덕산(劍德山, 2,150m)·만탑산(萬塔山, 2,003m)·관암산(冠巖山, 1,490m)·취덕산(鷲德山, 1,001m)등이 솟아 있으며, 이 밖에도 운주산(雲住山, 422m)·오봉산(五峰山, 1,200m) 등이 솟아 있다.

마천령산맥과 마운령산맥 사이에는 북대천(北大川)이 흐르고, 두류산맥과 마운령산맥의 사이에는 남대천(南大川)과 복대천(福大川)이 각각 흐른다. 이들 강 유역에는 비교적 넓고 기름진 평지가 전개된다.

해안선은 짧고 단조로우나 여해진 앞바다에 괘도(掛島)가 있어 연해 항로의 기항지가 된다. 단천군과 이원군으로 넘어가는 마운령등정 어귀에는 용연지(龍淵池)가 있다.

이 군은 비교적 높은 곳에 위치하여 있으나 북서쪽의 함경산맥이 몽고방면에서 불어오는 북서 계절풍을 막아 주고, 또 동해의 해류 영향으로 인하여 같은 위도 상의 서해안 지방보다는 기온이 높은 편이다.

연평균 기온 9.3℃, 1월 평균 기온 -4.8℃, 8월 평균 기온 23.2℃이며, 연 강수량은 665㎜이다. 첫얼음이 대개 11월 2일경 얼기 시작하여 다음해 4월 9일경이면 녹는다.

역사

[고 대]

구석기·신석기 시대는 물론, 청동기 시대의 유적과 유물도 발견되지 않았으나, 이웃의 북청군 강상리 신석기 문화 포함층에서 석기·토기 등이 발굴되고, 또 북청군 중리·토성리·강상리에서 청동기 시대의 주거지·토기 등이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신석기 시대부터는 사람이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

이 군이 처음 역사 무대에 등장하는 것은 옥저 시대부터이다. 옥저(沃沮)는 서기 1세기경 대체로 지금의 함경도에 위치하고 있던 연맹 왕국으로서, 함경북도를 북옥저, 함경남도를 남옥저(또는 동옥저)라고 칭하였으므로 단천군은 남옥저에 속하여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옥저는 뒤에 태조왕 때 고구려에 예속되었으므로 고구려의 군현이 설치되었겠지만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244년(동천왕 18) 왕이 북위 현도군 태수 왕기(王頎)에게 쫓겨 동황성(東黃城 : 지금의 강계)을 거쳐 황초령(黃草嶺)을 넘어 동옥저의 매구(買溝)까지 피난하였으며, 뒤에 북옥저를 거쳐 귀국하였으므로 이 지방은 한때 전란에 휩싸였을 가능성이 짙다.

삼국이 정립하고 있을 때 신라가 한강 유역을 점령하고 북경 개척에 힘써 그 세력이 함경남도까지 미쳤으나, 마운령 너머 이원군 북쪽에 있는 단천군에는 그 세력이 미치지 못하였을 것이다.

699년에 건국한 발해는 남쪽으로 평안도와 함경도 대부분을 차지하여 지금의 영흥 부근에서 신라와 접경하고 있었고, 당시 단천군은 발해에 편입되어 남경남해부(南京南海府)에 속하여 있었다.

발해 때 남경(지금의 북청군) 부근에 내려와서 살고 있던 여진족(女眞族)이 차차 남하하여 영흥·안변까지 내려와 변경을 노략질하는 일이 많았다.

[고 려]

태조는 개국 후 곧 동북경 방면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920년(태조 3) 유금필(庾黔弼)을 골암성(鶻巖城)에 파견하여 북번(北蕃)을 회유 혹은 토벌함으로써 안변·영흥 방면이 다시 고려 영토에 편입되었다.

그리고 969년(광종 20) 장평진(長平鎭)에, 4년 뒤 화주(和州), 장평과 박평(博平), 고주(高州)에 각각 성을 쌓아 영흥 방면의 방어를 굳건히 하였으나 단천까지는 세력이 미치지 못하였다.

덕종대에 들어와서는 요(遼)나라와 일시 국교가 단절되자, 거란(契丹)과 여진에 대한 항구적 방어책으로 이른바 천리장성을 축조하게 된다. 뒤에 여진의 완안부(完顔部) 세력이 대거 남하, 숙종 때 추장 우야소(烏雅束)가 함흥평야 일대의 여진 촌락을 공략함으로써 그 통속(統屬)을 둘러싸고 고려는 우야소와 정면으로 충돌하게 되었다.

처음 전세는 크게 불리하여 장성 밖의 여진 촌락을 모두 빼앗겼으나, 1107년(예종 2) 12월 윤관(尹瓘)이 기병 중심의 별무반(別武班)을 조직하여 17만 명의 대군을 동원, 수륙양면작전을 펴서 함흥평야를 탈환하고 점령지의 요충인 함주(함흥)를 비롯하여 9성(咸州·英州·雄州·吉州·福州·公險鎭·通泰鎭·崇寧鎭·眞陽鎭)을 축조하고 남방의 민호를 옮겨 살게 하였다.

9성은 길주와 공험진의 함락에 따른 전세의 불리와 우야소의 화평 제의로 2년 뒤에 반환함으로써 함흥 이북 땅이 다시 완안부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 9성 중의 복주가 오늘의 단천이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이 군은 본래 여진의 오림금촌(吳林金村)이라 하였고, 예종 2년 윤관이 여진을 축출하여 성을 쌓고 복주방어사를 두었다가 4년 성을 철거하고 그 땅을 여진에 돌려주었으며, 그 뒤 원나라가 점령하여 독로올(禿魯兀, 일명 豆乙外)이라 칭하더니, 공민왕이 수복하고 우왕 때 단주(端州)라고 고쳐 안무사를 두었다고 한다.

[조 선]

1398년(태조 7) 12월 정도전(鄭道傳)을 파견하여 동북경 방면의 주군을 획정할 때 지단주군사(知端州郡事)로 고치고, 1414년(태종 14) 10월 단천으로 고쳐 지군사(知郡事)를 두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따르면, 호수는 832호, 인구는 2,731인이고 간전(墾田)은 9,277결(結)이었고, 군사 체제는 지군사가 길주도좌익병마(吉州道左翼兵馬)를 겸하였고 익속군(翼屬軍) 320인, 수성군 24인이 있었다.

1467년(세조 13) 5월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이 군도 한때 반군의 손에 들어갔다. 난이 평정된 뒤 조정에서 이곳 출신 신원후(辛元厚)의 충성을 가상히 여겨 종2품 가선대부의 벼슬을 내렸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가토(加藤淸正)가 이끄는 군은 관북으로 침공하였다. 이해 6월 왜군이 관북에 쳐들어오자 병마사 한극함(韓克諴)은 마천령에서 패함으로써 단천·명천·길주·부령·경성 등이 삽시간에 함락되어 관북 지방이 모두 적군의 손에 들어가고 말았다.

이해 10월부터 함경도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정문부(鄭文孚)는 길주성을 포위 공격하고, 단천에서는 군수 강찬(姜燦)의 휘하에 많은 의병이 모여들어 단천성의 왜군을 크게 무찔러 모두 수복하였다. 이 때 단천 유생 김응진(金應診)과 정로위(定虜衛) 박헌종(朴獻宗)은 앞장서서 싸우다가 전사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군의 일부인 몽고병이 돌아가는 길에 함경도를 지나면서 많은 피해를 입히자 김응진의 아들 극례(克禮)와 박헌종의 아들 충립이 나가 싸우다가 전사함으로써 2대에 걸쳐 큰 공을 세웠다.

『여지도서 輿地圖書』에 의하면, 1759년(영조 35) 당시 10사(社)에 호수는 3,900호, 인구는 2만 9674명이었으며, 1872년(고종 9)에 편찬된 『단천읍지』에는 호수 4,518호, 인구 3만 6234명으로 되어 있다.

[근 대]

1895년 5월 지방관제를 개혁하여 부군제, 즉 23부 334군을 설치하여 부에는 관찰사, 군에는 군수를 두니 단천은 군으로서 함흥부에 속하였다.

1896년 다시 전국을 13도·1목·15부·337군으로 개편하였다. 이때 함경도가 남·북 2도로 나누어졌으며, 단천군은 함경남도에 속하게 되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천도교가 중심이 되어 제일세교조순도기념일(第一世敎祖殉道紀念日)인 3월 10일 만세시위를 벌였으며, 용연리역 앞에서 왜경과 충돌하여 서봉화(徐鳳化)를 비롯한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박은식(朴殷植)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의하면, 집회 횟수 5회, 사망자 수 38명, 부상자 수 136명, 투옥자 수 384명이었다고 한다.

또, 1930년 7월 5일에 일어난 단천삼림조합반대투쟁사건은 1만여 명의 군중이 군청·경찰서를 습격한 대규모의 항거 사건이다. 이 사건에서 장종형(張宗亨) 등 15명이 왜경의 발포로 죽고 많은 중경상자를 내었으며, 피검된 사람은 1,000여 명에 달하였다. 이 밖에 이곳 출신 독립 운동가로서 널리 알려진 사람은 이동휘(李東輝)가 있다.

일제 강점기의 인구통계를 보면 1927년 호수 1만 7926호, 인구 12만 6997명이던 것이 1943년에는 2만 9352호, 16만 4241명으로 변화하였다.

이러한 인구 증가와 풍부한 지하자원 및 상공업·교통의 발달을 배경으로 1943년 50만의 인구를 포용할 수 있는 단천 시가지 계획이 수립되었다. 이와 더불어 두언대리(豆彦臺里)의 축항 공사와 단천평야의 대규모 공장 건설이 추진되다가 광복을 맞았다.

유물·유적

고분으로는 복귀면 장내리 등지에 석곽묘가 여러 기 산재한다. 불교 사찰로는 이중면 인산리의 보현사지(普賢寺址)와 동덕사(東德寺)를 비롯하여 남두일면의 개화사(開花寺), 신만면의 천흥사, 광천면의 은적사(隱寂寺) 등이 있다.

성곽으로는 단천성(端川城)을 비롯하여, 이중면의 창덕성지(倉德城址), 남두일면의 증산보(甑山堡), 이중면 가산리의 양덕산성, 하다면 고읍리의 도덕산성(道德山城), 복귀면 노동리의 노동산성, 기암리의 운시산성, 수하면 고성리의 개고성(開古城), 북두일면 요양리에 오을족보(吾乙足堡) 등이 있다. 단천성은 금봉산(錦峰山) 위에 있으며, 너비는 2.5m, 높이는 4.5m, 둘레는 2.8㎞에 달한다. 이 성은 1107년 윤관이 축성한 9성 중의 하나라고 전해 온다.

또한, 복귀면의 토성터는 학술상 중요한 유적이다. 그 밖에 윤관의 전공을 기념하는 단천읍 도덕산의 장사대(壯士臺), 단천읍 사부진 해안 절벽에 있는 유선대(遊仙臺)와 백마산의 백사정(白沙亭) 등의 정자가 있다.

교육·문화

조선 초기에 단천향교가 창건되어 이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담당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4년(선조 37)에 중건되었다.

1604년(인조 19) 군수 성환(成瑍)이 ‘복천원(福川院)’이라 현판을 달고 서원으로 불렀으며, 1695년(숙종 21)부터 복천서원으로 칭하였다. 그 뒤 많은 유생을 교육시켰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폐원되었다.

신교육기관으로는 1910년 처음으로 소학교가 설립되었으며, 1915년 새로이 보통학교령이 발표되면서 이후 소학교들이 보통학교로 바뀌었다.

중등 교육기관으로는 1926년 단천공립농업보습학교가 설립되었는데, 수업 연한은 2년이었다. 1940년 2년제의 단천상업학원이 설립되었고, 1943년 4년제의 단천공업학교가 설립되었다가 광복과 더불어 학교명이 단천고급중학교로 바뀌었다.

이 밖에 1945년 현재 공립초등학교 13개교, 사립초등학교 28개교가 있다. 대부분의 지역이 공립초등학교가 거의 전부인 데 반하여, 단천에는 사립초등학교가 두 배를 넘는 특이한 사실이 주목된다.

종교 상황으로는 『동국여지승람』에 천봉산의 옥룡사(玉龍寺), 오봉산의 화장사(花藏寺)와 노동사(蘆洞寺) 등에 대한 기록을 볼 수 있으나, 그 밖에 1945년 당시의 불교 상황에 대한 기록은 전하는 것이 없다.

기독교는 1887년 프랑스 사람이 원산에 교회당을 세운 것이 시초가 되어 그 뒤 이곳에도 기독교가 전파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천도교는 1902년만덕리에 사는 최기주(崔基周)가 동학에 입도한 것이 시초가 된다. 천도교도들은 산간지대를 중심으로 하여 많은 신도를 포섭하였으며, 1926년 당시에는 5,177명의 천도교인이 있었다.

한편, 이곳에 전해지고 있는 대표적인 이야기로 구두쇠설화인 〈모자바위설화〉가 있다. 복귀면 용연리라는 마을에 용연지가 있고, 이곳에 ‘모자바위’라고 불리는 괴암이 마치 아이 업은 여인같이 우뚝 서 있다.

옛날 이곳에서 구두쇠 영감과 착한 며느리가 살았는데, 영감은 심술 사나운 구두쇠라서 벼락을 맞아 날아갔고 시주를 잘한 며느리는 고승이 시키는 대로 아이를 업고 도망가다가 그만 깜빡 잊고 뒤를 돌아다 보는 바람에 모자바위로 변해 버렸다는 내용이다.

이 밖에 변방을 지키던 병사의 아내가 남편을 기다리며 10년 동안 바닷가에서 광주리를 인 채 서 있다가 화석이 되었다는 〈광주리바위전설〉과, 샘에서 목욕하는 선녀에게 마음이 현혹된 고승이 화석이 되었다는 〈굴코바위전설〉등이 있다.

민요는 북청군과 더불어 이른 시기에 주목되어 채집된 것이 비교적 많다. 그러나 대부분이 비기능요이며, 내용도 흥을 돋우거나 남녀 간의 연정과 이별을 다룬 것이 많다.

〈애원성 哀怨聲〉의 내용도 대체로 연정과 이별 등을 다룬 것이나, 이 고장의 주요 산업이 상업임을 알게 하는 곳이 있는데, 다음과 같은 부분이다. “공동묘지 간 낭군은/천당 그리워 가고/부평(북평?) 청진 가신 낭군/돈 그리워 갔네/에헤야 어 널널 너리둥 널과 내로구나.” 보통 〈애원성〉은 후렴이 ‘에∼’로 표기되고 있으나, 이 고장의 〈애원성〉의 후렴은 위와 같이 의미 있는 실사가 들어 있고, “에헤야 아니나 놀지는 못하리라.” 등 다양한 것이 특색이다.

이 밖에 연정과 이별·그리움을 노래하는 상사별곡류(想思別曲類)도 전해진다. 동제로는 주로 여제(厲祭)와 산신제가 거행되었는데, 여제 때 무녀를 불러다가 무악을 울리며 제사 지내는 풍속이 다른 고을과는 다른 특이한 점으로, 이는 엄숙함보다 축제의 즐거움을 한층 돋우어 준다.

산업·교통

북대천·남대천·복대천 유역의 평야에서 논농사가 이루어져 연간 약 3만 5000석(1940년 현재)의 쌀을 생산하지만, 그 밖의 지역에서는 대부분 밭작물이 생산된다. 주요 농산물은 콩·팥·피·조·맥류 등으로, 특히 콩은 ‘단천대두’라 하여 질이 좋기로 전국적으로 유명하며, 외국에 수출되기도 한다.

과수의 재배도 성하여 사과·배의 수확은 도내에서도 손꼽힌다. 산악 지대 천연림이 무성하여 임산자원의 개발이 크게 기대되었으며, 단풍선(端豊線)이 개통되면서 그 실현이 촉진되었다.

연해안에서는 한류성 어족인 명태·연어·청어·대구 등이 많이 잡히며, 특히 단오절의 청어잡이, 입춘절의 남대천·복대천의 은어잡이, 입추절의 연어잡이는 유명하다.

또한, 지하자원이 풍부하고 광산물의 종류도 다양하여 도내에서는 ‘지하박물관’이라 일컬어지기도 한다. 세계 제1의 매장량을 가진 용양(龍陽)의 마그네사이트 광산을 비롯하여, 구리·납·아연·코발트·금을 산출하는 검덕의 광산, 인회석·유화철을 산출하는 신풍광산, 질이 좋은 자철광을 생산하는 수하면의 광산 등 총 광구 수는 140개소나 된다.

시장으로는 매일 열리는 장인 단천읍장·여해진장(汝海津場)을 비롯하여, 정기 시장으로는 1일과 6일에 열리는 단천우시장(端川牛市場), 2일과 7일에 열리는 용포장(龍浦場)·가원장(加元場)·이동보장(梨洞堡場), 5일과 10일에 열리는 연대장(蓮坮場)·교경장(橋頃場)·송경장(松頃場), 4일과 9일에 열리는 고성장(古城場)·신복장(新福場)·석포장(石浦場) 등 12개의 시장이 있다(1941년 현재).

도로는 해안 지대를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발달되지 못하였다. 함경선이 해안 지대를 통과하며, 기암·용강·오몽리·단천·여해진에 역이 설치되어 있어서 교통의 기간(基幹)이 된다.

1938년 완성된 단풍선과 1940년 완성된 용양선(龍陽線)은 내륙 지방의 교통 및 광산자원과 임산자원의 개발에 큰 몫을 한다. 항구로는 동남단에 있는 여해진(汝海津)이 있어 국내의 각 항구와 정기 항로가 통한다.

읍·면

[단천읍 端川邑]

군의 동남부에 있는 읍. 면적 50.52㎢, 인구 4만 1500명(1945년 현재). 읍 소재지는 서상리이다. 1937년 파도면(波道面)이 단천읍으로 개칭되어 승격되었으며, 이때 복귀면의 일부 지역이 편입되었다.

군의 중심지로서 남대천의 동쪽 평야에 운주산을 배경으로 하여 읍 시가지가 발달하고, 읍내의 남대천 서쪽은 지류인 복대천 유역과 함께 평탄한 들이 형성되어 있다.

본래는 농어촌 지역이었으나 민족 항일기인 1930년대에 들어 일본의 군수 공업의 원료인 각종 지하자원이 채굴되기 시작하였다. 1938년 허천강 수력발전을 위한 단풍선과 1942년 여룡선(汝龍線)이 개통되면서 북두일면의 마그네사이트를 비롯하여 철·코발트·금·운모·동·흑연 등이 채굴되어 반출되기 시작하였다.

1937년 일제는 단천읍을 시가지화하고 공업 지대로 전환시키는 한편, 제2차세계대전 말기 항구건설을 착수하였으나 3분의 1 정도 진행되다가 일제의 패망으로 중단되었다.

교통은 넓은 군내를 연결하는 도로망이 잘되어 있어 편리하며, 내륙의 단풍선과 함께 마그네사이트의 개발을 위한 여룡선으로 연결된 여해진 외항이 있어 수륙 교통이 편리하다. 유적으로는 윤관이 쌓은 9성 중의 하나인 단천성(일명 福州城)과 유선대, 백사정이 있다.

서상(西上)·문호(文湖)·동호(東湖)·신창(新昌)·은호(銀湖)·외문(外門)·내문(內門)·기평(碁坪)·대성(大成)·용성(龍城)·송평(松坪)·동상(東上)·동현(東峴)·송동(松洞)·상서(上西)·하서(下西)·동하(東下)·용현(龍峴)·덕천(德川)·대흥(大興)·주남(州南)·복천(福川)·사동(社洞)·증산(曾山)·독평(獨坪)·상직절(上直節)·하직절(下直節)·봉양(鳳陽)·고령(古靈)·영산(靈山)·두언대(豆彦臺)·오몽(吾夢)·용암(龍巖) 등 33개 이가 있다.

[광천면 廣泉面]

군의 동부에 있는 면. 면적 165.85㎢, 인구 1만 3750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용잠리이다. 남류하는 북대천이 면의 중앙을 남북으로 통과한다. 동쪽으로는 마천령산맥이 있고, 서쪽으로는 연화산과 유덕령(楡德嶺)이 있다. 복대천 중·하류의 광대한 경사지에 협곡과 평야가 있어 논과 밭의 비율이 비슷하며, 식량은 자급할 정도가 된다.

교통은 개척 철도를 이용하고 있으며, 흑연·금·은의 지하자원이 개발되고 있다. 용잠리시장이 산간과 평야 지대의 사이에 있으며, 일찍이 소시장으로 유명하였다.

용전리의 전주 이씨(全州李氏)를 비롯하여 정선 전씨(旌善全氏)·김해 김씨(金海金氏)·선산 김씨(善山金氏) 등의 동족 마을이 있다.

용잠(龍岑)·와동(瓦洞)·동암(東巖)·동원(東元)·운천(雲川)·덕천(德泉)·용전(龍田)·덕산(德山)·영평(永坪)·창흥(昌興)·장항(獐項) 등 11개 이가 있다.

[남두일면 南斗日面]

군의 중앙에 있는 면. 면적 435.63㎢, 인구 1만 3360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보거리이다. 직선상으로 급류하는 좁은 북대천의 중류 유역으로 좌우에 높은 산맥이 북대천과 병행하여 급한 경사면을 이룬다.

동쪽으로 함경북도와의 경계에 용연산·함박덕·판막령(板幕嶺, 942m)의 고산준령이 있고, 서쪽으로 만탑산·산봉산(山峯山,1,264m)·복개봉 등이 쌍벽을 이루고 있다.

북대천의 산간 계곡 및 광대한 산간지에서 경사지 밭농사가 행해지며, 임산물도 철도편으로 운반되고 있다. 지하자원으로는 흑연광이 있다. 교통은 면의 중앙을 남북으로 여룡선이 놓여 있어서 편리하다. 보거리는 일찍이 이 지방의 시장이자 중심지로서 새우·면포·명태·쌀·마포 등의 거래가 이루어진다.

유적으로는 증산보와 개화사가 있고, 이상리와 증산리에는 한양 조씨(漢陽趙氏)의 동족 마을이, 증산리에는 전주 이씨와 김해 김씨의 동족 마을이 있다. 보거(堡巨)·증산(甑山)·운송(雲松)·이파(梨坡)·신평(新坪)·이상(梨上)·이하(梨下)·신흥(新興)·신풍(新豊) 등 9개 이가 있다.

[복귀면 福貴面]

군의 최남단에 있는 면. 면적 133.20㎢, 인구 7,350명(1950년 현재). 면 소재지는 용포리이다. 북쪽 경계로 복대천이 흐르고 있으며 서쪽 경계에는 작봉(鵲峯, 870m)과 마운령 등이 있다.

그래서 서고동저의 지형을 이루며 좁은 면의 면적에 비하여 평야가 많고, 특히 남부 해안 지대는 단조로운 평지로서 동해에 면한다. 복대천과 남대천의 하구에 해당되는 동북부 지역 역시 비옥한 충적 평야 지대로 벼농사가 잘된다.

그 밖의 완경사지에서는 밭농사가 이루어져 잡곡 생산도 많으나 단조로운 해안가의 수산업은 미약하다. 교통은 면의 중앙과 해안 평야 지대로 간선철도 및 도로가 연결되어 단천읍으로 통하고 있다.

그러므로 시장·교육·의료 등을 단천읍에 의존하여 생활하고 있다. 유적으로는 노동리에 노동산성, 기암리에 운시산성이 있으며, 용연리에는 명승지인 용연지가 있다.

용포(龍浦)·장내(場內)·복평(福坪)·송오(松塢)·용강(龍崗)·대로동(大蘆洞)·기암(奇巖)·용연(龍淵)·노동(路洞)·복상(福上) 등 10개 이가 있다.

[북두일면 北斗日面]

군의 북부에 있는 면. 면적 725.73㎢, 인구 1만 7360명(194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대신리이다. 북대천의 여러 지류를 합친 광대한 상류 유역으로 대체로 1,500m의 고원 지대이다.

개마고원의 함경산맥과 마천령산맥 의 교차 지역으로 동쪽의 도 경계에는 안덕산(安德山, 1,306m)에 와룡령(臥龍嶺, 1,090m)의 고산준령이 달리고, 서쪽은 검덕산·만탑산의 고산준령으로 둘러싸여 있다.

고랭지 지역으로 내한성 식물·박달나무·전나무·자작나무·이깔나무 등 원시림이 무성하여 임산자원이 풍부하다. 계곡에서 감자·옥수수·귀리 등 내한성 농작물과 원시적 화전농업이 이루어진다. 군수 공업 원료인 마그네사이트광이 양천리에서 1928년 발견된 이래 1934년부터 발굴되기 시작하여, 1942년 운반을 위한 여룡선이 개통되어 활기를 띠게 되었다.

또, 산간벽지의 용양광산에서 마그네사이트광이 개발되고 이를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하여 여해진항까지 철도를 연결함과 동시에, 새로운 금·은·동·아연·운모 등 광물을 채굴하게 되어, 이곳의 교통은 경제·사회적으로 큰 변혁을 가져왔다.

주민은 김해 김씨·전주 이씨·선산 김씨가 동족 마을을 이루고 있다. 대신(大新)·용양(龍陽)·신덕(新德)·남별(南別)·덕응(德應)·대흥(大興)·양천(陽川)·용천(龍川)·학선(鶴仙) 등 9개 이가 있다.

[수하면 水下面]

군의 서부에 있는 면. 면적 712.88㎢, 인구 3만 8105명(1945년 현재). 면 소재지는 고성리이다. 동쪽으로는 산봉산·복개봉 등이 있으며, 면의 북부는 1,000m 이상의 산지로 되어 있는 등 전체가 500m 이상의 높고 험한 산지로 되어 있다.

중앙을 지나는 남대천과 그 지류는 협곡을 이루고 있다. 광대한 산간 지역의 남대천 계곡 주변이 생활무대인 이곳은 단풍선이 개통되면서 새로운 빛을 보게 되었다.

산간 지역에서는 임산물이 생산되어 철도로 운반되며, 농산물로는 콩·감자·귀리 등이 생산되고 소 사육도 성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지하자원 개발을 위한 개척 철도의 건설이 이루어진 이후 높은 품질의 자철광인 단천철광이 일제 말부터 대대적으로 채굴되어 왔다.

매장량 1,100만 톤의 철광과 아울러 금·은·동 등도 산출된다. 면의 중앙을 국도와 철도가 병행하여 달리고 있어 타지방과의 교통이 편리하다. 주민은 전주 이씨가 비교적 많아 동족 마을을 이루고 있다.

고성(古城)·하운승(下雲承)·상운승(上雲承)·하농(下農)·상농(上農)·인풍(仁豊)·중평(仲坪)·은흥(殷興)·용원(龍源)·황곡(黃谷)·내촌(內村)·만덕(滿德)·응덕(鷹德) 등 13개 이가 있다.

[신만면 新滿面]

군의 남서부에 있는 면. 면적 244.56㎢, 인구 9,135명(194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정동리이다. 복대천의 상류 유역으로 북으로 관암산, 남으로 취덕산 등 대체로 1,000m 이상의 산지로 둘러싸여 있으며, 복대천의 상류는 협소한 계곡을 이룬다. 순수한 산간 지역으로 일부 복대천의 상류 계곡에는 산림이 무성하여 목재·목탄의 생산이 많다.

복대천 계곡의 주민은 콩·대마·잡곡 등을 생산하며, 소 사육도 성하다. 유적으로는 고성리에 개고성이 있다. 주민은 전주 이씨와 선산 김씨가 특히 많아 큰 동족마을을 형성한다. 정동(貞洞)·신동(新洞)·용천(龍川)·석우(石隅)·안시동(安時洞)·개평(開坪) 등 6개 이가 있다.

[이중면 利中面]

군의 동쪽 해안가에 있는 면. 면적 138.14㎢, 인구 1만 9635명(194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답동리이다. 북대천의 하류 유역과 지류 유역에 비옥한 평야가 전개된다. 북쪽으로 연화산을 비롯한 산지가 형성되어 있으며, 동쪽과 서쪽으로도 산줄기가 면 경계를 이룬다. 북대천 하구일대의 충적평야에서 쌀이 많이 생산되며, 북부 경사지에서는 콩·조 등이 생산된다.

여해진 항구는 수산업 기지로서 상당한 어획을 올리고 있다. 교통은 해안가의 함경선과 여기서 갈라지는 용양선이 면사무소를 경유하며, 아울러 동해안 국도가 있는 데다 바다로 여해진 항구가 있어 수륙 교통이 모두 편리하다.

그러나 시장과 교육 및 의료 시설 등은 가까이에 있는 단천읍에 의존하는 편이다. 유적으로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이희당(李希唐)의 군사가 왜군을 물리친 격전지였던 창덕성지가 가산리에 있다.

답동(畓洞)·하전(荷田)·인산(仁山)·덕주(德州)·가응(加應)·신덕(新德)·가산(嘉山)·낙인(樂仁)·두연(斗淵)·화장(華藏)·영천(永川)·창동(昌洞)·두우(斗牛)·돌산(乭山)·천곡(泉谷)·용산(龍山)·동평(東坪)·문암(門巖) 등 18개 이가 있다.

[하다면 何多面]

군의 남부에 있는 면. 면적 239.02㎢, 인구 1만 8380명(194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연대리이다. 남류하는 남대천과 동류하는 복대천이 합류하여 남부에 평야를 이루며, 두 하천 사이로 도덕산(道德山, 571m)·천봉산(天峯山, 753m) 등의 산줄기가 뻗어 서북부는 500m 이상의 산지로 완경사를 이룬다.

교통은 단천읍에서 세 갈래의 방사형으로 면내를 흘러 들어가는 복대천·남대천 유역의 철도를 이용한다. 한편, 교육·문화 등 여러 면에서 상거리 시장의 이용이 많다. 유적으로는 고읍리에 도덕산성이 있으며, 주민은 선산 김씨(善山金氏)·김해 김씨(金海金氏)·청송 심씨(靑松沈氏)가 동족 마을을 이루고 있다.

연대(蓮臺)·풍화(豊和)·송파(松坡)·달전(達田)·양평(陽坪)·고읍(古邑)·백자동(栢子洞)·개장(開墻)·가원(加元)·좌역(佐驛)·쌍룡(雙龍)·쌍상(雙上)·원동(元洞) 등 13개 이가 있다.

광복 후 변천

1952년 12월 이중면·남두일면·북두일면은 광천군(廣泉郡)에, 수하면은 허천군(虛川郡)에 넘어갔다. 1974년 5월 광천군이 폐지되면서 다시 단천군에 흡수, 통합되었고, 1982년 8월 단천시로 승격되었다. →단천시

참고문헌

『삼국사기』
『고려사』
『경국대전』
『신증동국여지승람』
『단천군지』(단천군지편찬위원회, 1971)
『함경남도지』(함경남도지편찬위원회, 1976)
『지방행정구역발전사』(내무부, 1979)
『북한 행정구역 및 산천지세』(국토통일원, 1983)
『인물의 고향』-북한편-(중앙일보사, 1991)
『북한지지요람』(통일원,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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