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한 짝만 끼는 것은 반지, 쌍으로 끼는 것은 가락지라 부른다. 반지는 선사시대의 것으로 알려진 패각제의 것이 출토되어 그 착용 역사가 깊음을 알 수 있다. 대체로 반지는 금·은·동 등으로 만들었으며, 이집트에서는 호부로, 그리스에서는 인장으로, 로마시대에는 약혼 징표로 쓰였다.
중국에서는 전국시대 이후에 쓰였으며 우리 나라에서는 삼국시대, 특히 신라에서 성행하였다. 지금까지 알려진 최고(最古)의 반지는 평안남도 강서군 태성리 제4호 토광묘에서 발견된 초기철기시대의 것으로 지름 2㎝, 두께 1.5㎝의 은제품이다. 삼국시대의 각 국가별 출토유물은 다음과 같다.
① 고구려 : 크게 성행하지 않았던 듯 유물이 많지 않고 형태도 조잡하다. 안학궁지 제2호분에서는 청동제 반지가 출토되었는데 너비 4㎜, 두께 1㎜의 청동줄을 타원형으로 구부려 만든 것이다. 약수리 벽화고분에서는 금제 반지가 출토되었는데 너비 3㎜, 두께 0.5㎜의 금판을 베어 만든 것으로서 지름이 2㎝이다.
두께와 너비가 고르지 못하고 가위로 자른 가장자리도 다듬어져 있지 않아 조잡한 감을 준다. 강서군 보림리 소동 제12호분의 은제 반지는 윗면이 능각을 이루고 있고, 평양역전 이실분의 것은 은으로 된 굵은 줄을 되는대로 휘어 만든 것이다.
② 백제 : 각종의 호화스러운 유물이 출토된 무령왕릉에서도 출토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크게 성행하지 않았던 것 같다. 공주읍 우금리 고분에서 출토된 것은 은제와 금제의 것이다. 은제의 것은 지름 약 1.9㎝ 내외에 잘게 각선을 둘렀고, 금제의 것은 폭이 넓은 간소한 형태이다. 한편 이 일대에서는 단면이 원형인 동제가 출토되었다.
③ 신라 : 삼국 중 가장 반지가 성행하였던 국가로, 고분 출토물로 추정해볼 때 남녀의 구별 없이 끼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 왼쪽 손가락뿐 아니라 오른쪽 손가락에도 끼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지금까지 알려진 반지의 형태를 보면, 위·아래가 꼭 같은 폭으로 아무런 장식이 없는 것이 있다.
윗면 중앙 부분이 능형을 이루고 가장자리 둘레에는 새끼 모양의 각선이 둘러져 있는 것, 윗면 중앙부가 도톰하게 올라온 것 등이 있다. 윗면 중앙부가 능형을 이루고 넓으며 이에 누금세공(鏤金細工)한 사판화문(四瓣花文)을 돌린 것, 윗면 중앙부에 화형좌를 만들고 유리알을 박아 장식한 것, 반지 몸체가 나선형을 이루고 그 외면에 주문을 돌린 것 등 다양하다.
특히 경주 노서동의 한 고분에서 출토된 반지는 지름 2.1㎝, 최대폭 1㎝에 이르고, 능형을 이룬 중앙부에 4개의 꽃잎을 배치하여 금립을 박았을 뿐 아니라 가장자리에도 금립을 박은 매우 화려한 것이다. 신라에서는 금이나 은이 재료로 사용되었는데, 특히 금제가 많아서 서봉총의 경우 16개나 출토되었다.
④ 가야 : 가야 고분에서도 다른 유물에 비하여 그 출토 예가 극히 적다. 양산 부부총에서는 은제품이 10개 출토되었는데 윗면의 중앙부가 능형을 이룬 형태의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상당히 유행된 것으로 보이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별로 많지 않다.
문헌에 따르면 몽고 침입 후 고려의 부녀자들이 원으로 끌려갈 때, 부모와 친척들로부터 반지를 정표로 받아 끼고 갔다고 한다.
이 여인들이 끼고 간 반지가 원나라에서 크게 유행하였는데, 이를 모방한 것을 고려양(高麗樣)이라고 하였다. 유물로는 금제에 마노형 보석을 낀 것이 있는데 지름이 1.8㎝ 내외이다. 또 다른 유물로는 당초문을 양각한 금제 반지와 거치무늬를 돌린 은제 반지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반지보다 가락지를 더 많이 애용하였다. 반지는 주로 처녀가 끼었고 혼인한 부인은 가락지를 끼었는데 현재는 혼인여부를 떠나 모든 여성들이 다양한 종류의 반지를 애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