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황해도 남부에 위치한 시.
개관
자연환경
역사
신석기시대 유적으로서 남산의 주거지와 용당포의 패총이 발굴되어 빗살무늬토기 등이 출토되었고, 무문토기 등 청동기시대의 유물도 출토되었다. 따라서 신석기시대부터는 이곳에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믿어진다.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영역이었다가 삼국시대로 들어와 처음에는 백제의 영역으로 편입되었으나 이후 고구려의 영토로서 내미홀군(內米忽郡)으로 편성되었으며, 지성(池城) 또는 장지(長池)라고도 하였다.
고구려 멸망 후에는 신라의 영토가 되어 748년(경덕왕 7)에 폭지군(瀑池郡)으로 개칭되었으며, 762년에는 앞서 고구려의 광개토왕 또는 장수왕 당시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지성산성(池城山城)이 다시 수축되고 태수(太守)가 부임하였다.
[고 려]
태조가 936년(태조 19) 후삼국을 통일한 뒤 이곳에 이르러 지성산성에 있던 읍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이때 태조가 지세를 보고서 “남쪽으로 대해(大海)에 임하여 있다.”고 하여 해주로 지명을 고쳤다고 전해지나, 기록에 지명이 해주로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은 태봉 때인 905년부터이다.
983년(성종 2)에 해주목(海州牧)으로 승격되어 목사가 부임하였고, 995년 전국의 12주(州)에 절도사(節度使)가 두어지면서 해주에도 절도사가 파견되었다. 이때 해주절도사의 소관이 우신책군(右神策軍)으로 됨으로써 양주(楊州)의 좌신책군과 함께 개성의 좌우보(左右輔)로서 수도방위의 요충지로 등장하였다. 1012년(현종 3) 절도사가 폐지되고, 1018년 전국에 4도호부가 설치되면서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로 개편되었으며, 1122년(예종 17) 대도호부로 승격되는 등 군사적 성격은 그 뒤로도 계속 이어졌다.
1247년(고종 34)에는 다시 해주목으로 고치고 목사가 부임하였다. 서해도(西海道)에는 다른 도보다 일찍이 11세기 전반 정종 때부터 안찰사(按察使)가 파견되었는데, 그 영(營)이 해주에 두어졌고, 1389년(창왕 1) 이후로는 관찰사영(觀察使營)의 소재지가 되어 서해도의 행정중심지로 기능하였다.
[조 선]
조선 초기에도 대체로 황해도의 행정중심지로서의 위치를 유지하였으나, 1449년(세종 31) 병영을 황주(黃州)에 두기로 한 계획이 지역이 협소하다는 이유로 바뀌어 해주에 병영을 두고 대신 관찰사영은 황주로 옮겨졌다. 관찰사영이 다시 해주로 확정되는 때는 1601년(선조 34)으로, 이후 관찰사영과 목사의 관아가 읍성 안에 함께 존속하였다.
15세기 중엽의 인구는 1,926호에 6,814명이나, 이는 현재의 벽성군 지역 주민까지 모두 포함된 숫자이다. 1616년(광해군 8) 변란을 고발하려던 사람을 해주목사가 형벌을 빙자하여 죽인 사건이 일어나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623년(인조 1) 다시 목으로 복구되었는데, 그 동안 도명 또한 황연도(黃延道)로 바뀌어 사용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점차 도시의 면모를 갖추어 갔고, 1759년(영조 35)에는 해주목만의 인구가 9,554명에 이르렀다.
[근 대]
1895년(고종 32) 지방행정체제가 개편되어 군면제가 실시됨에 따라 해주읍으로 되어 황해도청 및 해주군청의 소재지가 되었다. 1907년에는 강춘삼(姜春三)이 의병을 일으켜 해주와 연안 일대에서 큰 활약을 하였다.
이 밖에 독립운동가로서 3·1운동 때 민족대표로 참여한 최성모(崔聖模)와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한 정재용(鄭在鎔), 3·1운동 후 만주로 망명하였다가 대한독립단원으로 국내에 들어와 친일파를 사살 또는 중상을 입힌 민양기(閔良基), 역시 독립단원으로서 황해도 지단장으로 활약한 정순경(鄭順敬) 등이 있고, 안중근(安重根)도 이곳에서 태어났다. 1938년 부로 승격되었으며, 1945년 광복을 맞아 시로 개편되었다.
유물·유적
조선시대의 건축물로는 1500년(연산군 6)에 해주읍성 앞의 누각으로 세워진 부용당과 파청동에 읍청정(挹淸亭) 및 석빙고·탁열정·해운정·사미정 등이 있다. 이 밖에도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캐어 먹다가 굶어죽었다는 백이·숙제의 설화가 담긴 청성묘(淸聖墓)가 있고, 묘 앞에는 백세청풍비(百世淸風碑)가 있다. 시의 진산인 용수봉 기슭에는 해동공자(海東孔子)의 칭호를 듣던 고려시대의 교육자 최충(崔冲)의 구재기념관이 있다.
교육·문화
근대교육기관으로는 1890년대에 김영택(金榮澤)·오돈근(吳敦根)·이승모(李承謨) 등이 대령학교(大寧學校)와 제민학교(濟民學校)를 세웠으며, 감리교의 미국인 선교사 홀이 1904년에 의창학교, 1909년에 의정여학교(懿貞女學校)를 세웠다. 1912년에는 전봉훈(全鳳薰)·유훈영(劉薰永) 등이 정내여학교(正內女學校)를 세웠으며, 4년제 광덕학교(光德學校)도 세웠다.
중등교육기관으로는 해주농업학교를 최초로 세웠으며, 3·1운동 후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서는 교육을 통한 인재양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아 인문계 중학교의 설립 기운이 높아져서 1922년에는 해주공립고등학교를 세웠고, 해주농업학교는 봉산군 사리원으로 이전하였다. 그 뒤 1923년에 해주공립사범학교가 세워진 데 이어 해주공립공업실습학교·해주직업학교 등이 문을 열었고, 여자중등교육기관으로는 1931년에 수양공립고등여학교가 설립되었다.
한편, 일본인 자녀들을 위하여 1907년에 해주공립심상고등학교가 세워졌으며, 이어 해주욱정고등여학교·해주서중학교 등이 세워졌다. 따라서 해주에는 인문계 남자중학교 2, 인문계 여자중학교 2, 사범학교, 공업학교, 직업학교 등 7개의 중등교육기관과 10개의 공립·사립 국민학교가 있어 전국적으로 보기 드문 교육도시가 되었다.
산업·교통
특산물로는 먹과 벼루가 품질이 좋아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교통으로는 토성-해주-옹진에 이르는 황해선(黃海線)과 사리원에서 해주에 이르는 해주선(海州線)이 있다. 도로는 연백·개성을 지나 서울로 통하는 도로와 재령을 지나 사리원·신천·안악으로 통하는 도로가 있으며, 그 밖에도 장연·송화·옹진·금천·남천 등지로 도로가 연결되어 있다.
또한, 해상교통이 발달하여 일본 대판과의 사이에 1,500t급 화물선이 월 5회 운항되었으며, 인천항과의 정기항로가 있고, 진남포와도 기선의 왕래가 많아 여객·물자수송이 활발하다. 특히 해주항은 육지의 다른 곳과도 연결되고, 해상으로는 인천∼진남포 간 해상을 연결하여 상업중심지이면서 교통상 중요한 기능을 한다.
이 항은 1918∼1922년간 1차축항공사가 있었고, 토성(土城)에서 황해선철도가 건설되었으며, 1921년 인천∼용당포 간 항로선이 개통되었다. 2차확장공사가 1926∼1928년에 완공되어 접안시설·창고·하치장 등을 갖추었으며, 그 뒤 계속적으로 화물의 반출입량도 늘었다. 관광지로는 북산공원과 해주팔경이 있다.
광복 후 변천
1952년 행정구역 개편시 해주시와 벽성군의 금산면(錦山面)·영천면(泳泉面)·서석면(西席面)의 각 일부가 편입되었다. 1954년 황해도를 황해남·북도로 나눌 때 황해남도에 속하게 되었고, 도 소재지가 되었다. 1961년 3월 청단군 영양리와 벽성군 신광리가, 1965년 1월 청단군 작천리와 장방리가 각각 편입되고, 석천리가 석천동, 석미리가 석미동, 결성리가 결성동으로 각각 개칭되었다.
1982년 10월 용당동·왕신동·청풍동·태봉동·학원동이 폐지되고 학현동·새거리동·산성동이 신설되었다. 1965년 청단군 일부가 해주시로 편입되었다. 1982년에 용단동·왕신동·청풍동·태봉동·학원동이 폐지되고, 학현동·새기리동·산성동이 신설되었다.
행정구역은 석미(石美)·용당(龍塘)·결성(結城)·석천(石川)·영광(榮光)·광하(光河)·광석(廣石)·선산(仙山)·양사(養社)·장춘(長春)·승마(乘馬)·해운(海雲)·옥계(玉溪)·부용(芙蓉)·구제(救濟)·사미(射美)·해청(海淸)·서애(西艾)·대곡(大谷)·연하(烟下)·남산(南山)·읍파·학현(鶴峴)·산성(山城)·새거리 등 25개 동과 영양(迎陽)·신광(神光)·장방(長芳)·작천(鵲川) 등 4개 이로 되어 있다
[자연환경]
이 시의 진산은 수양산(首陽山)인데, 이 산은 주거봉(周拒峰, 899m)·설류봉(雪留峰, 945m)·우이산(牛耳山, 907m) 등 여러 개의 봉우리로 되어 있다. 수양산의 서쪽으로 응봉산(鷹峰山, 645m), 동쪽으로 장대산(將臺山, 685m)이 솟아 있는데 함께 북쪽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으므로 겨울에는 찬바람을 막아주어서 해주는 이름난 피한보양지로 발달하게 되었다. 서쪽 경계선을 신광천(神光川)이, 동쪽 경계선을 읍천이 흐르고 있다. 해주는 광석천(廣石川)이 퇴적한 소규모의 선상지 위에 발달하였으며, 평야의 중앙에 선녀산(171m)·남산(122m) 등이 솟아 있다. 주요 기반암은 화강편마암·화강암 등이며, 토양은 산림갈색토양이 주를 이루고 있다.
기후는 연평균기온 11.0℃, 1월평균기온 -4.4℃, 8월평균기온 24.3℃, 연평균강수량은 1,187㎜이다. 주요 수종은 소나무·참나무이며, 동백나무·보리수나무도 자라고, 수양산 일대는 식물보호구로 지정되어 있다. 해주설송나무·해주벽오동나무·서담느티나무는 북한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특히, 해주는 감나무의 북한계선을 이루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산업·교통]
해주시 교외의 농업지역은 쌀의 산지로 이름이 있고, 밀·옥수수·과일·채소 등의 농산물도 생산된다. 광석포(廣石浦)·용당포(龍塘浦)·결성포(結城浦) 등의 어항을 중심으로 경기만에서 민어·광어·갈치·새우·굴 등이 잡힌다. 우이산 서쪽 사면에서 화강암의 박석이 채굴되고, 해주먹은 전국에 널리 알려져 있다. 공업은 제지·시멘트공업이 발달하였으며, 섬유·식품공업도 가동하고 있다. 해주시멘트·종합기계공장이 있으며, 특산물로 부용주가 유명하다. 교통망으로는 옹진선(옹진∼해주, 40.4㎞)·배천선(장방∼은빛, 64.4㎞)·황해청년선(사리원∼해주, 97.7㎞) 등의 철도가 있으며, 주요 도로가 재령·연안·벽성 등으로 통하고 있다.
[문 화]
다라니석당(陀羅尼石幢:북한 국보급 25호)과 신광사(神光寺)에 구층탑(북한 보물급 21호)·오층탑(북한 보물급 22호)·무자비(無字碑:북한 보물급 23호) 등이 남아 있다. 그밖에 석빙고·백세청풍비(百世淸風碑) 등이 있다. 이곳에는 강령탈놀이의 변형인 해주탈놀이가 군중놀이로 남아 있다.
참고문헌
- 『이북5도30년사』(이북5도위원회, 1981)
- 『북한지지요람』(통일원, 1993)
- 『인물의 고향-북한편-』(중앙일보사, 1991)
- 『삼국사기』
- 『고려사』
- 『세종실록지리지』
- 『신증동국여지승람』
- 『여지도서』
- 『대동지지』
- 『해주읍지』
- 『지방행정구역발전사』(내무부, 1979)
- 『황해도지』(황해도지편찬위원회,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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