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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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비 금목걸이
무령왕비 금목걸이
의생활
물품
목에 걸어서 몸을 장식하는 장신구.
이칭
이칭
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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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목에 걸어서 몸을 장식하는 장신구.
내용

우리 나라에서의 목걸이 사용은 청동기시대부터 그 흔적이 나타난다. 부여 연화리, 대전 괴정동 등지에서 출토된 식옥(飾玉)은 목걸이로 사용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목걸이가 많이 사용된 것은 고분시대 이후로 금·옥·유리 등 각종 재료를 사용한 목걸이가 출토되었다.

이 시대에 발견된 목걸이의 일반적 형식은 유리제 편구형 청옥에 구멍을 뚫어서 연결하고 늘어지는 끝에 곡옥을 하나 다는 형식이다. 이 시기에 출토된 목걸이는 각 국가별로 다음과 같은 특성이 있다.

① 신라 : 경주 노서동에서는 작은 금환으로 연결하여 공옥(空玉)을 만들고 그 표면에 다섯 개씩의 심엽형(心葉形) 금판을 단 구슬을 여러 개 연결하고, 끝에는 비취 곡옥을 단 화려한 형태의 목걸이가 출토되었다. 금관총에서는 1만2000여 개에 이르는 청옥으로 만든 목걸이가 출토되었다.

또, 미추왕릉지역에서는 수하부(垂下部)의 구형(球形) 유리옥에 청·황·홍·백 등의 색으로 사람의 얼굴과 새·구름 등을 상감한 것이 발견되었다. 이상에서 보면 신라의 목걸이 형식 가운데 주목되는 점은 늘어지는 끝에 비취·수정·마노 등으로 만든 곡옥 하나씩을 다는 것이다.

신라시대는 각종 수식 끝에 곡옥을 다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므로, 이는 이 시기의 기본적인 장식 의장으로 보인다. 신라에서는 청옥 이외 자마노·수정·호박·벽옥 등의 재료가 사용되었다. 형태도 편구형 이외 관형(管形)·대추형, 모난 주판알형 등 여러 가지 형태로 가공되었다.

② 백제 : 공주 무령왕릉에서는 왕비의 목부분에서 7절과 9절의 금제 목걸이 두 개가 발견되었다. 이 금제목걸이는 모두 중간부분이 굵고 양끝으로 갈수록 가늘어지는 약간 휜 금봉(金棒)을 연결하였고 늘어지는 끝은 약간 굵은 금환으로 연결되었다. 이들 목걸이에는 신라와 같이 곡옥을 달았던 흔적이 없다.

또, 곡옥·관옥·대추형옥 등을 비롯하여 황색·감색·녹색·청색의 옥과 금박을 입힌 옥이 유리된 상태로 발견되었는데, 특히 가슴 위치에서도 발견된 점으로 미루어 이들 옥의 일부도 목걸이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③ 고구려 : 신라·백제와는 달리 확실한 출토예가 없어 확실한 것을 알 수 없다. 통일신라시대의 고분에서는 목걸이의 출토예가 없고, 고려시대에도 구형·관형·편구형·대추형 등의 옥제·유리제 장신구들이 발견되기는 하였다. 그러나, 어느 것이나 유리된 상태로 발견되어 삼국시대 이후의 목걸이 사용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또, 고려시대 이후의 그림에서도 목걸이를 착용한 것이 보이지 않아 목걸이의 착용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근대 이후 서양식 복식이 들어오면서 다시 목걸이를 사용하게 되었고, 지금은 다양한 재료와 형태의 목걸이가 착용되고 있다.

참고문헌

『한국장신구미술연구』(황호근, 일지사, 1976)
『한국의 미 』22-고분미술-(한병삼 감수, 중앙일보사, 1985)
집필자
진홍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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