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변군 ()

대동여지도 중 함경남도 안변 부분
대동여지도 중 함경남도 안변 부분
인문지리
지명
함경남도 남부에 위치한 군.
이칭
이칭
등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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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함경남도 남부에 위치한 군.
개관

동쪽은 강원도 통천군, 서쪽은 강원도 이천군, 남쪽은 강원도 평강군 · 회양군, 북쪽은 문천군 · 원산시 · 동해와 접하고 있다. 동경 127°17′∼127°42′, 북위 38°40′∼39°08′에 위치하며, 면적 1,052㎢, 인구 10만 2421명(1944년 현재)이다. 7개 면 204개 이로 되어 있으며, 군청 소재지는 안변면 문내리이다.

자연환경

남서부는 마식령산맥과 태백산맥이 추가령(楸哥嶺, 752m)에서 서로 합쳐져 있어 지세가 높고 험하며, 백암산(白巖山, 1,220m) · 저두산(猪頭山, 1,340m) · 추애산(楸愛山, 1,530m) · 풍류산(風流山, 1,024m) · 황룡산(黃龍山, 1,268m) 등이 솟아 있다.

풍류산 동쪽의 안부(鞍部)에는 철령(鐵嶺, 685m)이 있어 예로부터 천연의 요새로 유명하며, 남북교통의 요지가 되었다. 마식령산맥과 태백산맥이 합쳐지는 곳에는 남북으로 단층곡인 추가령구조곡(楸哥嶺構造谷)이 발달했으며, 곳곳에 현무암이 분출되어 대지(臺地)를 이룬다.

이곳에서 발원한 남대천(南大川)이 북류하면서 상류에는 삼방(三防) 같은 기승지를 만들고, 중 · 하류에는 비교적 넓은 안변평야를 전개시키며 영흥만(永興灣)으로 들어간다. 또한 노인치(老人峙)에서 발원해 북동류하는 학천(鶴川)은 배화면에서 작은 지류들을 합치며 유역에 비옥한 충적평야를 전개시키고 영흥만으로 들어간다.

기후는 지형과 해류의 영향으로 고위도에 위치하는데도 기온이 비교적 높다. 특히 북쪽 해안지방이 남쪽 내륙지방보다도 따뜻하다. 연평균기온 10.5℃, 1월 평균기온 -3.5℃, 8월 평균기온 24.2℃이며, 연강수량은 1,320㎜이다.

역사

[고 대]

구석기 · 신석기시대의 유물 · 유적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봉산리에서 청동기시대 포함층이 확인되었으므로 적어도 이 시기부터는 이 군에 사람이 거주했음이 확실하다.

남옥저에 속해 있다가 56년(태조왕 4)태조왕의 정복으로 고구려에 복속하였다. 고구려 때 비열홀군(比列忽郡) 또는 천성군(淺城郡)이라고 하였다. 556년(진흥왕 17) 진흥왕이 이곳을 점령해 비열주(比列州)라 하고 군주(軍主)를 두어 통치했으며, 757년(경덕왕 16)삭정군(朔庭郡)으로 바꾸었다.

[고 려]

태조가 고려를 건국하자 이곳의 골암성(鶻巖城)에 웅거하고 있던 윤선(尹瑄)이 내부하였다. 이에 동북경 방면을 안정시키기 위해 유금필(庾黔弼)을 이곳에 파견해 발해시대부터 이 방면에 살고 있던 여진족을 회유 또는 토벌하며 이곳을 다시 고려 영토로 편입시켰다. 그리하여 골암진을 설치해 등주(登州)라 칭하고 동북경의 중요한 거점으로 삼았다.

995년(성종 14)에 단련사(團練使)를 두었다가 1018년(현종 9)안변도호부로 고쳤다. 고종 때 정평(定平) 이남의 여러 성이 몽고병의 침공을 입어 이곳의 읍치를 양주(襄州)로 옮겼으며, 재차 간성(杆城)으로 옮겼다가 1298년(충렬왕 24) 본성(本城)을 돌려받았다.

[조 선]

1403년(태종 3)조사의(趙思義)의 난으로 감무(監務)로 강등되었다가 다음 해에 다시 도호부로 복구되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따르면 1432년(세종 14)에 호구는 1,030호, 3,997명이었다. 세조 때 진이 설치되었고 1471년(성종 2) 대도호부로 승격되었다가 1509년(중종 4) 다시 도호부로 환원되었다.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장 가토(加藤淸正)가 함경도를 침공해 이 군도 유린당하였다. 1636년(인조 14) 12월 병자호란 때에는 청군의 일부인 몽고병이 함경도를 거쳐 철수했기 때문에 많은 피해를 입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따르면 1759년(영조 35) 당시 방리(坊里)는 세청사(世淸社) 등 13사로 이루어져 있었고 호구는 6,216호, 3만 5503명이었다. 1872년(고종 9)에 편찬된 『안변읍지』에는 역시 13사에 호구 5,216호, 3만 2038명으로 인구가 감소하였다.

[근 대]

1895년 5월 부 · 군제를 실시할 때 함흥부 안변군으로 개편되었다. 1896년 전국을 13도제로 고칠 때 함경남도 안변군이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행정구역은 안변 등 7면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군청 소재지는 안변면 문내리였다. 호구는 1927년에 1만 4473호, 8만 1251명이었고, 1943년에 1만 8040호, 10만 2609명이었다.

유물 · 유적

안변면 홍문리에는 과거에 국보로 지정되었던 안변가학루(安邊駕鶴樓)가 있고, 석왕사면 사기리석왕사에도 국보로 지정되었던 석왕사응진전(釋王寺應眞殿)과 석왕사호지문(釋王寺護持門) 등이 있다.

고려시대부터의 관문인 철령관지(鐵嶺關址), 삼방역 남쪽에 있는 태봉궁지(泰封宮址), 추가령의 삼관지(三關址), 신모면 신곤리의 보현사(普賢寺), 신고산면 서리의 성도암(成道庵), 위남리의 원통암(圓通庵) 등의 유적이 있다.

서곡면 능리에는 이성계(李成桂)의 증조할아버지인 익조(翼祖)의 지릉(智陵)이 있다. 서곡면 용상리와 용현리에는 봉분 지름 10.3m, 높이 2.65m에 연도를 갖춘 고분군과 길이 4m, 너비 1.5m, 높이 1.7m인 석실고분 60여 기가 분포되어 있다.

안변면 학성산에 학성산성(鶴城山城), 안도면 낭성리에 높이 2m, 길이 110m의 토성이 있으며, 안도면 비산리에도 길이가 1,800여m인 토성이 안변면 홍문리에 연이어 있다. 또 안변면 미현리시루봉[甑峰]에 2㎞에 달하는 토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신모면 양지리, 배화면 수악리, 서곡면 성우리 · 용현리 등지에는 석성지가 있으며, 석왕사면 용운리, 배화면 풍상리 · 한사리 · 수려리 · 천양리 등지에도 토성지와 석성지가 있다.

석왕사면 남산석리 · 상감리 · 상탑리 · 구용지원리 등지에는 봉수대와 석불 · 요지 · 고분군 등이 산재해 있다. 신고산면 내평리의 고분군, 신대리의 석성, 고산리의 노고산성 · 철령봉수지 · 철령성지, 재천리가래산정의 석성지, 삼방리의 고분군, 신모면 천내리의 황룡산 장사봉 정상의 산성지 등의 유적이 있다.

교육 · 문화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는 안변향교와 서당이 있었으며, 1567년(명종 22) 안변면 옥리에 옥동서원(玉洞書院)이 건립되어 인품도야와 유학교육에 힘썼다. 근대교육기관으로는 1924년에 진학회(進學會)라는 장학모임에서 대성강습소(大成講習所)를 최초로 설치했으며, 이후 점차 학교가 생겨나 각 면마다 국민학교가 설치되었고, 산간벽지에는 간이학교가 설치되었다. 종교상황은 1933년 현재 불교사찰 9개에 신도 168명이며, 기독교는 천주교가 많이 보급되었고, 교회 22개에 신자 1,581명이다.

이 고장의 설화로는 이성계의 부연몽을 해몽한 이야기인 〈석왕사연기설화〉가 있으며 〈화형암설화〉 · 〈혈모로설화〉 등이 전한다. 〈석왕사연기설화〉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이성계가 어느 날 밤 꿈을 꾸었는데, 무리 닭이 만 집에서 일제히 울어대고 다듬이 소리가 천 집에서 동시에 나고 몸은 무너진 집에 들어가서 서까래 3개를 지고 나왔으며, 꽃이 휘날리고 거울이 떨어지는 것이었다.

하도 이상해 수소문 끝에 무학대사를 만나 꿈해몽을 부탁했더니 사양하다가 말하기를 “길몽이오. 만 집에서 닭이 고귀위(高貴位)했으니 높은 자리에 오르며, 천 집에서 다듬이 소리가 일제히 났으니 만백성 천벼슬 들이 임금 된 경사를 알리는 풍악소리요, 서까래 셋을 지었으니 임금왕(王)자요, 꽃이 날렸으니 필경 열매 맺을 것이요, 거울이 떨어졌으니 깨지면서 반드시 큰 소리가 날 것이라 이는 임금 될 꿈이니, 여기 설봉산에 절을 짓고 기원하면 소원성취하리라.” 하였다.

이것이 이성계가 즉위하기 8년 전 일이었고, 이성계는 기원소(祈願所)로 석왕사를 짓고 길주땅 천불사(千佛寺)에서 오백나한을 배로 실어 날라 이곳에 안치시켰다고 한다. 그런데 나한 하나를 물에 빠뜨려 지금은 499나한이 남아 있다는 이야기이다.

〈화형암설화〉는 고려 때 수자리 간 유복자가 어른이 되어 그 아비를 찾아가다가 기르매고개에서 부역을 마치고 돌아오는 아버지와 우연히 상봉해, 두 사람은 감격하면서도 원한이 사무쳐 있던지라 서로 신세한탄을 하며 부둥켜안고 울며 함께 손가락을 잘라 피로 부자의 화상을 그렸는데 날씨가 흐리면 그 화상이 드러난다고 하는 이야기이다.

〈혈모로설화〉는 임진왜란 때 이곳 청년들이 왜장을 유인해 독이 든 술을 먹이고 목을 베었는데, 한 놈이 도망가서 일이 탄로나 마을사람들이 보복당해 모조리 죽어 많은 피를 흘렸다는 이야기이다. 이 밖에도 〈되무덤설화〉 · 〈철령설화〉등이 전한다.

이 고장의 민요로는 들녘과 밭이 많아 농사와 관련된 노동요 및 생사와 관련된 애가가 전하는데, 그 가운데 널리 불려 온 〈신고산타령〉 · 〈따방녀〉 · 〈수수밭 도지〉를 차례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신고산이 우루루/함흥차 가는 소리에/구고산 큰애기 반봇짐만 싼다/어랑어랑 어허야/어야디야 내사랑아”, “따방따방 따방녀야 네 어데로 울며가니/네 어미 몸진골로 젖먹으러 울며가네/관문이 문 같으면 열고닫고 보련마는/저승길 길 같으면 오면가면 보련마는/……”, “수수밭 도지는/내 물어줄테니/구시월까지는 세워주소/에랑에랑 에헤야/에라마 내 사랑아!” 이 밖에도 〈개똥벌레요〉 · 〈박쥐요〉가 전한다.

민속놀이로는 단옷날에 즐기는 놀이가 있는데, 다른 지방과 다름없다. 여자들은 평강계곡의 물을 막고 남대천과 서쪽에서 흐르는 하천의 맑은 물에 창포를 삶아 머리 감고 그네뛰기와 널뛰기를 하며, 남자들은 씨름을 하며 즐긴다.

동제로는 제신(祭神)이 많아 산신 · 천신 · 지신 · 여신 등이 있는데, ‘되무덤’ 등의 묘지가 많아 미신을 믿는 풍습이 강하다. 그래서 산천제 · 여제 등을 지내는데 산천제는 소찬으로서 수시로 지내고, 여제는 9월에 날을 받아 지낸다.

이 때도 그 신은 산천지신 또는 산천성황지신 · 군행거령지신 · 두역대감지신 등을 받들어 모시고 동제를 지내는데, 제단은 산 위나 산중턱 또는 강변에 약 15평 정도 석축이나 흙으로 제단을 쌓고 지방을 써서 모셔 놓는다. 마을에서 공동으로 소나 돼지를 잡아 집집마다 준비해 둔 제상에 골고루 나누어 놓고 모든 제물이 다 되었으면 각각 가져와서 제단에 놓는다.

제를 지내는 순서는 고령자 순이며 제의시간은 해질 무렵이다. 제를 지낼 때는 반드시 고축하는데, 그 내용은 위의 신들을 강신시키고 마을의 안녕과 괴질, 그리고 가축의 해가 없기를 비는 축원이다. 9월에 제일이 정해지면 제관뿐만 아니라 온 마을 사람들이 근신재계하며 가축 등을 잡는 것이 금지된다.

산업 · 교통

군의 북부 남대천과 학천 유역의 안변평야는 토지가 비옥하고 관개시설도 잘 되어 있어서 쌀을 비롯한 농산물이 많이 생산된다. 쌀 생산량은 도내에서 1위이며, 이 밖에 조 · 콩 · 밀 · 감자 · 피 · 대마 등이 생산된다. 또 안변면을 중심으로 과수재배가 활발해 사과 · 배 · 포도 · 복숭아가 생산된다.

설봉산에서는 송이버섯이 많이 나며, 산악지대에서는 꿀, 서곡면에서는 목탄 · 목재가 산출된다. 광산물은 금 · 은 · 동 · 아연 등이 산출되며, 광구는 82개이지만, 가동 중인 것은 37개에 불과하다.

이 군은 교통의 중심지이며, 경기 · 강원 · 함경도가 용이하게 만날 수 있는 곳이어서 각종 농산물과 각도의 풍물이 집산된다. 조선총독부가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1921년에 군내에는 안변장 · 해천장(蟹川場) · 오산장(梧山場) · 남산장(南山場) · 고산장(高山場) · 신고산장의 6개 정기시장이 있었다.

그 뒤 문정창(文定昌)의 『조선의 시장』에 따르면, 1941년에는 시장이 10개로 증가했으며 거래되는 물품도 다양해졌다. 안변면 문내리의 안변읍장은 3·8일에 개장했으며 곡류 · 의류 · 잡화 등이 거래되었고,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안변나무장도 개장하였다. 문산면 도호리의 남산장과 신모면 공수전리의 공수전장은 2·7일에 개장했고 공수전가축장도 함께 개장하였다.

신고산면 신대리의 신고산장과 신고산가축장은 4·9일에 개장했으며, 안변가축장이 안변면 탑리에서 개장하였다. 이처럼 안변의 시장은 우시장 중심의 가축시장이 많았으며, 쌀 · 조 · 콩 · 밀 · 감자 · 무 · 마포(麻布) · 송이버섯 등이 많이 거래되었다.

철도는 경원선이 추가령구조곡을 따라 군의 중앙을 남북으로 통과하며, 삼방협 · 삼방 · 신고산 · 용지원 · 석왕사 · 남산 · 안변의 7개 역이 설치되었다. 또한 안변에서 동해북부선이 분기되어 동부를 지나며 오계역이 설치되었다. 도로는 경원선과 병행해 1등도로가 지나며, 원산∼양양간 2등도로가 군의 동부를 지난다. 그 밖에 용지역 부근에서 철령을 넘어 회양에 이르는 2등도로가 있고 등외도로가 각 면 소재지와 연결된다.

군내 관광지로는 지릉과 삼방리의 고음폭포(鼓音瀑布) · 삼방폭포, 남대천의 용담소(龍潭沼) 언덕에 세워진 표표연정(飄飄然亭)과 옛 관문인 철령관지(鐵嶺關址), 삼방약수, 석왕사약수 등이 있다.

읍 · 면

[배화면培花面]

군의 북부 중앙에 위치한 면. 면적 43.1㎢, 인구 1만 1966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해천리이다. 본래 배화사(培花社)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배화면이 되었다. 학천이 중앙을 북동류하면서 여러 지류들을 합치며 유역에 충적평야를 형성하고 있어서 면의 대부분이 비옥한 평야지대를 이룬다.

주산업은 농업으로 토지가 비옥하고 수리시설이 잘 되어 있어 벼농사를 주로 하며, 복숭아 · 자두 · 채소 등의 과수재배도 활발하다. 경원선 철도가 중앙을 남북으로 통과하며, 1등도로가 이와 병행해 지나 교통이 편리하다. 유적으로는 신기리에 200여 개의 고분이 있는 신기리도총(新基里都塚)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3개교가 있다.

해천(蟹川) · 풍하(豊下) · 한사(閑沙) · 방화(訪花) · 천양(泉陽) · 수려(水麗) · 용연(龍淵) · 방교(方橋) · 동대(東坮) · 낙천(樂川) · 문봉(文峰) · 풍상(豊上) · 수악(秀嶽) · 옥천(玉泉) · 내원(內院) · 송상(松上) · 어은(漁隱) · 송강(松岡) · 신(新) · 지경(地境) · 수항(水項) · 신기(新基) · 상사고(上沙皐) · 하사고(下沙皐) 등 24개 이가 있다.

[서곡면瑞谷面]

군의 북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135.3㎢, 인구 1만 284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성우리이다. 고구려시대에는 원곡현(原谷縣)이었고, 신라시대에는 서곡현이었으며, 조선시대에 와서 서곡사(瑞谷社)가 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서곡면이 되었다. 서부 경계를 따라 백암산 · 대사봉(大寺峰) · 고춘봉(高春峰) 등의 높은 산들이 솟아 있고, 학천이 남동부를 통과하며 유역에 충적평야를 형성한다.

농경지가 학천 유역의 평야에 한정되어 있고, 산지가 많아 임업이 발달해 목재 · 목탄 등의 생산이 많다. 또한 학익리(鶴翼里)에는 학익금광이 있다. 교통은 배화 · 원산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나 있을 뿐이어서 불편한 편이다. 유적으로는 능리에 지릉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 간이학교 1개교가 있다.

성우(城隅) · 하일(下一) · 상일(上一) · 수성(水城) · 능(陵) · 창(倉) · 중(中) · 한천(漢川) · 하남(下南) · 포(浦) · 동산(東山) · 남평(南坪) · 중남(中南) · 상(上) · 광자(光自) · 하율(下栗) · 상율(上栗) · 용평(龍坪) · 석방(石方) · 용상(龍上) · 용현(龍峴) · 계산(桂山) · 계자(桂子) · 후(後) · 마우(馬牛) · 수암(水巖) · 오(梧) · 사(寺) · 보성(寶城) · 주암(珠巖) · 대대(大垈) · 옹점(瓮店) · 학익(鶴翼) · 상남(上南) 등 34개 이가 있다.

[석왕사면釋王寺面]

군의 중앙에 위치한 면. 면적 155.6㎢, 인구 1만 8043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오산리이다. 신라시대에 청산현(菁山縣)이었고, 고려시대에는 문산현(汶山縣)이 되었으며, 조선시대에 와서는 문산사(文山社)라 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석왕사면으로 개칭되었다.

서부에는 대사봉 · 설봉산(雪峰山) 등이 솟아 있으며, 동부에는 남대천이 북류해 서고동저의 지형을 이룬다. 주산업은 농업으로 동부의 하천유역 평야에서 쌀 · 콩 등이 생산되며, 서부의 경사지에서는 사과 · 배 · 송이버섯이 많이 생산된다. 상공업도 발달해 외지 노동자와 일본인들도 상당히 많았다. 경원선 철도가 면의 중앙을 지나고, 1등도로가 이와 병행해 지나 교통이 편리하다.

유적으로는 사기면 설봉산에 이성계가 등극하기 8년 전인 1385년에 기원소로 건립한 석왕사가 있으며, 유명한 응진전과 호지문이 있다. ‘석왕사’라는 이름은 무학대사가 장차 이성계가 왕이 될 것을 해몽한 데에서 생겨난 것이다.

또 병자호란 당시인 1637년에 본도의 근왕병(勤王兵)이 돌아오는 길에 고남산 작현(鵲峴) 아래에서 몽고병의 습격을 받아 전사한 뒤 1757년에 조정에서 위령제를 드린 곳인 검동전장(劒洞戰場)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3개교, 간이학교 1개교가 있다.

오산(梧山) · 인호(寅湖) · 주음(周音) · 하룡운(下龍雲) · 상룡운(上龍雲) · 송하(松下) · 금(錦) · 괴항(槐巷) · 구령(九嶺) · 고현(古峴) · 남산석(南山釋) · 신청(新淸) · 사기(沙器) · 탑성(塔城) · 궐(蕨) · 능화(陵化) · 노복(蘆福) · 근외(芹外) · 풍동(豊洞) · 하감(下甘) · 상감(上甘) · 신월(新月) · 인두문(引豆門) · 송촌(松村) · 통천(通川) · 후창(後昌) · 상탑(上塔) · 옥정(玉井) · 상신흥(上新興) · 장평(場坪) · 동상(東上) · 동하(東下) · 서상(西上) · 상사(上寺) · 하사(下寺) · 구용지원(舊龍池院) 등 36개 이가 있다.

[신고산면新高山面]

군의 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356.1㎢, 인구 2만 8003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신대리이다. 고려시대에는 익곡현(翼谷縣)이었으나 조선시대에 와서 위산사(衛山社)를 폐합해 위익사(衛翼社)로 개칭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신고산면이 되었다.

동부에는 풍류산 · 청하산 등이 솟아 있으며 유명한 관문인 철령이 있고, 서부에는 저두산(猪頭山, 1,340m) · 추애산 · 마상산(麻桑山, 1,126m) 등이 솟아 있으며, 남부에는 추가령 · 적목령(赤木嶺, 752m) 등이 있어 동 · 서 · 남부는 높은 산들로 둘러싸여 있다. 북동부는 비교적 큰 분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남대천이 면의 중앙을 북류한다.

산지가 많아 농업은 한정된 경지에서 소규모로 이루어지며, 임산자원이 풍부해 목재 · 목탄 등이 많이 산출된다. 또한 대규모의 대령금광산(大嶺金鑛山)이 개발되어 취업인구가 많으며, 신고산역은 교역중심지가 되고 있다. 경원선이 중앙을 남북으로 통과하며, 이와 병행해 1등도로가 지나고, 철령을 지나 회양에 이르는 2등도로가 남동부를 지나 교통이 편리하다.

유적으로는 금기리에 태조비 한씨의 탄생지에 1824년(순조 24)에 건립한 왕후강탄비(王后降誕碑)가 있으며, 삼방천변 언덕 위에 태봉궁(泰封宮)이 있다. 또 병자호란의 유적인 삼관지(三關址)가 있는데, 함경남도와 강원도와의 도계인 추가령에 1관지, 삼방 북쪽에 있는 경원선 철로변에 2관지, 재천리에 3관지가 있다. 성남리에는 200여 개의 고분이 있는 성남리도총(星南里都塚)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2개교, 간이학교 3개교가 있다.

신대(新垈) · 죽근(竹根) · 학소(鶴巢) · 번지(蕃之) · 산양(山陽) · 종자(種子) · 복곡(洑谷) · 창평(昌坪) · 내평(內坪) · 상수청(上水靑) · 하수청(下水靑) · 금기(琴基) · 탄부(炭釜) · 신점(新店) · 세포(細浦) · 하주천(下舟川) · 고명(古明) · 상주천(上舟川) · 서(鋤) · 석교(石橋) · 재천(載川) · 삼방(三防) · 청학(靑鶴) · 상사현(上沙峴) · 하사현(下沙峴) · 강성(江城) · 위북(衛北) · 하부평(下富坪) · 상부평(上富坪) · 용지원(龍池院) · 사(砂) · 하가동(下佳洞) · 상가동(上佳洞) · 외평(外坪) · 성북(星北) · 성남(星南) · 구미(九味) · 위남(衛南) · 위동(衛東) · 하일온(下日溫) · 상일온(上日溫) · 고산(高山) 등 42개 이가 있다.

[신모면新茅面]

군의 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213.5㎢, 인구 9,419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김천리이다. 본래 신모사(新茅社)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신모면이 되었다.

동부에는 황룡산, 남부에는 장사봉(將師峯, 971m)이 솟아 있으며, 이들 사이에 기대령(旗對嶺, 702m) · 도납령(道納嶺, 661m) · 박달령(朴達嶺, 770m) 등의 고개가 있어 강원도와의 통로가 된다. 동대천이 면의 중앙을 관류하며, 북서부에는 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주산업은 농업이나, 농경지가 한정되어 있어 부녀자들의 양잠 · 방직 등 부업이 활발하며, 산지에서는 목재가 산출되고, 목탄제조가 이루어진다.

안변∼회양간 도로가 면의 중앙을 통과하고 있을 뿐 교통이 불편하다. 유적으로는 신곤리황룡산 아래에 신라 효성왕 때 창건한 보현사(普賢寺), 별산하리소굴산(小窟山)에 영취사(靈鷲寺)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3개교가 있다.

김천(金泉) · 내원산(內元山) · 하어지(下漁池) · 양지(陽址) · 두남(斗南) · 신흥(新興) · 율(栗) · 중어지(中漁池) · 상어지(上漁池) · 효자(孝子) · 공곡(公谷) · 석변(石邊) · 수남(水南) · 신성(新城) · 신동(新洞) · 이원(利原) · 별산하(別山下) · 신평(新坪) · 양명(陽明) · 모창(茅倉) · 공수전(公須田) · 문곡(文谷) · 덕산(德山) · 사근(沙根) · 구절(九節) · 판기(板機) · 하다전(下多田) · 신곤(新坤) · 상다전(上多田) · 하령(下靈) · 상령(上靈) · 차산(遮山) · 인악(仁岳) · 천내(泉內) 등 34개 이가 있다.

[안도면安道面]

군의 북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82.8㎢, 인구 1만 357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중평리이다. 본래 안도사(安道社)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안도면이 되었다. 동부는 산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중앙에는 동대천이 흐르고, 서부에는 남대천이 북류해 동해로 유입되어 동고서저의 지형을 이룬다. 동부 산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비옥한 충적지로 이루어져 있다.

주산업은 농업으로 남대천 하구의 비옥한 충적평야는 수리시설이 잘 되어 있어 벼농사를 주로 하며, 서부 산지에서는 사과 · 배의 생산이 많다. 또 해안지방에서는 수산업도 이루어진다. 철도 동해북부선이 면의 중앙을 통과하며, 문천∼통천간 국도가 해안을 따라 지나고, 가까운 원산항의 이용이 용이해 수륙교통이 모두 편리하다.

유물 · 유적으로는 낭성리에 이성계가 군 만호로 부임했던 곳으로 1509년(중종 4)에 폐한 낭성포영(浪城浦營)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 간이학교 1개교가 있다. 중평(中坪) · 비산(比山) · 어운(於雲) · 대와(大瓦) · 하와(下瓦) · 상덕(上德) · 미덕(味德) · 용운(龍雲) · 장현(長峴) · 가평(柯坪) · 오계(梧溪) · 월포(月浦) · 상마(桑麻) · 낭성(浪城) 등 14개 이가 있다.

[안변면安邊面]

군의 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65.9㎢, 인구 1만 4349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문내리이다. 본래 학산사(鶴山社)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학산면이 되었고, 1931년에 안변면으로 개칭되었다.

동부는 황룡산을 비롯해 높은 산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서부는 남대천 유역의 평야로 동고서저의 지형을 이루고, 남대천이 군의 서부를 북류한다. 주산업은 농업으로 남대천 유역의 평야는 수리시설이 잘 되어 있어 벼농사가 이루어지며, 동북부의 경사지에서는 사과 등 과수재배가 활발하다. 또한 안도면 · 배화면까지 시장권을 가지고 있어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도 많다.

경원선 철도가 지나며 여기에서 동해북부선이 분기되고, 평강∼원산간 국도가 지나 교통이 편리하다. 유적으로는 홍문리에 신라 효성왕 때 창건했다는 안변가학루(安邊駕鶴樓)가 있고, 효성왕 때 축조했다는 학성산성(鶴城山城)이 비운령(飛雲嶺)으로 가는 길에 있다. 안변국민학교 교정에는 조선시대 목조건물이 남아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2개교가 있다.

문내(門內) · 홍문(紅門) · 옥(玉) · 비운(飛雲) · 과남(果南) · 학성(鶴城) · 미현(美峴) · 조전(棗田) · 상화산(上花山) · 중화산(中花山) · 하화산(下花山) · 두득(斗得) · 외석교(外石橋) · 문외(門外) · 영춘(永春) · 내석교(內石橋) · 탑(塔) · 곽하(郭下) · 송학(松鶴) 등 19개 이가 있다.

광복 후 변천

강원도(북한) 북동부에 있는 군. 동쪽은 통천군, 서쪽은 법동군, 남쪽은 고산군 · 회양군, 북쪽은 원산시와 동해에 면해 있다. 동경 127°28'∼127°41', 북위 38°51'∼39°10'에 위치하며, 면적 약 696㎢, 인구 7만 3000여 명(1996년 추정)이다.

본래 함경남도에 속해 있었으나 8·15광복 당시 강원도가 남북으로 분단되면서 1946년 9월 북한의 북부 강원도로 이관되었다. 1952년 12월 행정구역 개편 때 신고산면의 일부는 세포군으로, 다른 일부는 고산군으로 이관되었으며, 면 행정단위를 폐지하고 이 단위로 분할 통폐합해 군 행정구역을 개편하였다.

1954년 10월 중앙리 · 옥리 · 중평리 · 봉산리 · 송산리를 신설하였다. 1963년 12월 규오리를 화산리로 개칭하고 1967년 10월 주암리를 폐지해 칠봉리에 통합하고 용대리를 용대노동자구로 변경했으며, 1978년 8월 중앙리를 앞강노동자구로 바꾸었다.

행정구역은 현재 안변읍과 앞강 · 용대(龍大) 2개 노동자구, 옥(玉) · 비산(比山) · 육화(六瓦) · 과평(果坪) · 중평(中坪) · 오계(梧溪) · 상음(桑陰) · 월랑(月浪) · 사평(沙坪) · 학천(鶴川) · 봉산(峰山) · 배양(培養) · 배화(培花) · 송산(松山) · 수락동(水洛洞) · 남천(南川) · 수상(水上) · 상자(上慈) · 칠봉(七峰) · 용성(龍城) · 동포(東浦) · 풍화(豊花) · 천삼(川三) · 화산(華山) · 남계(南溪) · 미현(美峴) · 모풍(茅豊) · 신화(新花) · 영신(靈新) · 문수(文水) · 삼성(三成) · 내산(內山) 등 32개 이로 되어 있다. 군 소재지는 안변읍이다.

자연환경

이 군은 동남부와 서남부가 비교적 높은 산지로 되어 있으며, 북부 동해지역으로 갈수록 낮아진다. 동부는 태백산맥의 북단지역으로 양새봉(802m) · 황룡산(1,268m) 등이 솟아 있으며, 서부에는 백암산(1,225m), 남부에는 장수봉(972m) 등이 솟아 있다.

군의 중심부를 남대천 · 금화강 · 학천강이 북쪽 동해방향으로 흐르고, 유역에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해안선은 단조로운 편으로 앞바다에는 우미도가 있다. 주요 기반암은 화강편마암 · 석회암 · 화강암이며, 토양은 갈색산림토가 대부분이고 충적토가 약간 분포되어 있다.

기후는 연평균기온 10.5℃, 1월 평균기온 -3.3℃, 8월 평균기온 23.1℃이며, 연평균강수량은 1,207㎜이다. 첫서리는 10월 12일경, 마감서리는 4월 14일경에 내린다. 산림은 군면적의 60%이며 주로 소나무 · 참나무가 자라고, 호도나무 · 잣나무 · 분디나무가 섞여 있다. 산림에는 각종 산과일과 산채, 약초가 많으며 노루 · 꿩 등이 서식한다.

[인문환경]

농경지는 군면적의 약 25%이며, 이 중 논이 80%를 차지한다. 안변평야를 중심으로 농업이 발전했으며, 쌀을 가장 많이 생산하고 다음이 옥수수 · 콩 · 밀 · 보리 등이다. 원산시에 인접한 교외농업지역으로서 배추 · 무를 비롯한 채소와 사과 · 배 · 감 · 포도 · 복숭아 등 각종 과일이 재배된다. 그 중 안변배는 이 지방의 특산물로 알려져 있으며, 천삼리의 감은 전국적으로 알려져 있다. 가축은 돼지 · 닭을 기본으로 소 · 염소 · 토끼 등이 사육된다.

근해에서는 명태 · 멸치 · 가자미 · 도루묵이 많이 잡히며, 남대천 및 그 지류에서는 은어 · 연어 · 송어 · 황어 · 빙어 · 숭어 · 잉어 등의 담수어가 잡힌다. 광업은 금광인 서학광산이 있고, 모풍리에 망간광산이 있다.

공업은 건재공업을 기본으로 각종 타일을 생산하는 안변요업공장이 있으며, 식료품 · 지물 · 일용품 · 직조 · 피복공장 등 소규모 지방공장들이 있다. 군의 중심부를 강원선(고원∼평강)이 지나며, 원산 · 고성을 연결하는 도로가 있다.

영신리보현사 북쪽 계곡에는 장진폭포가 있다. 유적으로는 안변읍에 가학루와 학성산성터가 있고, 용성리와 용대노동자구에는 고구려시대의 고분군, 수상리에는 이성계의 증조부 무덤인 익왕지릉이 있다. 학성산성터는 738년(신라 효성왕 2)에 축성한 것으로 봉수대 · 성황당터가 남아 있으며, 영신리에 보현사가 현존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안변고등농업전문학교 · 안변고등중학교 · 천삼고등중학교 등이 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고려사』
『태종실록』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안변읍지』
『함경남도지』(함경남도지편찬위원회, 1968)
『북한문화재실태와 현황』(문화공보부문화재관리국, 1985)
『인물의 고향』-북한편(중앙일보사, 1991)
『북한지지요람』(통일원,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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