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초인간적 또는 초자연적 힘을 지닌 신앙 대상을 의미하는 신(神)이다. 보이지 않는 중에 존재하며, 불가사의한 능력을 가지고 있고, 인류에게 화복을 내린다고 믿는 신령이다. 한국 전통사회의 경우 신이란 민속신앙에서 숭앙되어 축원과 굿을 바치는 영험 있는 신비한 존재이다. 산이 신들의 큰 집이라면 마을은 그들의 마당이고 집은 그들의 안방 같이 여기는 등 수없이 많은 신들이 존재했다. 이러한 신들은 인간의 사고가 확장되고 우주질서를 인식하면서 하나의 원리로 통일된 최고신 혹은 초월신 개념으로 통합되는데, 인도의 브라만, 유대의 야훼신, 중국의 상제 등이 그것이다.
명명(冥冥)한 중에 존재하며, 불가사의한 능력을 가지고 있고, 인류에게 화복(禍福)을 내린다고 믿는 신령이다. 19세기의 학자들 가운데 신이란 무엇이냐는 문제로 그 신의 기원을 탐구한 사람이 많다. 멜라네시아 원시인들의 종교를 연구한 코드링턴(Codrington,R.H.)은 그들의 원시적인 삶 속에서 지배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어떤 초자연적인 힘이라고 보았다. 이 초자연적인 힘을 코드링턴은 마나(mana)라고 불렀는데, 이 힘은 어떤 인격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인간에게 이롭게 또는 해롭게 작용할 수 있다.
이 힘은 일반적인 물리적 힘과도 구분되는 것으로 선 · 악 중 어느 쪽으로도 작용하고, 이 힘을 소유하는 자는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마나는 어떤 것으로 고정될 수 없고, 거의 모든 사물에 들어가 있을 수 있으며, 물이나 돌, 짐승의 뼈를 중간 매개로 하여 그 힘을 발휘할 수도 있고, 정령의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다. 이 마나의 관념에서는 최소한 어떤 주술적인 힘이나 생명관이 있으므로 종교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를 이루고 있고, 이 기본적인 힘에 관한 관념이 발전하여 여러 신들의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한편, 코드링턴이 마나설을 이야기하기 전에 타일러(Tylor,E.B.)는 이른바 애니미즘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타일러는 원시인들도 인간적인 면에서는 현대의 인간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보면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을 통해 영(靈)의 세계를 유추할 수 있다고 한다.
첫째, 원시인들도 현대인과 똑같이 삶과 죽음의 차이를 구별할 줄 알았다. 죽은 사람은 산 사람이 가지고 있는 무엇인가를 결여한 상태인데, 그 무엇은 생명 또는 ‘애니마’라고 할 수 있다. 그 무엇(생명)이 죽음 뒤에 육체에서 분리되어 떠나가는 것이라고 한다.
둘째, 원시인들도 현대인과 똑같이 꿈이나 환상 속에서 자기가 육체를 떠나 분리되는 경험을 했다는 것이다. 꿈속에서 나는 미국으로 건너가 친구와 식사를 할 수도 있는데, 나의 육체는 한국에 그대로 있다. 분명히 꿈속에서 나의 육체를 떠나간 무엇인가를 전제하지 않을 수 없고, 그것은 육체와 구별되는 영이라고 하였다.
원시인들은 이 같이 두 가지 현상을 응시하면서 모든 사물은 물질적인 측면과 영적인 측면이 종합되어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특히, 육체를 떠난 영을 정령(spirit)이라고 하는데, 이 정령이 발전하여 여러 신격(deity)들이 생기고 마침내 신(god)을 믿게 되었다고 한다. 또 독일의 언어학자 뮐러(Muller,M.)는 자연물이나 천체 현상을 종교관념으로 숭배하는 것에서 신의 기원을 찾았다. 그는 많은 신들의 이름을 조사해 보고 대부분이 자연현상과 관련되고 있는 점에 주목하였다. 그래서 그는 자연현상이야말로 최초로 숭배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 틀림없다고 믿고, 모든 신들은 바로 그러한 자연현상을 의인화해서 부른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밖에도 토테미즘이나 조상 숭배에서 신의 기원을 찾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학자들은 신의 기원을 이상과 같은 어떤 ‘유일한’ 원인에서 찾을 수는 없고, 아무리 원시인들이라 할지라도 종교 경험이 처음부터 극히 다양한 원천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데 일치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종교의 기원을 단일한 원인에서 찾을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신들의 모습도 인간의 지적 수준이나 사회적인 발전과 어느 정도 상응하여 그 성격이 결정되고 있다는 데 의견을 일치하고 있다. 그런 각도에서 신들의 유형을 보면 씨족신적인 면이 오래되었고, 사회제도가 발달하고 변천함에 따라 각 사람의 개인의식과 기능과 신분 등이 분화 · 발전하는 것과 동시에 여러 기능신(functional god)이 등장하게 된다. 옛날에는 한 신에 모두 귀착되고 있던 기능들이 분화하여 씨족신인 아버지신 하나로 합쳐지지 않고 천공(天空)의 신, 바다의 신, 바람의 신, 낙뢰의 신, 어업의 신…… 등으로 나타난다.
신의 형태 중에서 또 하나 두드러진 것은 자연신(nature god)의 형태이다. 자연신이라는 것은 글자 그대로 자연현상의 어느 특정한 면들이 신격화되어 숭배되는 것을 말한다. 자연현상의 모든 면들이 신격화되는 것이 아니라, 그 중에서도 인간생활과 관계가 깊고 이해관계가 많은 면들이 신격화되는 경향이 있다. 농경이 큰 비중을 차지했던 우리 나라에서는 대지모신(大地母神)이 특별히 신격화되어 숭배되었고, 인도차이나반도의 여러 민족 사이에서는 태양신, 노르웨이에서는 항해와 관련하여 바람의 신이 특별히 중요시되었다. 인도의 토다족(Toda族)처럼 젖소 사육을 주된 생업으로 하는 민족에서는 소를 신성시하였고, 아이누족은 곰을 신성시하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형태는 최고신(high god)에 대해서이다. 시간이 발달함에 따라 인간은 한정된 세계관으로부터 무한한 우주관으로 생각을 확대하게 되고, 그 세계를 지배하는 법칙이나 질서를 인식하게 된다. 만유(萬有)를 통일하고 거기에 일정한 질서를 부여하려는 경향이 나타나게 된다. 이와 함께 신들의 세계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우선 잡다하게 많은 신들이 하나의 원리로 통일되는 초월신이 중요시된다. 사실 전 시대에는 신들이 그 기능이나 형태에서 서로 다르고 신들 상호간에도 어떤 절대적인 연관이 없었으며, 오히려 저마다 독자적인 기능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의 지배적인 원리에 의해 신들의 세계가 정비됨에 따라 최고신의 관념이 생기게 되는데, 인도의 브라만, 유대의 야훼신, 로마의 주피터, 중국의 상제(上帝), 페르시아의 미트라 등은 모두 그러한 최고신들이다. 물론, 이러한 최고신의 성립은 인간의 사고가 확대되는 것과 일치하지만, 정치 · 경제 · 사회적인 발전과도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한국의 민속신앙에서 신(神)이라는 말은 매우 다양하게 쓰이고 있다. 그것은 대체로 영어의 gods(God가 아닌)나 deities와 맞먹을 수 있는 개념이다. 민속신앙에서 숭앙되어 축원과 굿을 바치는 효험 있는(영험 있는) 신비한 존재가 곧 신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정의를 위한 최소한의 정의에 불과하다. 한국인은 여러 종류의 수많은 신을 믿어 왔다. 자연신과 인격신이 공존할 뿐만 아니라, 서로 겹쳐진다. 절대적인 타자로서 피안에 있는 신이 의인화되어 인격신으로 의식되는가 하면, 실존했던 사람이 죽은 뒤에 그 영혼이 신격화되어 인격신으로 의식되기도 한다. 애니미즘이나 영혼 숭배, 그리고 사령(死靈) 공포도 우리들이 쓰는 신이라는 말 속에 포함되어 있다.
한국의 자연은 자연대로, 마을은 마을대로, 그리고 또 집안은 집안대로 ‘만신전’을 이루고 있었다. 산이 신들의 큰 집이라면 마을은 그들의 마당이고, 집은 그들의 안방 같은 것이었다. 산에 산신이 있는 것 외에 나무와 바위의 신령이 있고, 약수라도 흐르면 ‘물할미’라는 이름의 수신(水神)이 있기도 하였다. 땅의 지신(地神)과 논밭의 용신도 지적되어야 한다. 마을에서는 수호신이 골매기(골맥이)가 으뜸이기는 했으나 신격은 일정하지 않았다. 산 가까운 마을이면 산신이 동신을 겸했으나, 바다 가까운 어촌에서는 동신과 해신(海神) 또는 배서낭(바다서낭)을 따로 섬겼다. 그런가 하면 원령(怨靈)이 동신으로 받들어지는 경우가 있었다. 동신인 산신은 대체로 호랑이와 더불어 있거나, 아니면 호랑이의 화신으로 여겨지기도 하였다. 다시 집안에는 업주 · 터주 · 성주 · 조왕 · 조상신 등이 모셔져 있었다. 이 가운데 업주는 오래 집안에 묵고 있는 뱀 따위의 동물로 표상되었다.
한국의 민속적 신앙 행위는 대체로 마을과 집안으로 양분되어 나타난다. 마을이라는 공동체적 신앙 행위와 가족 단위의 신앙 행위라는 양분론이 있어 왔던 셈이다. 그러나 이 둘은 대립적이면서 서로 상보하는 관계에 있었다. 집안 운세가 공동체 전체의 운세에 따라 좌우된다고만 해서 둘이 비로소 연관성을 지니고 있었다. 마을굿을 직접 한 가정을 위해 활용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의 민속신앙 현장에서는 앞에서 말한 양분론을 두고 한국인의 신을 이해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다.
마을굿이나 별신굿에서 섬기는 마을신(동신 · 당산신 · 서낭신)이 한국인의 가장 큰 신이다. 일부 지방에서 쓰이는 골매기라는 말이 ‘고을막이’, 곧 마을 수호신을 의미하고 있듯이, 마을신은 예외 없이 골매기이다. 신체가 자연의 돌이나 나무로 표상되는가 하면, 예외적으로 큰 짚신짝 혹은 목각신상일 경우도 있다.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숲에 에워싸인 신목(神木)과 신석(神石)의 짝이 이들 골매기신을 위한 성역이 된다. 마을신이 수호신이라면 당연히 풍요의 힘, 잡귀를 쫓는 힘, 재앙을 물리치는 힘 등이 그의 권능으로 존중되었다. 마을굿이 진행되는 동안, 암수 두 서낭이 결합함으로써 마을신의 풍요의 힘이 적절히 과시되었다.
수호신이라는 점에서는 집안신도 다르지 않다. 재산과 가운을 지키고 잡귀와 재앙을 막아내는 액막이 구실을 하는 권능이 가신들에게 있었다. 이른바 삼신은 안방의 신으로서 자손의 번영을 도맡고 있었다. 다 같이 수호신 곧 ‘막이의 신’이되, 마을신은 비교적 권능이 다양해서 혼자 전지전능한 경지에 다다를 수 있었으나, 가신은 철저하게 분업화된 전문직능의 신들이었다. 마을신은 언제나 마을에 깃들여 상주하고 있는 신은 아니었다. 정해진 날 모셔져 굿을 올리고는 다시 원자리(하늘이나 숲)로 되돌아가게 마련이다. 주기성이 있는 신이었던 셈이다. 이와는 달리 집안신들은 언제나 집안에 모셔져 있고, 집안에 붙박혀 있다고 믿었다. 가신들 가운데 어느 하나가 나간다는 것은 집안운세가 나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달리 마을신은 마을 안의 여성들도 참여하는 굿에 의해 모셔졌으나 그 중요한 주관자, 예컨대 제주(당주)나 화주(도가)는 주로 남성들이었다. 지방에 따라 ‘안당주’ · ‘밧당주’라는 이름이 남아 있기는 하나, 그것이 지금은 굳이 여성과 남성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이에 비해서 가신은 주로 여성들에 의해 모셔진다. 이 경우 가정주부들이 가족 안의 비전문적 무당과 같은 자리를 차지하게 되기도 한다. 물론 남성이 관장하는 유교적 조상 숭배 행사인 제사는 예외이다. 마을신은 바깥신이고 집안신은 안신이어서 여기서 제주가 남녀로 달라지는 원인을 찾을 수 있겠으나, 그것이 원인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유교적 원리에 의해서만 진행되는 마을굿이 아니라도, 말하자면 무속적 원리에 의해 치르는 마을굿이라도 주도적인 구실을 하는 사람은 모두 남성이라는 사실에 유념해야 할 것이다.
마을신과 가신의 대비성(對比性)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마을신은 무당과 당주를 거쳐 공동체 구성원 전원에게 신명을 준다. 마을사람들은 무당이나 당주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신지핌을 경험한다. 그리하여 굿판과 놀이판이 함께 어울려 마을사람은 누구나 신바람을 피운다. 각자 도취를 경험하면서 마을 안은 탄력과 활력이 넘치게 된다. 그러나 가신에게는 비념, 곧 손빌이를 바치는 게 원칙이다. 고요한 치성드리기, 정성 바 기로 소원을 이루려고 한다. 주부가 정화수를 떠놓고 비는 것은 가신을 섬기는 전형적인 장면의 하나이다.
마을신이나 가신이나 보호자로서의 권능을 지니고 있었으나, 그들에 관련된 금기를 어기고 부정을 저지르면 오히려 이 신들에게서 저주와 재앙을 받게 된다. 동티가 오르고 살을 타게 된다. 그들은 하나같이 잠복한 공포의 신들이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항시 그들을 ‘희고 착한 신’의 상태로 머물게 하기 위해 마음을 썼다. 숭앙의 뒤안에는 공포의 그늘이 짝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각종 금기의 그물이 마을신이나 가신을 에워싸서 사람들을 구속하고 제약하는 힘을 지니고 있었던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마을신이나 가신은 크고 작은 공동체 구성원이 그들 자체로서 주동적으로 모시는 신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들을 모시는 데는 모시는 사람의 직업적 전문성은 요구되지 않고 있다. 이에 비해 무속신앙의 신들은 무당을 매개로 모셔 온 신들이다. 마을신이나 가신은 마을사람 및 집안 사람들에 의해 모셔지기만 하는 데 비해, 무속신은 무당을 부리기도 하지만 무당에 의해 부려지기도 한다. 무당의 권능은 이중적이 된다. 신을 모셔서 신과 동화되는 권능이 있는가 하면, 신을 부려서 그의 뜻에 따르게 하는 권능도 지니고 있다. 빌고 축원하면서 무당의 뜻을 이루느냐 아니면 겁을 주어 위협하면서 신을 무당 뜻에 따르게 하느냐, 혹은 달래고 무마해서 말을 듣게 만드느냐 하는 차이가 있기는 해도 무속신은 무당에 의해 부림을 당하기도 하는 존재이다.
군웅 · 창부 · 대감 · 말명 · 조상 등 여러 신명은 무당의 몸에 실려 있는 몸주, 곧 무당 자신의 보호령과는 달리 무당에 의해 부려질 수 있는 신들이다. 물론, 신을 부리는 세 가지 방법은 서로 성질이 다르다고 해서 따로따로 활용되는 것은 아니다. 동시에 복수의 방법이 활용되기 때문이다. 축수와 무마와 위협이라는 신부림의 세 방법은 신과 인간 사이의, 혹은 신과 무당 사이의 힘의 높고 낮음에 따라 결정된다. 물론 신이 항상 인간보다 우월한 힘을 가진 것은 사실이나, 인간에 대해 어느 신이 보다 더 위협적이고 무서운가, 또는 권능이 큰가 하는 정도가 신들의 종류에 따라 상대적으로 결정된다. 그리고 신들의 선악도 세 방법을 상대적으로 선택하고 어느 것에 더 비중을 두느냐를 결정하는 열쇠가 된다.
무속신앙의 신과 마을신, 그리고 가신은 한국 민속신앙의 3대 신이다. 가신 가운데 조상신이 유교적 신앙의 대상이 될 때 워낙 커지는 비중을 고려한다면, 유교적 신앙체계 속에서의 조상신을 따로 잡아서 4대 신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무속신앙의 신은 특정한 시간 없이 필요할 때 일시 숭앙된다. 위기가 생겼을 때 일시적으로 믿는다. 이에 비해 마을신은 정해진 시간에 일시 집중적으로 신봉된다. 무속신에 대한 믿음은 산발적이다. 한편, 가신들은 특정한 날에 일시 각별하게 섬겨지면서도 1년 내내 모셔 받들어진다. 조왕 주발이 언제나 부뚜막에 놓여 있는 것은 그 좋은 보기이다. 시간을 순환하는 큰 원으로 잡는다면, 집안신은 원상의 어느 지점에서나 신봉되나 무속신앙은 그 선상의 몇 개 점에서만 일시적으로 베풀어진다. 또한 마을신은 일 년에 한 번 또는 몇 년마다 한 번씩 일정한 간격을 두고 주기적으로 신봉된다. 이 경우가 가장 구심적이고 집약적이다.
[그림]에서 보듯이, 나선이 밖에서 안으로 들어갈수록 점의 수효는 적어진다. 이것은 신이 신봉되는 빈도를 나타낸다. 안으로 갈수록 커지는 점은 신이 신봉되는 행사의 크기와 집약도를 나타낸다. 바깥의 큰 원은 순환하는 원으로 포착된 시간이다. 굿과 놀이의 복합은 바깥으로 나올수록 얇아진다. 가신에서는 놀이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굿이라기보다 비념이나 치성 등 주부가 혼자서 정적으로 행하는 기축 행위가 주가 된다. 또한 믿음 행위에 따르는 무당 아닌 일반 사람들의 신명은 겉으로 나올수록 얕아진다. 그것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신명도와 신바람의 정도가 높아지는 것을 의미하거니와 일반 사람들은 간접적으로나마 신과의 융합을 안으로 들어갈수록 농도 짙게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놀이의 정도가 이에 비례하고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인간과 더불어 신이 노는 굿판의 농도가 진해지는 셈이다.
신은 대부분 영적인 존재이다. 죽은 자의 영혼이 신격화되어 신령이라는 관념이 생겨나듯이, 자연신마저도 애니미즘적인 영혼을 지닌 것으로 믿어 역시 신령으로 불리고 있다. 산신이라는 말이 있는가 하면, 산령이라는 말이 있고, 아울러 산신령이라는 복합어도 존재하고 있다. 김유신(金庾信)이 죽어 천신이 되고, 석탈해가 사후에 산신이 되었다고 할 때도 천신령 및 산신령이라고 바꾸어 불러도 좋을 것이다. ‘신 · 영’ 복합은 여러 경우에 확인될 수 있다. 일반인의 경우에도 원령이 원신으로 모셔지거니와, 이 경우에도 ‘신 · 영’ 복합이 인정될 수 있다.
신 · 영 복합은, 인격신의 경우 한국인이 믿는 신들이 사령과 깊은 연관을 지니고 있는 것에 대하여 말하게 된다. 귀신이라고 불리고 있는 것들 가운데 대부분은 신성하거나 거룩하다기보다 해괴하다는, 또는 해롭다는 징표를 지니고 있는 사령들이다. 액신(厄神)이라는 말이 더러 쓰이고 있기는 하나 악귀 · 마귀 · 잡귀라는 말은 그보다 훨씬 더 자주 또 흔하게 쓰인다. 귀신은 신과 달라 각 · 잡 등의 관형어를 지닐 수 있는 속성을 가지고 있는 데 대하여 시사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신에 대한 관념은 『삼국유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기를 찾을 수 있다.
『삼국유사』에 등장하고 있는 신비체는 혼선을 빚을 만큼 다양하다. 신 · 신령 · 귀신 · 영 · 혼 · 신혼 등의 개념만 해도 서로 중복이 있어 때로는 가름하기 힘들거니와, 신 하나만 가지고 문제삼을 때도 천신 · 산신 · 지신 · 악신(岳神) · 파신(波神) 등과 같이 다양한 복합어를 이루고 있어 결코 단순하지 않다. 그리고 이들이 대체로 애니미즘적인 자연신으로 보이기는 하나, 김유신이 사후에 천신(天神)이 되고 탈해가 죽은 뒤에 산신이 된 사례에 더하여, 건국신화에서 천신들이 하강하여 인군이 된 사례까지를 고려에 넣는다면, 이들을 일괄적으로 자연신으로 보기는 힘들다.
『삼국유사』에 이미 쓰이고 있는 신인(神人)이라는 말을 활용한다면 앞에 보인 천신 이하 여러 신은 부분적으로 자연신인이라고 긍정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달리 계신(鷄神) · 웅신(熊神) · 용신(龍神) 등 동물신이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들 신이 동물 그 자체의 신격화인지, 아니면 동물의 수호령인지를 엄격히 가르기는 힘들다. 혁거세신화의 천마(天馬), 동명왕신화의 비둘기들은 이들 동물신에 준한 존재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다만, 이들과 관련하여 많은 토테미즘에 대한 논의가 있기는 하나, 워낙 토테미즘 개념이 환상적일 만큼 다양하다는 장벽이 있는 데다가, 그 가운데 어느 기준을 채용한다고 해도 연역의 필연성이나 귀납의 개연성이 인정될 만큼 주어진 기록들의 기술이 충분하지 못하다는 장벽이 있어 토테미즘 논의는 쉽게 이루어질 것 같지 않다.
천신은 하강하여 인군이 되어 지상의 통치자가 된다. 그런 뜻이 천신인(天神人)이라는 말에 포괄될 수 있다면 이 말은 정치주술적 복합(政治呪術的複合)을 함축하고 있다. 제정일치적 관념의 표현이 거기 있음은 말할 나위가 없으나, 천신인은 다시 그것이 신인복합(神人複合)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한국인의 신관에서 매우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 건국신화의 주인공들은 정치주술 복합과 함께 ‘신인 복합’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환인(桓因)을 인간화할 수 없는 천신으로 본다면, ‘천신(天神)>신인>인(人)’이라는 세 겹의 계층이 추출되고, 거기서 신인이 개념의 내포상 천신과 사람의 중개항임을 이야기해도 좋을 것이다(여기서 >표는 대소 또는 상하를 가리킴.).
한편, 이규보(李奎報)가 전해 주고 있는 「동명왕신화」 가운데는 신과 선(仙)의 대립이 명백하게 기술되어 있다. 동명왕이 신이라는 징표로 표현되어 있고 그 경쟁 대상인 비류(沸流)의 송양왕(松讓王)이 선이라는 징표를 갖고 서로 맞서 있다. '천신>신인>인'을 '천신→신인→인'과 같이 일방통행으로 그릴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인간 또한 사후에 천신으로 또는 신인으로 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천신> ⇄<신인>⇄인이라고 그릴 수 있게 된다. 물론, 인간 가운데 누구나 사후에 천신화나 신인화를 이룩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살아 있는 동안 또는 탄생시에 이미 신비로운 징표를 지닌 인물이라야 그 같은 변신이 가능하다. 살아서 잠재된 신격이 사후에 구현되는 것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천신과 신인과 사람의 관계는 [그림]과 같은 순환하는 원형으로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천신이 비록 세속사회의 최고 통치자가 되면서 정의의 원리, 권위의 힘이 되기는 하나 이와 같은 순환 원을 고려할 때, 쉽사리 초월자 또는 초자연적인 존재로 단정해버리기는 힘들다. 이 순환 원이 우주공간에 투영된다면 하늘은 지상세계에서 동떨어진 절대적 피안이 아니고, 지상세계와 내왕하며 거래가 가능한 공간이 된다. 다만, 계층성을 가진 공간이다. 곧 하늘 위로 올라갈수록 높고 거룩한 데 비해 지상세계는 그렇지 못한 것이 바로 계층성이다. 이런 뜻에서, 비록 천신일지라도 초월적이 아니며 절대적인 존재라고 부르기 힘들게 된다. 사령이 신격화되면 신령이라고 부른다. 영혼이 큰 신이라서 영신(靈神)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신인 복합’이라는 개념과 함께 ‘영 · 신복합’도 한국인의 신관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따라서 이 땅에서는 신비주의와 영혼체험(spiritualism)을 엄격하게 구별할 수 없게 될 뿐더러 주술적인 비의(祕儀, occultism)도 신비체험 바깥에 밀어낼 수가 없다. 한국의 민속신앙에서 신에 대한 믿음과 영에 대한 믿음을 따로 가르기란 매우 힘들 것이다. 한국인들이 ‘신령님네요’라고 부를 때 거기에는 자연신 · 인격신 · 사령 일체가 다 포괄되어 있는 것이다. 이 [그림]이 보여주듯이 영혼은 어느 경우에나 전제되고, 또 실제로 어느 것과도 관련을 맺고 있다. 이 [그림]은 아울러 영혼이 신에 바치는 신앙의 가장 깊은 핵에 자리잡고 있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시사한다. 이처럼 한국인의 종교적 체험 내지 신비체험 속에서 신과 귀가 다 같이 영과 복합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생령(生靈)과 사령(死靈) 양쪽에 걸친 믿음, 특히 사령의 권능에 붙여진 믿음이 한국인의 신관을 형성하는 데 있어 핵심이 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유교적인 의미의 신은 대체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고대 문헌에 나타난 신으로 흔히 상제(上帝) 혹은 천(天)으로 표현된 인격신을 가리키고, 둘째는 주자(朱子)를 비롯한 성리학적인 의미에서의 신을 가리킨다.
첫째, 인격신적인 것도 대단히 다양하여 유형화하기 어려우나 대부분의 고등종교의 신들이 가진 기능을 모두 가지고 있다. 신은 인간에게 복을 내려주어 돕는 자로 나타나는 면이 있다. 『상서(尙書)』 홍범(洪範)에 보면 “오직 하늘이 하민(下民)을 은밀히 돕는다[惟天陰隲下民].”는 말이 그것을 잘 나타낸다. 『시경』 대아(大雅)에도 하늘의 도우심을 언급한 대목이 보이는데[於萬斯年 受天之祜], 이것은 중국인들에게는 보편적으로 인식된 내용이었다. 하늘은 인간에게 복을 내릴 뿐만 아니라 재앙을 통하여 징벌하는 무서운 존재이기도 하다. 특히 정치에서 백성들의 원한을 사는 경우에는 그것이 하늘에 사무쳐 반드시 재앙을 내린다. 『춘추좌전』에서 “폐읍에 실정하면 하늘이 재앙을 내린다[敝邑失政 天降之災].”는 표현이 대표적이다(昭公 18).
인격신은 집권자에게 정치 권력을 부여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천명(天命)으로 표현된다. 『맹자』에 보면, “만장이 물어 가로되, ‘요임금이 천하를 순임금에게 물려주었습니까?’ 맹자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아니다, 천자는 천하를 사람에게 줄 수 없느니라.’, ‘그렇다면 순임금이 천하를 소유했는데 누가 준 것입니까?’ 가로되 ‘하늘이 준 것이니라.’[萬章曰 堯以天下與舜 有諸 孟子曰 否天子不能以天下與人 然則舜有天下也 孰與之 曰天與之]”라는 말이 있다. 정의와 도덕의 원천으로서 인격신적인 면이 강하게 부각된 것을 볼 수 있다.
한편, 이 인격신은 만물을 창조한 조물주로서의 성격도 가지고 있다. 『장자』 달생편(達生篇)에 보면 “천지는 만물의 부모이다[天地者 萬物之父母].”라는 말이 있고, ≪시경≫ 대아에 보면 “하늘이 백성을 낳으셨으나 하늘의 명은 믿고 있을 수만 없는 것[天生烝民 其命匪諶].”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조물주로서의 신을 표현한 것이다. 이상의 여러 사실들을 통해 보더라도 고대 문헌에 나타나는 신이 이미 최고신으로서 온갖 자연적 질서와 인륜적 가치의 절대 원리로 작용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둘째, 주자는 이(理)를 매우 중요시하는 성리학자였던 만큼 성리(性理)와 귀신(鬼神) · 정신(精神) · 혼백(魂魄)을 뚜렷이 구별하여 전자를 오로지 ‘이’라 할 수 있다면 후자를 기(氣)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귀신 · 정신 · 혼백은 기이므로 유(類)를 따라 감응할 수 있으나 이는 감응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는 기의 뿌리가 되고 있는 것이고, 이는 마치 쉬지 않고 있는 천지 조화의 회로와 같은 것이어서, 날마다 무한히 생기는 기의 원천이 되므로 기가 단멸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이처럼 주자는 신이라는 말을 따로 사용하지 않고 그 신에 해당하는 최고의 초월적 원리로 이를 내세우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주자는 사람의 영혼도 일물(一物)과 같은 형태로 파악하고 있지 않다. 사람이 한번 성형(成形)을 받고 태어나면 그 성(性)이 그대로 내가 소유하는 것이 되어 비록 죽는다고 하더라도 멸하지 않고 분명히 일물(영혼)이 되어 적연(寂然)한 일체(一體) 중에 감추어져 있다가 자손이 구하는 데 따라서 그때 그때 출현하여 공물(供物)을 흠향한다고 말한다(『주자전서(朱子大全)』 권45, 答廖子晦). 일물은 어디까지나 적연한 일체 중에 포함된 부분과 같은 것이어서 독립된 개체로 있기는 어려운 것이다. 다만, 제사(祭祀)에서의 감격(感格)이 이루어지는 것은 이에 뿌리를 두고 날로 생(生)하는 활연무궁(活然無窮)의 기(氣)가 있기 때문이다. 즉, 형이하(形而下)의 기의 근거에는 형이상적인 태극의 이가 있음을 말한다.
다시 요약한다면, 이라는 것은 어떤 모양으로나 생각하는 ‘나’에게 속한 나의 산물이 될 수는 없고, 거꾸로 생각하는 ‘나’가 절대적으로 예속되어 있는 초월적이며 절대적인 존재로서 이것이 없다면 나는 생각할 수도 없고 존재할 수도 없다. 또한 이를 쉬지 않고 활동한다고 본다면 모든 활동의 원천이므로 그것을 원천의 활동이라고 할 수 있고, 어떤 물질적 요소와 관계가 없다는 의미에서 순수활동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에 비해 인간이 한 위격(位格)으로서 할 수 있는 활동은 순수활동의 전체적인 것이 모두 드러나지 않고 전체에 예속된 부분만이 활동하므로 분여활동(分與活動)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주자가 통체태극(統體太極)의 이, 즉 전체적인 순수활동과 각구태극(各具太極)의 이, 즉 분여활동을 구분하고 있으나 그 사이에 어떤 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구분하지 않은 점은 각 개인 안에 영원히 소멸될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런 점 때문에 천인합일설의 튼튼한 기반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신 혹은 천(天)이라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처럼 그렇게 절대적인 위치에 있지 않다. 불교 이전의 브라마니즘에서는 6개의 악취(惡趣, bad direction) 중에서 가장 좋은 경향을 띠는 위치에 있는 것이 천이었다. 6개의 악취란 ① 지옥(Naraka), ② 아귀(餓鬼, Preta), ③ 축생(畜生, Tiryagyoni), ④ 수라(修羅, Asura), ⑤ 인(人, Manusha), ⑥ 천(天, Deva)을 말하는데, 좋지 못한 정도가 심한 것부터 덜 심한 쪽으로 향하고 있다. 그러므로 ⑤의 인보다는 ⑥의 천이 보다 나은 것임을 알 수 있다. 거꾸로 말하면, 사람은 천보다는 못하지만 그 다음으로 좋은 생존의 길이라는 것도 알 수 있다. 이 6개의 생존의 길을 넓은 의미에서의 중생 혹은 유정(有情)을 뜻하는 ‘Sattva’라고도 하는데, 이 ‘Sattva’들은 결국 애욕(愛欲)의 다소(多少)와 경중(輕重)에 따라 형태상의 차등과 성격이 결정된다.
소승불교에서는 이 6가지 악취가 실제로 이 우주 어느 공간의 일정한 주처(住處)를 차지하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대승불교에서는 다만 6개의 악취를 생존양식의 현현으로 이해하고 있다. 지옥과 천당이 어디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며 우리의 일심(一心)의 오염도 여하에 따라 나타나는 것이므로 모든 ‘Sattva’의 궁극적 이상은 6개의 악취를 순환적으로 왕래하는 윤회의 굴레를 벗어나 그 악순환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불교경전 가운데 나타나는 많은 신들은 인간보다는 뛰어난 존재양식 가운데 있으나 영원한 해탈의 경지에서 보면 아직도 불완전성에 있다. 대범천왕(大梵天王) · 33천 · 사천왕(四天王) · 염마왕(炎魔王) · 신중(神衆) · 난타(難陀) · 용왕(龍王) · 16선신(十六善神) · 12신장(十二神將) · 25부중(二十五部衆) 등 대중들의 마음에 가까이 있는 신들이 결국에는 절대적인 위치를 확보하지 못하고 그 나름의 선신(善神)으로 고유한 기능을 가지고 인간을 돕고 있을 뿐이다. 연구에 따르면, 이와 같은 신들에 대한 대중적 신앙은 인도의 토착신들을 불교적 해석에 의한 방편신(方便神)으로 수용함으로써 비롯되기 시작했는데, 시대와 지역이 달라짐에 따라 여러 종류의 토속신과 영합하면서 복잡한 신앙형태로 변천되어 왔음이 알려졌다.
우리 나라에서 특히 고려시대에 중요시된 신은 제석(帝釋)이었는데, 제석은 욕계6천(欲界六天) 중에서 제2 도리천주(忉利天主)로서 천상의 32성(城)을 통치하는 천제(天帝)로 알려졌다. 고려 태조 2년(919)에 내제석사(內帝釋寺)의 창건과 924년에 외제석원(外帝釋院)의 창건을 비롯하여 삼국시대 이후부터 뿌리 깊이 박혀 있는 제석신앙에 대한 국책(國策)에 의한 신앙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제석신앙을 위주로 한 도량(道場)이 『고려사』에 22회나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사회에서 제석신앙에 대한 비중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천제 혹은 제석신앙은 우리 민족이 고유하게 간직해 온 숭천관념(崇天觀念)과 습합하여 민속신앙으로 뿌리를 내렸다. 그래서 용어상으로는 불교적이지만 내용상으로는 한국인의 숭천관념을 가장 대표적으로 알게 해주는 것이 되었다.
불교에서 말하는 근원,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신과 같은 것은 ‘Sattva’보다도 더 깊은 것, ‘Sattva’의 생명이 되는 마음 혹은 일심(一心)에 있다. 그러므로 제신(諸神) 혹은 신중(神衆)은 아무리 인간보다 뛰어난 위치에 있다 하더라도 6악도(六惡道)의 굴레를 벗지 못하고 있다. 일심이야말로 보이지 않고 말로써 형용할 수 없으며, 얼핏 보면 없는 것 같다. 그렇다고 비존재나 허무가 아닌 모든 생성과 제도(濟道)의 본체라고 보고 있다. 일심의 인간적 현으로 나타나 차원이 다른 물질적 인간관계 속의 존재, 생사고락을 겪는 유한한 존재가 되는 것이므로 근원적 본체는 이런 면에서 모든 생성의 근원이 된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근원적 본체를 어떤 신이라는 명칭으로 부르는 것은 적합하지 않고, 그냥 정의 내릴 수 없는 마음 혹은 일심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마땅하다.
도교 혹은 도가라는 명칭이 선진시대(先秦時代)에는 보이지 않고 진(秦) · 한(漢)에 이르러 여러 잡학(雜學)의 혼합으로 이루어졌다. 호적(胡適)이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도가’라는 말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 가운데 있는 진평세가(陳平世家) 봉선서(封禪書)에서이다. 이때의 도가는 유가 · 묵가 · 법가 등의 사상을 혼합했던 것이어서 호적도 도가를 혼합절충적 학파라고 하였다. 도교의 목표는 정근(精根)의 정(精), 기력(氣力)의 기(炁), 신령(神靈)의 신이라는 3기(三奇)를 인식하는 것인데, 그것은 일련의 철학적인 발전을 통하여 결정화된 목표이다.
3세기에 위백양(魏伯陽)은 그의 저서 『참동계(參同契)』에서 도가의 철학, 방사(方士)의 이론, 『역경』의 철학, 음양철학을 종합 · 절충하여 연금술 실시에 의한 장수(長壽)를 궁극의 목적으로 하였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수동적인 우주의 힘인 음(陰)과 능동적인 우주의 힘인 양(陽)이 화합하여 우주의 생명을 낳는 에너지의 기가 개개의 육체에 집중된다고 하였다. 4세기에는 갈홍(葛洪)이 연금술의 기술을 전문화하고 유교의 윤리를 도교철학에 합체시켰는데 역시 모든 것을 3기의 인식에 집중시켰다.
12세기에 이르면 불교의 남종선(南宗禪)과 북종선(北宗禪)에 비교할 수 있는 하남도교(河南道敎)와 하북도교(河北道敎)라는 두 파가 출현하는데, 하남도교는 금대(金代)의 왕희(王囍)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믿어지고 있다. 이 일파는 다이어트나 의약 · 단약(丹藥)의 복용이라는 수단을 통하여 인간의 본성, 즉 진실한 자성(自性)을 연마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하북도교는 요대(遼代)에 유해섬(劉海蟾)에 의해 성립되었는데, 부적(符籍) · 주문(呪文) 그 밖의 기술이라는 외적인 수단으로 양생(養生)과 장수, 인간의 활력 통제나 발양을 목적으로 하였다.
12세기에는 이 밖에도 전진교(全眞敎) · 대도교(大道敎) · 태일교(太一敎)라는 3개의 교파가 생겨났다. 전진교는 원래 난세에 생명을 유지, 보호할 것을 목적으로 하였는데, 그 신자들은 난민(難民)이나 은자(隱者)들이었다. 후대에 와서는 부적 · 점(占) · 요술 · 연금술에 매달리게 되었다. 대도교는 금대에 도사였던 유덕인(劉德仁)에 의해 창건되었는데, 금욕주의의 실천으로 특징이 있었다. 태일교는 도사였던 숙포진(肅抱珍)에 의해 1138년부터 1140년 사이에 세워졌는데, 태일(太一)과 천 · 지 · 인의 3원(三元)을 달성할 것을 목적으로 하여 부적과 주술을 장려하였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중국의 도교 교파 가운데 재리교(在理敎) · 백련사(白蓮社) · 귀일도(歸一道)가 있는데, 이들의 근본 성격을 이해하면 도교의 신관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재리교는 명청왕조(明淸王朝) 교체기에 상동 출신이었던 양존인(楊存仁)에 의해 창립되었다. 이 교파의 교리에 따르면, ‘정신의 각성’, ‘고뇌의 이탈’, ‘행복의 획득’, ‘신심의 단련’, ‘정심(正心)과 치심(治心)’, 그리고 ‘근원에의 복귀’라는 6개 항목으로 요약되고 있다. 종교적으로는 도교와 불교를 함께 신봉하면서 관음(觀音)을 특별히 주신으로 숭배한다.
백련교는 1133년(南宋의 高宗 3)이나 송대(宋代)까지 설립 연대를 거슬러 올라가기도 하나, 오늘날은 백련교 안에서 파생된 일관도(一貫道) · 대도회(大刀會) · 소도회(小刀會) · 천문회(天門會) · 무극회(無極會) · 팔괘회(八卦會) · 황교(黃敎) 등의 교파들 중에서 대도회의 활약이 두드러지고 있다. 이 종교는 천지 · 일월 · 성신을 숭배하고 인간의 신체를 보호하는 것으로 검은 호랑이를, 또 인간 생활의 두 보호자로서 거북과 뱀을 숭배하고 있다. 신도들은 부적을 몸에 지니고 악을 방지하기 위해 주문을 외운다.
귀일도는 이정옥(李廷玉)에 의해 창건된 종교로 오늘날까지 종파운동을 하고 있다. 이 교파의 신도들은 신심을 강조하는데, 그 신심은 매일 4,000번씩 경구를 외우고 염주를 하면서 땅 위에 머리를 대는 것 같은 의례를 행하였다. 그들은 독립 · 근면 · 검약의 생활을 좋아하고, 부귀를 피하며, 역행(力行), 채식주의, 자기 수양, 타인의 구제, 살아 있는 것들을 방생하는 것 등을 위하여 헌신하였다. 그들은 무생노모(無生老母)라는 것을 숭배하는데, 그것은 모든 산 것들의 원천 · 창조자 · 유지자라고 믿고 있다.
이상과 같이 보면 도교의 신은 일정하지 않고 신의 세계보다는 인간의 현세적 건강 · 수명 · 번영 · 복(福)을 위하여 수련하고, 그것을 위한 방편으로 불교 · 유교 · 민간신앙적인 여러 신격(神格)들을 종합적으로 흡수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신은 이른바 유일신 사상을 믿는 대부분의 종교와 공통적으로 다음 몇 가지 측면의 특성을 갖는다.
첫째, 무한하고 스스로 존재하는 신이라는 관념이다. 그리스도교에서 항상 되풀이하여 강조하는 것은 하느님은 무한한 존재라는 사상이다. 그리하여 틸리히(Tillich,P.)는 하느님은 우리가 ‘존재한다’고조차 말할 수 없는 실재라고 주장하였다. 사람은 하느님의 존재에 대하여 질문할 수 없고, 그 질문에 답변할 수도 없다. 하느님의 존재를 묻는 것은 본질적으로 존재를 초월한 분에게 묻는 것이므로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은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이거나 하느님의 속성을 은연중에 제한하거나 부인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도 언어로 표현한다면 ‘스스로의 존재’ 혹은 ‘자존하는 존재(self-existence)’라고 할 수 있는데, 하느님은 그의 존재나 특성에서 그 자신 이외의 어떤 실재에도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이 말 속에는 하느님은 영원하여 시작도 끝도 없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만일 시작이 있었다면 그를 존재하게 만든 이전의 실재가 있었을 것이며, 그의 존재를 말살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실재가 존재했을 것이다.
둘째, 창조주로서의 하느님이다. 흔히 무(無)로부터의 창조를 말하는데, 건축가가 집을 지을 때처럼 이미 주어진 재료를 가지고 새로운 형태를 만든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그의 피조물 사이에는 절대적인 차이가 있어서 인간이 하느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오히려 인간은 하느님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인간이 우주의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자연적인 권리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라는 사상이 나오게 된다.
셋째,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인격적인 속성을 갖는다. 『구약성서』에 보면, “나는 너의 조상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러한 관념은 신약에도 그대로 이어져 예수는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쳐 주었다. 그렇다고 그 신이 신인동형(anthropomorphism)의 모습처럼 된 것은 아니다. 그런 면에서 하느님을 유일무이한 인격(a person)이라고 하기보다는 인격적(personal)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욱 적합한데, 유일무이한 인격을 ‘확대된 개인’처럼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인격적이라는 뜻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면서도 인간에게 단순히 대상처럼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의 상대자가 된다는 것을 말한다.
넷째, 사랑과 선(善)의 하느님을 강조한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는 사랑은 에로스적 사랑이 아니라 아가페적 사랑이라고 말한다. 에로스적 사랑은 대상의 사랑스러움 때문에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사랑인 데 반하여 아가페는 무조건적이고 보편적인 사랑이다. 에로스는 대상이 아름답고 내 마음을 끌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아가페는 그런 특수한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존재하기 때문에, 혹은 하나의 인간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인간의 덕이나 공적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주는 사랑 자체이므로 하느님이야말로 인간 생명의 마지막 수호자이며 보호자라는 종교적 바탕을 이루게 된다.
다섯째, 성스러운 하느님의 속성을 들 수 있다. 인간과는 무한히 다르고 무한히 위대한 하느님으로서 하느님의 광대무량함과 초월성을 강조한다. 하느님은 “영원부터 계시는 지극히 높고 고귀한 분이며, 그의 이름은 거룩한 분이다.”(이사야 57장 15절)라고 표현되고 있어서 거룩한 하느님은 무서울 정도로 신비적인 하느님이다.
이상에서 말한 몇 가지 속성을 다시 요약한다면, 하느님은 무한하고 영원하고 창조되지 않고 인격적인 실재로서, 그 자신 이외의 모든 것을 창조했으며, 그의 피조물인 인간에게는 사랑스럽고 성스럽고 거룩한 하느님이라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