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고대에서의 상제는 천계(天界)에 조정(朝廷)을 조직하여 운영하면서, 동시에 지상(地上)을 감시하여 지상의 만물을 생성, 변화시키는 조물주였다. 그 구체적인 성격은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원시적인 천신 신앙에서 상제는 항상 의인화된 인격신으로 나타나며, 움직이고, 말하고, 명령하면서 실제로 존재하는 커다란 한 사람으로 상상되었다. 둘째, 상제는 사람들의 마음과 통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 사람들의 마음 밖에서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자였다.
셋째, 상제도 사람처럼 욕망이 있는 자로서 사람이 그에게 현실적인 욕망을 희구할 때는 제사나 희생 등의 교역 의식을 통해야 했다. 넷째, 상제는 사람들에게 그 상벌로서 빈천·부귀·사생·이해 등의 외재적인 화와 복을 내려주는 자였다.
이러한 상제에 대한 당시인의 종교적 신앙 태도는 사람의 일에 관한 모든 것까지도 상제의 뜻에 의하여 결정하려는 상제 중심의 사고 방식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상제의 뜻을 판단하는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점법(占法)이 성행하였다.
현존하는 10만여 편(片)의 갑골문(甲骨文)이 모두 상제와 조상신에 대한 제사라든가 전쟁·농사의 풍흉, 기우(祈雨) 등에 관한 복사(卜辭)들인 것이다.
이와 같이, 당시인 그 중에서도 특히 은인(殷人)들은 중요한 사건뿐만 아니라, 왕의 일상 생활에서의 움직임까지도 모두 점에 의한 조상이나 상제와의 대화를 통하여 판단하며, 사람의 모든 일에 대한 최후의 결정에도 결국 상제의 뜻을 묻는 점법으로서 결정하였다.
이렇게 볼 때 은대(殷代)에 있어서의 상제는 천상의 지배자인 동시에, 지상의 지배자였다. 공동체의 구심력이 되고 공동체의 의지를 결정해 주는 요소가 되어, 법률의 역할을 하고, 윤리적 선악 판단의 근거가 되고, 정치적 최고 의결 기관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상제 중심의 신앙 생활로 일관되는 이와 같은 종교 문화는 무왕(武王)의 혁명으로 봉건 국가의 예제(禮制)가 확립된 주대(周代)에 이르러서는 인간의 조직과 제도에 강세가 두어지고, 합리적인 사유가 단편적으로 나타나면서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인간문화에로 전환되었다.
그리고 상제라는 용어는 한 동안 중국 서부 지역에서 수입된 천(天)이라는 용어와 혼용되다가 차차 천으로 통일되고, 상제에 대한 관념 또한 합리적 사유에 의하여 천명 사상(天命思想)으로 전환되었다. 천명 사상이란 하늘이 명령을 내려 주는 것은 오직 사람의 도덕으로 말미암아 결정된다고 생각하는 사상이다.
그 내용은 하늘의 명령이 자신의 의사대로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만 계속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덕의 유무를 판단하여 덕이 있는 사람에게로 옮겨간다는 것이다. 공자(孔子)는 이러한 천명 사상을 발전시켜 하늘의 뜻과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본래성의 움직임을 일치시킴으로써 천인합일사상(天人合一思想)을 창출해 냈다.
한국의 고대 문화는 중국의 동부지역에서 발원한 중국 고대의 상제 중심의 종교 문화와 동질적이거나, 아니면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었다. ≪삼국유사≫에 나타나 있는 단군에 관한 기록을 보면, 상제는 천상에서 조정 대신들을 거느리면서 지상의 만물을 감독하는 자로 설명되고 있다.
하느님인 환인이 아들 환웅에게 삼천 명의 무리를 이끌고 태백산으로 내려가 다스리게 하였는데, 그곳을 신시(神市)라고 하였다는 기록에서는 지상은 하느님의 뜻에 의하여 다스려지는 이상 사회로 기술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환웅이 곰과 결합하여 단군을 낳았다는 기록에서는 인간 존재는 하늘의 요소와 땅의 요소의 결합체로 이해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홍익인간(세상을 널리 이롭게 한다.), 이화(理化 : 힘에 의하여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교화하는 것) 등으로 표현되는 정치 이념을 통하여 인도주의 정신을 배경으로 한 종교적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상제, 즉 하느님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종교적 성격은, 불교가 한국에 정착되게 되면서 지상에 이상 세계인 불국토(佛國土)를 건설하려는 노력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고려 말기의 성리학 수용기에 이르러 확연히 드러나게 된다.
이색(李穡)은 ‘천인무간(天人無間)’이라 하여 하늘과 사람을 일체의 매개자를 통하지 않고 직접 연결시키고 있다. 중국의 성리학에서는 하늘의 명령이 인간의 본래적인 마음의 작용과 일치하기 때문에, 하늘과 사람은 이를 매개로 하여 합일된다고 한 데 반하여, 이색은 애당초 하늘과 사람을 직접 연결시킨 것이다.
이는 천명 사상으로 발전되기 이전의 중국 고대의 상제 사상과 유사한 것이다. 그리고 고려 말기의 성리학과 조선 초기의 성리학을 연결시키는 교량역을 담당하였던 권근(權近)은 그의 저서인 ≪입학도설 入學圖說≫에서 천인심성합일지도(天人心性合一之圖)를 그렸는데, 이 그림에서 그는 주돈이(周敦頤)의 ≪태극도설 太極圖說≫과 주희(朱熹)의 이기설을 자료로 하면서도 우주론보다는 심성론(心性論)을 전개하여 하늘과 사람의 모습을 일치시켜 설명함으로써 하늘과 사람의 관계를 설명하려 하였다.
뒤이어 정지운(鄭之雲)은 ≪천명도설 天命圖說≫을 지어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설명하였는데, 이 ≪천명도설≫에서 “사단(四端)은 이(理)에서 나온 것이고 칠정(七情)은 기(氣)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을, 이황(李滉)이 “사단은 이가 나타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나타난 것”이라고 고친 것에서 비롯되어, 이황과 기대승(奇大升)간의 사칠논변(四七論辨)이 시작되었고, 이것이 철학사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이황은 ‘천인무간’의 명제를 ‘천아무간(天我無間)’으로 집약시켜 철학하는 주체로서의 ‘자기’를 강조하고, 현실적으로 하늘과 하나인 존재로서의 ‘자기’를 회복하기 위하여 경(敬)을 중심으로 하는 고도의 수양 철학을 완성시켰다.
그리고 이이는 조광조(趙光祖)의 지치주의 사상(至治主義思想)을 계승하여 하늘의 뜻이 펼쳐진 이상 사회의 건설을 위한 정치적 실천 운동을 전개하였다. 서양의 문물이 수용되자 정약용(丁若鏞)은 기독교의 하느님을 상제의 의미로 소화하였다.
한국에 기독교가 크게 발달하게 된 것도 근본적으로는 하느님의 개념을 수용할 수 있는 상제 사상이 전해오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늘과 사람이 직접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천인무간’의 사상은 사람은 곧 하늘이라고 설명하는 천도교의 ‘인내천사상(人乃天思想)’을 낳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