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령은 여러 가지 신비로운 힘을 지닌 초인간적·초자연적·초합리적인 존재를 가리킨다. 신령은 신격화된 영혼, 혹은 신으로 숭상된 영혼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신령에는 인령이 신격화된 신령이 있고, 신격화된 자연에 내재하는 신령이 있다. 어느 경우에나 초자연적이고 초합리적인 존재로서 여러 가지 신비 현상을 실현할 수 있는 힘을 지닌 것으로 믿는다. 조선조가 국가 종교 내지 관료 종교를 유교적 체재로 정비하였지만, 그 믿음의 대상은 사람의 신령과 천지산천의 신령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 민속신앙에서 쓰이고 있는 아주 특이한 용어로 천지신령이라는 말이 쓰이고 있고 산신령이라는 말이 쓰이고 있는가 하면 조상의 신령이라는 말도 쓰이고 있어, 그 사용범주도 한결같지는 않다.
천지신령이나 산신령이라는 용례에서는 자연 그 자체를 신격화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나 이 경우에도 천지 및 산이란 자연에 깃들어 있는 영혼에 대한 믿음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천지신령일 때는 천지의 지배자, 천지의 주인이라는 관념이 이야기될 수 있으나, 산신령일 때는 더러 노인으로 표상(상징)되는가 하면 호랑이로 표상(상징)되기도 하여 그 함축성이 다양해진다.
이와는 달리 조상의 신령이면 단적으로 신격화된 조상의 혼령이어서 개념을 정립하기가 한결 단순해진다. 이 경우, 신령이라는 관념 아래서 조상이 숭앙되는 것이어서 조상숭배의 기틀에 신령이란 관념이 깔려 있게 된다. 역대의 문헌과 민속현장에는 신령이라는 말 이외에도 영지(靈地) · 영산(靈山), 그리고 산천지령(山川之靈)이나 정령(精靈) 등의 말이 쓰이고 있다.
이들 용례에서 영은 단순히 영혼이란 뜻만을 함축하는 것은 아니고 초자연적인 것, 신비로운 것 등의 뜻을 아울러 함축하고 있다. 실제로 영험(靈驗)이나 영이(靈異)라는 말은 신비주의적 색채가 짙거니와 특히 영이란 말은 신이(神異)란 말과 맞바꿀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신령이란 말에도 영이 지닌 함축성이 포괄될 수 있다.
여러 구체적인 사례들을 종합하게 되면, 신령은 가장 단순하게는 신격화된 영혼, 혹은 신으로 숭상된 영혼이라고 정의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신령에게는 두 가지가 있어서 하나는 사람의 영, 곧 인령이 신격화된 신령이고, 다른 하나는 신격화된 자연에 내재하는 것으로 믿어진 신령이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나 초자연적이고 초합리적인 존재로서 여러 가지 신비현상을 실현할 수 있는 힘을 지닌 것으로 믿고 있다. 또한, 원칙적으로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존재이나, 때때로 사람 혹은 그 밖의 자연물의 모습을 띠고 나타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삼국유사』 권3의 미륵선화(彌勒仙花) 미시광(未尸郞) 진자사(眞慈師) 조항에는 “중이 가로되 ‘이곳 남쪽 이웃에 선산(仙山)이 있는데, 예로부터 어진 이들이 머물러 명감(冥感)하는 바가 많다. 어찌 그곳에 가 살지 않으랴.’ 하자 진자사가 이 말을 따라 산기슭에 이르니 산령(山靈)이 노인으로 변하여 나와 맞이하였다.”라는 기록이 보이며, 이것은 산령의 불가시성(不可視性)과 그 변신술에 대해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신령은 육체나 물리적 형체와는 별도로 자유로움을 누리고 있으나, 그 자신의 뜻에 따라 형체를 지닐 수 있는 셈이다. 육체나 물리적 형체를 벗어나 있는 이상, 신령이 초시간적인 존재로 믿어짐은 당연한 것이다. 한국의 민속신앙은 곧 신령의 종교라 해도 좋을 만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종교를 그 믿음의 대상에다 중점을 두어 규정하는 한 상당한 설득력을 지닐 수 있다.
한국인이 믿었던 믿음의 대상은 단순히 신이라고 부르기보다는 신령이라고 부르는 것이 훨씬 민속신앙의 현실에 가까울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산신과 산령이 같은 대상을 두고 일컬어지고 있는 용례를 보더라도, 최소한 신이라는 관념과 영이라는 관념은 별개의 것이 아니고 합일될 수 있는 관념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한국인의 가장 대표적인 신비체험인 접신(接神)이 ‘신지핌’으로 일컬어지면서도 또한 ‘영실이’로도 일컬어지고 있는 데서도 영과 신이라는 두 관념의 합일성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신지핌이 단적으로 영실이일 때 신은 곧 영인 것이다. 한국의 전통신앙은 곧 신령숭앙이라, 사람의 신령과 천지산천의 신령을 모시는 것이 이 땅의 전통신앙이었다.
이 점에서는 상고대의 삼국시대나 고려 · 조선시대나 다를 바 없었다. 조선조가 비록 유교이념을 내세우면서 유교적 체재로 국가 종교 내지 관료종교를 정비하였지만, 그 믿음의 대상은 의연히 사람의 신령과 천지산천의 신령이었던 것이다. 물론 종교를 믿음의 대상만으로 규정할 수는 없으므로 믿음의 대상만을 내세운 이 같은 보편성은 조건을 두어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사람이 신령으로서 숭앙된 가장 오래된 예는 김수로왕이 ‘대왕강령(大王降靈)’이라 일컬어진 데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듯이 고조선 및 삼국과 가락의 창건시조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사후에만 신령이었던 것이 아니라 생시에도 하늘에서 내린 신령으로서 숭앙된 것이다. 이럴 때 상고대의 왕들과 무속신앙의 신들과는 다 같이 사람들에게 내리는 영인 점에서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김수로왕은 사후에도 영이를 나타내었으며, 이 같은 사례는 김유신(金庾信)의 사후에 관한 기록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김유신의 경우는 역사적 인물의 신령화라는 점에서 애초부터 신화적 인물의 신령화가 지적될 상고대의 왕들과는 구별해야 할 것이다. 무속신앙에서는 신령이 인간 일반에게로 확산된다.
조상령이 신령으로 섬겨지는 이외에 원사(怨死)한 사람의 영혼이 신령으로 섬겨진다. 이 경우는 원령 혹은 원신령(怨神靈)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한국의 무속신앙에서 이 원한의 신령들은 가장 주된 믿음의 대상이 된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무속신앙은 이른바 ‘검은 샤머니즘’의 범주에 묶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고려 충렬왕 4년 사신(祠神)이 무당에 내려서 이르기를 ‘나를 봉하여 정녕공(定寧公)으로 삼으라.’고 하였다. 고려조의 뒤를 이어 본조(本朝)에서는 향과 축(祝)을 내려보내었다. 민간에서 이르기를 ‘신사(神祠)에 신령이 있으니 제사지내지 않으면 곧 재앙이 있다.’고들 한다.” 이것은 『여지승람』이 전라남도 나주의 금성산사를 대상으로 한 기록이다.
명백히 산신이 의인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신령이라 일컬어지고 있다. 천지산천이 애니미즘(animism)적 신앙의 대상이 되면서 신격화된 영혼의 소유주로 믿어져 있었던 자취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금성산사의 보기는 모든 자연신앙에 고루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