넋은 살아 있는 사람의 육신에 깃들어 생명을 지탱해 준다고 믿는 기운을 가리킨다. ‘혼, 혼령, 혼백, 영혼, 얼’ 등과 같은 뜻으로 쓰인다. 넋은 육신의 죽음과 무관하게 그 자체의 실체를 존속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뜻에서 초월성을 지니고 있다. 넋은 대개 코나 입을 통하여 육신을 자유로이 출입하기도 한다. 혼은 살아 있는 이와 죽은 이 양쪽에 걸쳐 쓰이나 ‘백’은 주로 죽은 이의 신격화된 넋을 뜻한다. 넋은 신격화되면 신령이라 불리며 마을의 수호신 혹은 집안의 수호신이 되기도 한다. 무당은 신령을 몸주로 받아들여 인간들에게 내리는 화를 막아주는 능력을 보이기도 한다.
‘혼(魂) · 혼령(魂靈) · 혼백(魂魄) · 영혼 · 얼’ 등과 같은 뜻으로 쓰인다. ‘기’란 기운 또는 운기(運氣)라고 설명되기도 하는데, 때로는 감각적인 형상을 띠고 나타난다고도 믿어져 왔다.
넋은 육신의 죽음과 무관하게 그 자체의 실체를 존속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뜻에서 초월성을 지니고 있기도 한 것이다.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야 있고 없고 임향한 일편단심 가실 줄이 있으랴.”라는 정몽주(鄭夢周)의 유명한 「단심가(丹心歌)」는 ‘넋’의 초월성에 관한 믿음을 부분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사후에 넋이 누리게 되는 초월성은 생전에도 상당한 정도 발휘되는 것이라고 생각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이 살아 있을 때에도 넋은 육신을 빠져 나갔다가 다시 되돌아 들어온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같이 육신을 자유로이 출입하는 넋에 있어서 육신이 단지 집이나 그릇 같은 것에 불과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며, 육신의 어느 부분을 통하여 드나드는지도 분명하지 않으나, 대개 코나 입을 통한다고 여겨지고 있다. ‘넋빠진 사람’, 또는 ‘얼빠진 사람’이라는 말들에서도 넋의 육신 출입이 자유롭다는 관념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혼’은 넋과 같은 뜻으로 쓰이지만, ‘백’은 조금 다른 의미를 가진다. ‘혼’은 살아 있는 이와 죽은 이 양쪽에 걸쳐 쓰이나 ‘백’은 죽은 이의 신격화된 넋을 주로 뜻한다.
조상령의 경우가 ‘백’에 해당되는 것이다. ‘혼령’이 넋과 동의어인 것은 사실이나 ‘영’이 따로 쓰이는 일은 흔하지 않다. 신령은 신으로 관념된 영혼 또는 신격화된 영혼이라는 뜻으로, 신명(神明)과 거의 같은 뜻으로 쓰일 수 있는 말이다.
자연이 신격화되어 신앙될 때도 신령이라고 하거니와 산신령과 산신이 같은 뜻으로 쓰이는 것이 그 좋은 보기이다. 따라서, ‘영’은 사람에게만 한정되어 쓰이는 ‘혼’과는 달리 사람과 자연 양쪽에 걸쳐 쓰이는 셈이다.
이와 같이 넋이란 말은 혼 · 혼백 · 영혼 · 얼 등과 어느 경우에나 동의어로 쓰일 수 있는 포괄적인 용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 그것이 신격화되었을 때 신령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 신령에는 자연의 ‘영’도 포함된다.
넋은 우리 나라의 민간신앙에서 매우 큰 구실을 하고 있다. 특히, 무속신앙에서 사령숭배(死靈崇拜)가 갖는 비중은 대단히 크다. 산 사람의 넋, 즉 생령(生靈)이 신앙대상으로 된 예는 거의 없으므로 영혼숭배는 기본적으로 사령숭배이다. 사령숭배의 경우 사령이 갖는 모순적 등가성(等價性)이 문제로 등장한다.
즉, 사령은 산 사람에게 해악을 끼치는가 하면 정반대로 산 사람을 지켜주기도 하는데, ‘화(禍)의 넋’과 ‘복(福)의 넋’, ‘악령’과 ‘선령’, ‘검은 넋’과 ‘흰 넋’, ‘정화되지 못한 넋’과 ‘정화된 넋’, ‘맺힌 넋’과 ‘풀어진 넋’, 혹은 ‘이승을 떠도는 넋’과 ‘저승에 안주한 넋’ 등의 양분적 대립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 두가지 넋이 따로따로 별개인 경우도 있으나, 한 넋이 화 · 복 양면을 함께 가지고 있는 경우도 많다.
사령에 대한 공포는 첫째로 죽음과 부정(不淨)을 연결시켜 시체의 부패에 따른 혐오감 및 외양의 무서움이 연상되기 때문이고, 둘째로 원한을 품은 넋인 원령(怨靈) · 원귀(怨鬼)에 연결되기 때문인데, 후자 쪽의 비중이 훨씬 크다.
원령은 원한을 풀기 위하여 산 인간들에게 해악을 끼치게 된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공포의 대상이 된다. 원령은 한 집단의 조상단지에 모셔진 것, 한 마을의 수호신, 무당의 몸주 등 다양하게 나타난다.
조상단지에는 집안의 직계조상이나 일가붙이 가운데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넋들을 모셔서 그 집안의 안주인이 섬긴다. 따라서, 조상단지에 모셔진 원령은 집안 신령의 일부를 이루게 된다.
마을수호신 즉, 서낭신들은 청상과부나 억울하게 죽은 사람의 넋들인데, 서해안 도서지방에서의 임경업장군신령이나 동해안지방 해서낭(바다서낭)의 처녀귀신의 경우가 그 예이다.
무당의 몸주, 곧 무당에게 실리는 죽은 넋은 예외없이 원령들로서 무당의 효험과 권위는 넋들의 원한의 정도와 그에 따른 공포의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 무당은 몸주만큼 두려운 존재가 되면서 그 몸주가 인간들에게 내리는 화를 막을 능력을 가지게 된다고 여겨진다. 원령막이나 원령풀이는 무당의 이러한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원령은 거의 모두가 ‘떠도는 넋’으로서 갈 곳을 잃은 넋, 객귀(客鬼), 나그네 넋이다. 사람이 죽고 난 뒤 넋은 육신을 벗어나 저승으로 가게 마련인데, 그 중에서 일부는 저승으로 못 가고 이승에 머물면서 이곳저곳 헤매며 떠돌아다닌다고 여겨진다.
떠도는 넋들은 저승으로 가거나 무엇에인가 정착하기를 바라면서 원한을 풀 수 있는 희생자를 고르는데, 희생자는 개인일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으나, 공동체 전체일 경우도 있다.
예컨대, 이름없는 병사의 넋인 여귀(厲鬼)를 포함한 무주 고혼들은 공동체 전체에 해악을 끼치며, 전쟁 · 가뭄 · 홍수 · 질병 등의 재난은 종종 이런 원령 때문이라고 간주되기도 한다.
원령의 원한풀이는 원령 그 자체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경우와 그가 고른 희생자를 매개로 하여 이루어지는 두 경우가 있다. 전자는 각 지방의 물귀신전설에서 그 보기를 찾을 수 있다.
뜻하지 않은 사고로 말미암아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의 넋은 그 원통함 때문에 물밑이나 물가장자리를 헤매다가 다른 사람을 빠뜨려 죽게 함으로써 자신은 그곳을 벗어나 저승으로 가게 된다고 한다.
원령이 이러한 형식으로 자기구제하는 것은 새로운 원령을 낳는 악순환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희생자를 매개로 한 원한풀이 경우에는 질병이나 재난을 가져다주면서 희생자에게 달라 붙게 되는데, 이를 ‘귀신에게 씌었다.’, ‘귀신이 붙었다.’라고 한다.
이런 경우에는 굿을 올려 귀신을 달래어 재앙에서 벗어나려는 시도가 행해지게 된다. 일시적으로 희생자의 몸에 부착되었다가 저승으로 돌아가게 되는 귀신을 통상 ‘허주(虛主)’라고 부르는데, ‘허주벗김’은 ‘귀신씌움’과 대응되는 것이다.
일단 몸에 실린 귀신을 달래어 몸 속에 그냥 정착시키느냐, 아니면 떼어내버리느냐에 따라 무당이 되느냐, 안 되느냐를 가름하게 된다. 몸 속에 정착한다 하더라도 항상 머무는 것은 아니고, 수시로 왕래하는 것으로 파악함이 정확하다.
오귀굿, 특히 진오귀굿은 사령이 원령으로서 떠돌이넋이 되기 이전에 미리 저승으로 인도하는 예방적 역할을 맡고 있다는 점에서 특징적인 중요성을 보이고 있다. 원령들은 어떤 형태나 방편으로든 원한풀이를 겪지 않고는 ‘복의 넋’으로 될 수 없다는 점은 무속원리가 지배하는 사령신앙에서 두드러지는 측면이다.
그러나 유교적인 조상숭배 속에서의 조상령은 언제나 ‘복의 넋’으로서 숭앙과 외경의 대상이 되며, 원령이 공포의 대상이 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조상의 넋은 후손들과의 관계를 끊지 않고 지속하면서 후손들의 길흉화복에 영향을 미친다고 여겨진다. 묘지를 둘러싼 풍수지리설은 이런 관념이 구체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조상령도 다른 사령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고유한 생활을 영위하지만 죽은 뒤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후손들과의 거리도 멀어져간다. 즉, 오대조 이상은 집안에서 모시는 조상령의 범주를 벗어나는데, 가제인 기제사에서 씨족제인 시제로 옮겨가게 되면서 가내조상령에서 씨족조상령으로 변화된다.
조상령 가운데에서도 시조령은 각별하게 숭배되는데, 특히 왕권신화와 결부되어 현저하게 신격화된다. 예컨대, <동명왕신화> · <박혁거세신화> 등이 그 보기이다. 유교적 숭배의 대상이 되는 조상의 넋과 조상단지에 모셔져 민속신앙적 숭배의 대상이 되는 조상의 넋은 매우 현격한 대조를 보이고 있다. 전자는 평화롭고 안전한 넋인 반면 후자는 재앙을 가져오는 위험한 넋이다.
전자에서는 사령공포보다 사랑과 보살핌의 관념이 우세한 반면, 후자에서는 사령공포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또한, 전자가 일정한 시기에 모셔지는 넋이며 주로 남자들에 의하여 숭배되는 반면, 후자는 수시로 모셔지며 주로 여자들에 의하여 섬겨진다는 차이를 보인다. 이런 여러가지 점으로 미루어볼 때 우리나라의 조상넋에 대한 관념은 분명한 양분법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보여진다.
넋을 물리적 실체로서 간주하여 실증주의적 방식으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넋에 관한 우리 나라 사람의 관념은 전혀 파악해낼 수 없다. 따라서 넋을 우리식으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넋을 이야기하고 넋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의 신념체계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럴 때에만 그런 신념체계 속에서 나타난 넋의 표상이 우리 나라 사람들이 자신을 인식하고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에 상당한 작용을 끼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런 뜻에서 넋은 우리 나라 사람들의 세계관을 형성하고 현실의 모습을 틀 지우는 기본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넋에 부여한 성격은 매우 다양하며 여러 측면에서 고려하고 있다.
다음은 일반적으로 살펴본 넋의 기본적 성격이다. 첫째, 넋은 한 사람에 하나씩 기계적으로 할당되어 있다고 볼 수 없는 점이다. 적어도 두 개 이상의 넋을 지닐 수 있다고 보았으며, 사람에 따라 넋의 수가 달라질 수 있다고 여겼다. 둘째, 복수의 넋 가운데 적어도 일부는 사람이 살아있을 때에도 육신을 자유롭게 벗어났다가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여겼다.
특히 잠자는 경우, 실성한 경우, 혼절한 경우 그런 현상이 뚜렷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잠자는 아이의 얼굴에 황칠을 하면 잠든 사이에 빠져나간 넋이 얼굴을 잘못 보아 딴 데로 가버림으로써 그 아이는 죽게 된다고 보았다.
이런 ‘넋나가기’에 대한 믿음은 ‘자유혼’, 혹은 ‘탈신혼(脫身魂)’의 존재에 대한 믿음과 연결된다. 죽음이란 자유혼이 영원히 몸을 벗어나 되돌아오지 않음으로써 야기된 상태라고 설명되는 것이다.
셋째, 죽음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초혼(招魂)이나 반혼(返魂)의 관념을 야기시킨다. 초혼은 육신을 떠난 넋을 불러들인다는 것으로, 때로는 오래전에 죽어버린 육신의 넋을 부른다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제 갓 육신을 벗어난 넋을 불러들임으로써 사람을 되살릴 수 있다는 믿음에서, “복(復)!복!복!”이라고 외치면서 집주변을 맴돌고 있는 넋을 부르는 것이다.
무당들이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의 넋을 불러내는 ‘넋건지기’도 초혼의 범주에 드는데, 이 경우 쓰이는 바가지나 호리병은 초혼된 넋이 깃들이는 보금자리, 즉 ‘넋의 집’이 된다고 여겨진다. <박혁거세신화>에서 알과 박의 이미지가 겹쳐진 것으로 미루어볼 때, 알 역시 비슷한 구실을 하는 것으로 믿어진 듯하다.
반혼은 넋을 되돌아오게 하는 것으로 저승으로 간 넋이 이승으로 다시 되돌아오면 사람이 살아난다고 믿었다. 그러나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고, 저승을 다스리는 신이나 무당들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왕랑반혼전 王郎返魂傳≫은 반혼의 모티프를 지닌 대표적인 작품의 하나이다. 흔히, 반혼관념에는 불교적인 영향이 있었다고 주장되나 반드시 불교의 영향과 더불어 형성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넷째, 이 반혼관념은 영혼의 환생이라는 개념과 결부된다. 넋이 이승에로 되돌아올 수 있는 것이 가능하다면, 다른 사람이나 짐승으로 되살아나는 넋도 가능하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추리이다. 불교 윤회설과 상당한 친화성을 지니고 있음이 분명하다.
다섯째, 넋과 산 사람과의 관계는 거의 일방통행적이어서 권능을 지닌 넋은 스스로 관계를 맺을 수 있으나 산 사람은 무당의 힘이나 열성적인 치성과 같은 종교적 장치를 거치지 않고는 관계를 맺을 수 없다. 무당의 굿은 그런 종교적 장치 중에서 가장 흔하게 쓰이는 의사소통의 수단이다. 이런 뜻에서 무당을 영매(靈媒)라고 부르는 것이다.
여섯째, 반혼하거나 환생하는 넋은 이미 넋을 지니고 있는 산 사람의 육신에 들어갈 수 있다는 믿음이다. ‘신지핌’, ‘신실음’, 혹은 ‘넋지핌’, ‘넋실음’은 접신(接神)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현상으로 이때 실린 넋은 그 대상으로 된 사람이 무당으로 되느냐, 보통 사람으로 머무느냐에 따라 ‘몸주’, 혹은 ‘허주’라는 명칭으로 불린다. 실린 넋은 실림을 당한 사람의 원래 넋을 지배하고 통제한다고 본다.
일곱째, 산 넋 그 자체는 보기가 힘들지만 종종 생쥐와 같은 작은 동물의 모습을 지니기도 한다고 여겨진다. <혼쥐 설화>가 그러한 예다. 죽은 넋은 이따금씩 생시대로의 모습이나 죽을 당시의 모습 그대로 나타난다고 한다. 보통 귀신이라고 할 때에는 죽은 넋의 나타남으로 이해된다.
여덟째, 죽은 넋은 서로 회집(會集)하는 일정한 장소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되고 있으며, 그것이 바로 저승이란 관념과 연결될 것으로 추측되나, 아직까지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의 저승관에 대하여는 확실하게 밝혀져 있지 않아 잘 알 수가 없다.
이와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는 넋은 사람이 살아 있을 동안에는 육신을 움직이는 삶의 원동력이었다가 죽고 나면 그 자체로서 존재하면서 끊임없이 인간세계와 생동적인 관계를 맺어나간다고 생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