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6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1911년 관립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를 제1회로 졸업한 후 1912년 5월 관립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교원 촉탁, 1914년 12월부터 훈도로 재직, 1918년 4월 관비유학생으로 일본 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 부설 제6임시교원양성소 가사재봉과 청강생으로 입학했다. 1921년 3월 졸업과 동시에 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 가사과 4학년 청강생으로 편입해 1922년 3월 졸업했다. 귀국 후 1922년 4월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의 교유 겸 사감이 되어 1941년까지 재직했다. 1922년 5월 조직된 조선여자청년회에 참여했으며, 1925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재봉교과서인 『재봉참고서』를 집필했다. 1927년 근우회의 발기인으로서 참여했다.
1936년 12월 조선총독부 사회교육과 주최 반도신여성간담회에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조선총독부의 사회교화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1937년 1월 경성방송국 라디오방송 제2부 강사로 활동했으며, 조선부인문제연구회의 상무이사로 참여했다. 1937년 8월에는 애국금차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해 간사로 활동했다. 10월에는 매일신보사가 주최한 출정용사 가족 간담회에 참석했고, 11월에는 경성보호관찰소 촉탁보호사가 되었다. 1938년 7월에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인으로 참여해 이사가 되었으며, 국민조선총동원 경성부연맹의 상담역이 되었다. 또 9월에는 조선부인문제연구회의 강사로서 시국인식 강화를 위한 순회강연단에 참여했다.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참사, 1941년 2월 조선청년단 참여, 1941년 9월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이 되었다. 1944년 9월 대일본부인회조선본부가 주최한 간담회에 참여했고, 11월에는 징병과 징용을 홍보하기 위해 조선교화단체연합회에서 조직한 순회강연단의 강사로 참여했다. 1939부터 1945년까지 전통한국의 궁중생활연구에 몰두해 운현궁(雲峴宮)과 사동궁(寺洞宮)을 출입하면서 궁중의전·궁중요리·궁중풍습을 전수받는 데 열중했다. 일본정부로부터 쇼와천황즉위기념대례장(1928), 경성부 교육효적자 표창(1930)을 받았다.
해방 이후 1945년 10월 경성여자사범학교 교장, 11월 조선교육심의회 사범교육위원이 되었고, 1946년 1월 1일에는 풍문여고에서 개최된 반탁부녀대회에서 부의장에 선임되었다. 1947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수로 임용되었고, 1949년 우리나라 여자중학교에서는 처음 채택된 『가사』 교과서를 저술했다. 1950년 대한여학사회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나, 한국전쟁 중인 1950년 8월 납북되어, 1955년 9월 25일 사망했다.
손정규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1·13·17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8: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537∼574)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