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은 지구에 가장 가까운 위성이자 우주적 생명력의 전형으로 믿어진 종교상징물이다. 달의 차고 기움에 따라 조석간만이 크게 차이나는 우리의 지형적 특성상 달의 영향력은 매우 컸다. 한국인의 우주론·세계관·인생관·생활습속 등에 미치는 영향은 태양보다 달이 훨씬 컸으며, 신앙의 대상으로도 태양과 동등한 일월지신의 자리에 있었다. 달의 영향을 직접 받는 어로작업은 물론이고 농경생활도 계절에 어긋나는 것을 보완하기 위해 24절기를 별도로 두면서까지 음력에 맞추어 농경을 영위할 정도였다. 설날·대보름·추석 등도 달 중심의 대명절이고 문학을 비롯한 예술에서도 달은 정서적·심미적 상징의 중심이었다.
지구에서 달까지의 평균거리는 38만 4400㎞로 지구에서 태양까지 거리의 400분의 1이다. 지구에서 보는 크기는 약 0.5°로 태양과 같으나, 거리가 다르기 때문에 실제 크기는 지구의 약 4분의 1(반지름, 1,740㎞), 질량은 지구의 약 81분의 1로, 다른 행성의 위성에 비해서 그 비율이 월등하게 커서 지구와는 형제 행성으로 볼만하다.
달이 지구를 도는 주기인 27.32일을 항성월(恒星月)이라고 한다. 달은 궤도 위에서 태양에 대한 위치가 달라짐에 따라 햇빛을 반사하는 면의 모습이 달리 보이기 때문에, 차고 기우는 삭망(朔望)의 변화가 눈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래서 예로부터 이 변화의 주기인 29.53일, 즉 삭망월이 알려져 음력의 기준으로 쓰이게 되었다. 삭망월이 항성월보다 약 2일 긴 까닭은 지구의 공전 때문에 태양이 360°/365일=약 1°/일씩 움직이고, 달은 360°/27.32일=약 13°/일씩 움직여서, 결국 하루에 달이 약 12°씩 앞서가서 29.53일 지나면 12°×29.53=360°로 되어 보름달이나 삭(朔)이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달이 태양과 같은 방향에 있을 때는 지구가 달의 그늘을 향하게 되므로 안 보인다. 이것이 삭으로 음력 초하루에 해당하고 7일경에 달의 서쪽 반이 보이는 반달[上弦], 보름에는 달이 태양의 반대쪽에 와서 둥근 전면이 보이는 망(望)이 된다. 보름이 지나면 달의 서쪽(오른쪽)이 이지러진다. 삭망월(29.53일)을 기준으로 하는 음력을 쓰면 우선 0.53일을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큰달 30일과 작은달 29일을 교대로 써서 평균 29.5일을 쓰는 셈이 된다. 그러므로 음력의 1년, 즉 1태음년(太陰年)=29.5일×12=354일이 되어 양력의 1년인 1태양년=365.24일보다 약 11일이 짧다.
1태양년은 계절이 되돌아오는 주기이므로, 음력을 그대로 쓰면 1년에 약 11일씩 3년에 약 한 달, 9년이면 한 계절이 어긋나서 달력으로는 봄이지만 실제 계절은 아직 겨울인 경우가 생긴다. 예로부터 이러한 일을 바로 잡기 위하여 대략 3년에 한 번 윤달을 끼워서 음력 날짜와 계절이 잘 맞도록 조정을 하였는데, 이것이 우리가 쓰고 있는 태음태양력이다.
윤달을 끼우는 방법으로 예로부터 알려진 것은 19년7윤법인데, 19태음년에 7개의 윤달을 끼우면 12×19+7=235삭망월로 19태양년의 일수(6,939.6일)와 같다. “윤달에 태어난 사람은 19년만에 제 생일을 되찾는다.”는 말은 음력으로 생일을 지내는 사람에게는 태어났던 그 계절에 생일을 맞이할 기회가 19년에 한 번 있다는 뜻이다. 또, 양력의 생일을 쓰던 사람이 필요(혼사 · 점복)에 따라 음력 생일을 찾는 일이 허다한데, 만 19세(또는 만 38세) 때 생일의 음력 날짜가 바로 그것이다. 19년만에 음력과 양력의 날짜가 발이 맞게 되기 때문이다.
흔히 “음력이 계절에 더 잘 맞는다.”고 하는 사람이 있지만, 이것은 주객이 뒤바뀐 이야기가 된다. 1년의 계절을 24등분한 24 절기가 쓰이게 된 까닭은 음력으로는 계절을 정확히 알 수 없는 데 있다. 24절기는 양력으로 해마다 같은 날짜에 가깝지만 음력으로는 날짜가 크게 어긋난다. 농사를 짓는 데는 늘 음력의 날짜가 아니라 24절기가 그 길잡이가 된다.
음력은 계절과 어긋나는 결함이 있으나, 해변의 어촌에서는 밀물과 썰물의 변화가 음력 날짜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음력이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음력 날짜에 따라 밀물 때의 물의 높이는 한 매(물) 두 매 등으로 늘어나고, 또 줄어들 때는 한 꺾음 두 꺾음 등으로 나타내는 풍습이 어촌에 전해지고 있다.
조석(潮汐)이란 해변에서 누구나 경험하는 밀물과 썰물로 해면의 높이가 변하는 현상인데, 그 원인은 주로 지구에 가장 가까운 달이 바닷물에 미치는 인력에 있다.
[그림 1a] 에서 달의 인력은 가까울수록 크기 때문에 A, O, B의 순으로 크다. 지구의 중심 O에서 보면 [그림 1b], A는 O보다 더 끌리고 B는 O보다 덜 끌리는 결과 A와 B는 O에 대해서 바깥쪽으로 움직이게 된다. 그래서 달에 가까운 A와 그 반대쪽 B에서 밀물, 그 중간에서는 썰물이 일어나고, 지구의 자전에 따라 A지점은 약 12시간 뒤에 B지점으로 오게 되어 다시 밀물이 일어난다. 즉, 밀물과 썰물은 하루에 두 번씩 일어난다. 달보다 먼 태양도 바닷물에 조석을 일으키지만 그 영향은 달의 약 2분의 1 정도로 작다.
그래서 달과 태양의 인력이 서로 돕는 삭과 망에서는 여느 때보다 밀물이 크게 일어나서 사리[大潮], 달과 태양의 인력이 서로 방해하는 반달일 때(상현과 하현)는 여느 때보다 적은 밀물, 즉 조금[小潮]이 일어난다.
인천의 경우 사리 때 해면의 높이는 약 9.5m, 조금일 때는 약 4.5m이다. 밀물과 썰물은 앞에서 말한 달의 위치에서 즉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약간의 지체가 있다. 이는 바닷물이 움직이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달이 정남에 보일 때부터 만조가 일어날 때까지의 시간은 곳에 따라 약간씩 다른데, 인천만의 경우 평균 4시간 28분이다. 음력날짜와 만조 · 간조 때 해면 높이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그림 3](인천만)에서 볼 수 있다. 사리와 조금이 각각 삭망과 상현 · 하현에서 지체되는 까닭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달은 한국인의 우주론 · 세계관과 인생관 그리고 생활습속 등에 걸쳐서 매우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태양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중대한 것이다. 전통 한국사회는 실질적으로 ‘달 중심론’이라고 할만한 문화를 지니고 있었다.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저기저기 저달 속에 계수나무 박혔으니/금도끼로 찍어내고 옥도끼로 다듬어서/초가삼간 집을 지어 양친부모 모셔다가/천년만년 살고 지고 천년만년 살고 지고.” 이것은 누구나 즐겨 부르는 동요이다. 이만큼 사랑을 받는 동요도 흔하지 않을 것이다. “낮에 나온 반달……”로 시작되는 또 다른 동요까지 생각한다면 한국동요 속에 나오는 달은 유달리 휘영청 밝게 빛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달이 동심만을 일깨워 시정(詩情)에 젖게 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시정과 종교적 상상력을 촉발한 달이 농경생활을 영위하던 전통 한국사회에서 생활력의 원점이자 기준을 이루면서, 한국인의 생활과 생명의 기복이며 리듬을 결정짓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들에게는 달을 좇아 이루어나가던 삶이 있었고 또 목숨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네는 ‘달의 삶’, ‘달의 목숨’을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전통 한국인의 생체맥박(biorhythm)이나 생활맥박을 이야기할 때, 달은 근본적으로 그 맥박이나 맥동(脈動)의 동기이자 기준이었다는 것은 매우 강조되어야 한다. 전통사회의 한국인들은 하늘을 우러러 달에 그들의 소망을 붙이고 살아왔듯이, 달을 생각하면서 땅을 일구어왔던 것이다. 그것이 곧 우리들이 누려온 ‘달의 삶’이요, ‘달의 목숨’이다.
달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 밝음과 그 원만함을 이야기한다. 달은 광명이요 원융(圓融)함, 그것이다. 그러나 달빛은 햇볕과는 다르다. 해의 빛은 볕이라고 해도, 달의 빛은 볕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볕은 볕살 · 뙤약볕이라는 말들이 의미하고 있듯이 작열하는 뜨거움이다. 초열(焦熱의 뜨거움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달빛을 이야기할 때, 그 은은함이나 부드러움을 즐겨 지적한다. ‘희부옇다’ · ‘어슴푸레하다’는 것은 모두 달빛을 두고 하는 말이다. 안개 낀 달빛이며 이내가 낀 달을 애월(靄月)이라고 별도로 일컫는 것도 달빛의 은은함과 부드러움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부드러운 빛, 요요한 빛이라서, 달빛은 포용하고 감싼다.
푸른 물빛과도 같은 달빛이 지닌 시각적인 차가움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달빛에서 푸근함과 은근함을 느끼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따라서, 햇빛과는 달리, 사물들을 서로 확연하게 개별화하거나 구분하기보다는 서로 어울리게 하고 녹아들게 한다. 달빛은 구별하는 빛이 아니라 융합하는 빛이다. 달을 원융하다고 할 때, 그 원융이라는 말에는 이 융합의 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햇빛과는 달리 달빛은 어둠과 함께 있다. 달빛은 어둠을 몰아낸다기보다는 어둠의 일부를 밝히면서 어둠의 심지이기나 하듯이 어둠 한가운데서 어둠과 함께 공존하는 것이다. 달빛이 신비주의적인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은 바로 이 속성 때문이지만, 이 속성으로 말미암아 달빛의 원융성이 한결 드높아질 수 있는 것이다.
한편, 달의 둥긂은 원만이요, 구족(具足)이다. 갖출 것 다 갖춘 아주 충족한 상태이다. 원형 그 자체가 이미 원만구족의 상징이지만, 그와 같은 원형의 상징성을 달만큼 완벽하게 갖춘 것은 달리 없다. ‘달이 찬다. ’고 한 것은 바로 이 상징성에 대하여 암시하고 있다. ‘찬다’는 것은 기운 것이 차고 모자라는 것이 꽉 차 오른다는 것이다. 무엇인가가 아주 속이 배게 영그는 것을 ‘찬다’라고 한다. “달도 차면 기우나니……”라는 민요와 같이, 달은 기욺을 함께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참이 더욱 돋보이게 된다.
달은 그 둥긂으로 말미암아 원만과 구족함의 상징이 되기는 하지만, 이내 찼다가 기우는 것이 달이다. 기욺과 참을 번갈아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달의 결영(缺盈)은 연속적이고 동시에 반복적이다. 초승달에서 반달로, 다시 보름달로 옮겨가기까지 그 둥글어져 가는 과정이 빈틈없이 점진적이고 연속적이다. 그것은 생명의 점차적인 성장과도 같은 것이다. 사람으로 비유하면 아기에서 어른으로 자라나는 과정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던 달은 거꾸로 보름달에서 반달로, 그리고 다시 그믐달로 이울어가게 된다. 이것은 역으로 생명의 퇴조와도 같은 것이다.
장년에 다다른 한 인간이 늙은이를 거쳐 죽음에 다다르게 되는 과정과도 같은 것이다. 한편, 달은 이와 같은 참과 이욺을 주기적으로 되풀이한다. 그믐달이 사라지고 초승달이 다시 돋아나기까지 달이 완전히 모습을 감추는 사흘 동안을 계산하게 된다면, 이러한 결영의 반복은 마치 하나의 생명이 성장, 퇴조하고, 죽음에 다다르는 일을 되풀이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리하여 달은 매우 높은 상징성을 가지게 된다. 죽음을 아주 면하고 있는 것은 아니어서, 비록 죽음에 든다고 해도 다만 일시 죽음에 들 뿐, 재생과 회생을 거듭하는 ‘죽음 있는 영속하는 생명’, 그것을 달은 상징하게 되는 것이다. 오직 한번, 지상의 삶을 누릴 뿐, 이내 죽음에 들고나면 그뿐이라는 자기인식을 가지게 된 인간들에게 달의 상징성은 아주 결정적인 것이 된다.
그리하여 인간에게 지각된 달의 상징성 가운데, ‘죽음 있는 영속하는 생명’의 상징성이야말로 가장 값지고 중요한 것이 된다. 이리하여 달은 ‘융화하는 빛’, ‘원만하고 구족한 원융성’, 그리고 ‘죽음 있는 영속하는 삶’ 등을 상징하면서 인간들의 머리 위, 밤의 창공에 떠 있었던 것이다. 이 밖에 달은 그 밝음으로 해서 정화하는 힘의 상징으로 간주되었음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죽음 있는 영생하는 삶’의 상징인 달은 말할 것도 없이 재생의 상징이 되고, 생명력 그 자체의 상징이 될 수 있었다. 특히, 달의 결영과 바다의 조수의 관계가 알려지고, 또 달의 결영의 주기와 여성의 경도의 주기가 상관성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달이 지닌 생명력의 상징성은 한층 더 강화된다. 달과 물과 여성이 더불어서 생명력 상징의 삼위일체가 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달의 동물이라든가, 달의 춤이라든가 하는 관념이 파생되는 근거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예컨대, 신라의 유물인 토우장식장경대호(土偶裝飾長頸大壺)의 어깨부분에는 현악기를 켜고 있는 사람 둘레에 개구리 · 뱀 · 자라 등이 배치되어 있는데, 이들은 하나같이 이른바 ‘달의 동물’들이다.
겨울에 동면하였다가 봄에 잠을 깸으로써 지상에 다시 나타나는 생리뿐만 아니라 물속을 자맥질할 수 있는 그 생리로 인해서 이들은 죽음과 삶을 되풀이할 수 있는 생명체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이들 동물이 달의 동물로 간주될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면, 우리들은 ‘토우장식장경대호’의 토우조형들로 꾸며진 구도를 통틀어서 ‘봄의 제전’, ‘봄의 축제’가 연행되고 있는 현장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삼국사기』는 신라가 문열림(文熱林)에서 일월제(日月祭)를 시행하였다고 전해주고 있다. 그런가 하면 중국의 『수서(隋書)』와 『신당서(新唐書)』는 신라의 왕이며 신료들이 설날에 일월신에게 경배드렸음을 우리들에게 확인시켜주고 있다. 자세한 설명이 없기는 하지만, 이들 기록은 신라사회에 일월(신)숭배가 있었음을 전해주는 것만으로도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는 매우 귀중한 것이다.
다른 기록에서 고구려인들이 별을 숭앙하였다는 것, 우리 상고대사회가 보편적으로 천신숭배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 등을 더불어 확인할 수 있거니와, 이들을 통틀어 고려할 때, 삼국시대 및 그 이전의 상고대사회에서 시행되었던 천신신앙 및 천체신앙의 목록이나마 갖추게 되는 셈이다.
그리고 『삼국유사』에서는 ‘해와 달의 정(精)’이라고 표현된 연오랑(延烏郎)과 세오녀(細烏女)에 관한 기록을 볼 수 있다. 이 기록에서 연오랑과 세오녀라는 남녀의 짝을 해와 달의 짝에 대응시킨다면, 우리들은 쉽게 남자인 해의 정과 여자인 달의 정을 생각해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연오랑 · 세오녀의 기록에 보이는 해와 달의 정을 『수서』나 『신당서』에서 신라인들이 경배를 드렸다는 일월신과 맺어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 중요시되어야 할 것은 신라사회가 여성으로 간주된 ‘달의 정’을 신봉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삼국사기』는 여러 곳에서 태백범월(太白犯月) · 태백입월(太白入月) · 태백습월(太白襲月) · 혜성입월(彗星入月) · 유성범월(流星犯月) · 형혹범월(熒惑犯月) · 토성범월(土星犯月), 그리고 월범필(月犯畢) 등의 기록을 보여주고 있거니와 이들은 일식(日食)과 마찬가지로 이른바 천괴(天怪) 혹은 성괴(星怪)에 속하는 것으로, 각각 왕국을 위하여 매우 상서롭지 못한 조짐으로 해석된 것들이다. 특히, 마지막에 보인 월범필을 뺀 나머지 사례들은 하나같이 별들이 달을 침범한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 만큼, 그 천괴들은 모두 월괴들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고, 나아가 달이 불가침의 대상으로 숭상되었던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따라서, 삼국시대 달은 천문관찰의 대상 중에서도 매우 중요한 대상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사실은 달이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탈해왕이 호공(瓠公)으로부터 계략을 써서 빼앗았다는 월성(月城)은 다음 파사왕 때 축성, 완성되는데, 이런 사례에서도 우리들은 간접적이기는 해도 신라인들이 달을 숭배함에 접하게 된다.
한편, 상고대의 고분벽화에서도 적지 않게 해와 달의 그림을 보게 된다. 고분벽화의 우주구성론을 다시 추측하기는 힘들지만, 부분적인 자료들을 망라해서 천계(天界)를 이루고 있는 형상들을 나열하면, 천왕(天王) · 비천상 · 선녀 · 비룡(飛龍) · 새[鳥] · 운문(雲文), 그리고 28수를 비롯한 별들과 해와 달이다. 이 가운데 해와 달은, 같은 고분 안의 사방벽이나 천장에 동시에 그려질 경우, 대체로 동서로 갈라져서 자리잡고 있다. 가령, 공주 송산리(公州宋山里) 제6호분(第六號墳)에서는 해와 달이 남쪽 벽 상부의 주작 좌우에 배치되어 있거니와, 이것은 정확하게 동서에 대응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같은 벽면상이 아니고 서로 다른 벽면이나 천장면에 해와 달이 그려질 때는, 으레 동면에 해가, 그리고 서면에 달이 배정되고 있다. 여기서 해 : 달=동 : 서의 등식을 얻게 되거니와, 이것은 고분을 축조한 사람들에게서 달의 방위가 해의 방위와는 상대적으로 서쪽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달의 방위가 달이 지닌 속성을 암시하고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예컨대, 서방에 지닌 상징성들, 즉 어둠 · 죽음 · 피안 · 안식 등의 관념을 달에 붙여서 연상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은 월명사(月明師)가 그의 「 원왕생가(願往生歌)」에서 달을 서방과 결부시키기 이전부터 존립한 달의 상징성으로 볼 수 있다. 말하자면, 불교적인 서방관념이 달과 연관되기 이전의 보다 더 원초적인 상징성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해와 달의 형상은 강하게 중국 신화의 영향을 받고 있다. 가령, 태양이 거의 예외 없이 세발까마귀[三足烏]를 그 안에 지닌 원형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은 그 전형적인 본보기이다. 해의 경우도 가령, 집안 통구 사신총(集安通溝四神塚)에서 뱀 꼬리에 사람 몸통과 머리를 지닌, 말하자면 반사반인(半蛇半人)이 해를 머리에 인 형태로 그려져 있어 문제를 던지고 있듯이, 달의 경우도 만만찮은 문제가 그 형상을 두고 제기될 수 있을 것 같다.
대다수의 보기에서 달이 두꺼비나 토끼가 안에 그려진 원형으로 표현되는 데 비해서, 온천매산리사신총(溫泉梅山里四神塚)의 도형은 아주 특이하다. 만일, 이 곤충처럼 보이는 도형이 두꺼비라면 이 사신총에서 달은 단적으로 두꺼비 자체와 동일시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 두꺼비 둘레, 네 곳에 그려진 고리무늬들은 무엇을 나타내고 있는 것일까?두꺼비 주변의 벽면이 공백으로 남겨져 있어 이 고리무늬들을 달리 연관시킬 데가 없을 뿐 아니라, 빛깔도 서로 같아서 고리무늬와 두꺼비로 연관지어서 생각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네 곳의 고리무늬를 이으면 둥근 원형이 그려지게 되는 것에 유념하게 된다면, 이 고리무늬들이 결국은 달의 둥근 외곽선의 부분들을 형성하고 있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 말하자면, 이 무늬들은 달의 외곽원형의 단편적 표현인 셈이다. 이와 같은 부분적인 표현은 달의 이욺과 참, 곧 결영의 표현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울어 삭아지기도 하고 다시 차 올라서 제대로 둥글어지기도 하는 달의 결영을 그 고리무늬로 나타낸 것이라고 보인다.
그런가 하면, 평안남도 순천군(順川郡) 북창리(北倉里)에 있는 천왕지신총(天王地神塚)의 보기가 그렇듯이, 소용돌이의 둥근 물결무늬를 무수히 겹쳐서 그린 달그림이 보이고 있어 퍽 흥미롭다. 이것은 달이 이울었다가 거듭 둥글어져 가는 힘을 상징하고 있거나, 아니면 달이 지닌 물에 견줄 만한 속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본다.
이와 같이, 도형상의 특성을 기반으로 해서 추정을 한다면, 달은 해에 비해서 훨씬 다양하고도 역동적으로 표현되어 있음을 지적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달은 해와는 달리 그 상징성이나 상상적인 심상(心像)에 있어서 매우 복잡한 감정적 반응을 촉발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삼국시대 이전부터 달은 해와 함께, 왕실이 종교적 의식을 바치는 신앙의 대상으로서, 혹은 그 신앙과 관련된 특별한 천체관측의 대상으로서 존립해왔다. 상고대의 일월(신)신앙은 고려조와 조선조를 거쳐 고대의 민속신앙에까지 이어지게 된다. 무속신앙에서 남녀의 짝으로 표현되는 일월천신(日月天神)은 연오랑 · 세오녀라는 신라적인 ‘일월의 정(精)’이 오늘날에 재현된 모습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 밖에 오늘에 남겨진 상고대 일월신앙의 자취는 제주 무속에서 비교적 풍부하게 찾아볼 수 있다. 제주무속에는 ‘ᄂᆞᆯ궁전 · ᄃᆞᆯ궁전’으로 불리고 있는 일월신 이외에 일월조상(日月祖上)이 신의 위계에 올라 있다. 이 가운데, 날궁전과 달궁전은 문자 그대로 신격화된 해와 달이지만, 일월조상은 이와는 다르다.
일월조상은 한 집안 또는 씨족의 수호신이라는 성격이 강하므로, 조상 앞에 붙은 일월이라는 말은 일종의 수식적인 관형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그러므로 오늘날 민속신앙에서 흔히들 “천지신명이시여! 일월성신이시여!”라고 기축(祈祝)될 때, 그 일월에 바치는 신앙의 심층에는 삼국시대 이전의 상고대부터 퇴적된 오랜 전통이 있음을 놓쳐서는 안될 것이다.
음력, 곧 태음력은 말할 것도 없이 ‘달의 역(曆)’이다. 물론, 음력의 음(태음)은 단순히 달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양(태양)과 함께 우주적 조화의 궁극적인 이원소(二元素)를 이루고 있는 것이 음이다. 그러나 달은 그 태음의 정(精)으로 간주된 것이기 때문에 태음력을 곧 ‘달의 역’으로 간주해도 무방할 것이다. 전통 농어촌사회에서 달의 역인 음력은 크게는 생활력이자 농사력이었다.
이것은 한국인의 집단적인 삶의 율동 그 자체가 달의 역에 의하여 결정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만큼 우리는 달을 따라 살고 달을 따라 농사를 지은 것이다. 그럼으로써 달의 결영의 주기를 삶의 리듬으로 삼았다는 것은, 한국인에게 있어서는 달의 결영의 주기가 그들의 생리적 또는 생물적인 삶의 리듬을 결정한 것만이 아니고, 그와 동시에 문화적인 삶의 리듬을 결정하기도 하였다.
달의 역이 생리적인 삶의 리듬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삶의 리듬까지를 지배하였다는 사실은 무엇보다도 이른바 세시풍속(歲時風俗)에서 분명해진다. 세시풍속이란 문화적인 삶의 리듬을 좌우하는 생활력과 농사력을 따라 영위된 풍속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세시풍속은 달의 역에 따른 공동체적인 ‘통과의례(通過儀禮)’이다. 그것도 극히 역서적(曆書的)이고도 계절적인 통과의례이다.
모든 세시풍속에 획일적으로 해당될 수는 없으나, 그 중의 상당수는 계절적인 전환기를 관리하는 생활제도이다. 자연질서에 순응하면서 자연질서가 보장하고 있는 생산적인 결과를 촉진함으로써 전환기를 능동적으로 넘기는 것이 다름 아닌 세시풍속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상원(上元)의 달에 집중된 각종 풍속에 의하여 분명해진다.
달의 명절인 대보름(上元)과 중추(中秋)는 서로 짝지어져서 농사력의 시작과 결말을 뜻하고 있다. 상원이 달에게 바치는 농경의 예축(豫祝)을 위한 명절이라면, 중추는 농경의 수확을 달과 더불어 갈무리하는 명절이기 때문이다. 참다운 농사력의 시작이 상원이고 그 끝이 중추라고 본다면, 우리의 농사력은 달로 시작되고 달로 끝나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 정월초하루부터 보름까지를 통틀어서 ‘설쇠기’로 볼 수 있다. 초하루에서 비롯된 각종 기년 행사(祈年行事), 말하자면 ‘해빌이’가 상자일(上子日)에서 상해일(上亥日)에 이르는 12일 동안의 기축(祈祝)과 금기(禁忌)로 다져진 뒤 보름날에 다다라서 절정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정초 상자일에서 상해일에 이르는 12일이 12개월의 전체(代喩)임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그 12일을 포함하여 초하루부터 상원까지의 15일 동안 기년 행사가 점층적으로 진행되다가 대보름에 이르러서 대단원에 올라서게 되는 것이다. 보름 동안의 설쇠기는 고사와 기축, 그리고 놀이로 이어지는 명절이다. 그것은 종교적인 축제의 기간이라서, 일상적인 생활의 시간과는 구별되는 별도의 시간이다. 대보름은 그 일상적인 테두리 바깥에서 벗어난 날들의 막음문이자, 또 한편으로는 일상적인 테두리로 들어서는 시작의 날이기도 한 것이다.
정월초하루에서 보름에 이르는 각종 기년 행사의 점층적인 진행이 달이 둥글어져 가는 과정, 즉 달의 점층적인 진행과 병행하고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달에게 일년농사의 풍족을 미리 예축하는 상원행사는 달을 대상으로 한 점복행위(占福行爲)와 짝지어져 있다. 이것은 ‘달의 역’에 어울리는 한 해의 참다운 시작이 정월대보름임을 보여주고 있다. 정월대보름은 한 해의 첫 만월이기 때문이다. 다른 달의 보름은 작은 보름이라는 것을 상대적으로 전제하지 않고는 상원에 대자가 붙을 수 없다. 대보름의 대가 큰 대자라는 것은 상원의 중대함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들은 또 하나의 보름인 추석이 ‘한가위’라고 불리고 있음을 연상하게 된다. 한가위의 ‘한’ 또한 대(大)나 다(多)를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일년 동안 열두 번 있게 되는 보름 가운데 상원과 중추의 보름에만 ‘대’나 ‘한’을 씌워서 이름 붙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두 보름이 특별한 보름임에 대한 증거이다. 상원은 농사력이 시작되는 참다운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보름이라는 점에서, 한가위는 한 해의 농사력이 마무리되는 보름이라는 점에서 중대한 의의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들은 한 해 동안 두개의 대(한)보름을 가지고, 그것으로써 농사력의 시작과 끝으로 삼을 만큼, 만월에 대한 믿음과 꿈을 가꾸어왔던 것이다.
그것은 곧 풍요와 번영과 생명력에 대한 믿음이자 꿈이었던 것이다. 보름달이 둥글고 밝은 만큼, 우리들의 믿음과 꿈도 부풀고 또 빛을 더하였던 것이다. 대보름날은 세시풍속 전체로 볼 때, 가장 부푼 날, 가장 둥근 날이다. 그것은 세시풍속에 따르는 어떤 명절도, 대보름만큼 풍족하고 다양한 고사며 점치기, 그리고 놀이를 갖추고 있지 않음을 의미하고 있다. 그만큼 대보름은 명절 중의 명절이다. 대보름날 각종 행사의 핵은 아무래도 달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세시풍속이 일반적으로 그렇듯이, 달에 대한 기년 행사도 점치기와 기축과 놀이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이 행사는 따로따로 치러지기보다는 하나로 어울려 복합적으로 치러지는 것이다.
달점은 달바라기[望月]와 함께 행하여진다. 대보름달로 일년농사의 풍겸(豊歉), 곧 잘되고 못됨을 점치는 것은, ① 달이 떠오르는 시간, ② 달이 떠오르는 방위와 위치, ③ 달의 빛깔, ④ 달의 모양(두껍고 얇음과 여물고 여림.) 등 네 가지를 기준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기준을 다시 가지가지 대립적 양분(兩分)의 원칙에 비추어서 점을 치게 되지만, 정상/비정상, 예정/예정바깥, 두꺼움/얇음, 여묾/여림, 흼/붉음, 밝음/어둠, 맑음/흐림, 물기/메마름 등의 양분법은 원칙적으로 풍/겸에 대응되는 것이다.
이 가운데서 빛깔에 관한 부분만 자세히 살펴보면, ‘맑음 · 푸름 · 흼 · 묽음 · 눅음 · 무름’ 등이 ‘흐림 · 붉음 · 됨 · 누렁’ 등과 대립하고 있다. 이 대립법은 여실하게 보름달이 수성(水性), 곧 물다움을 많이 띨수록 더욱더 풍성하게 풍요를 상징하게 됨을 보여주고 있어서, 달과 물 사이의 관계가 깊음을 보여주고 있다. 달의 풍족은 곧 물의 풍족을 의미하는 것이다. 대보름의 해운보기나 달점은 이같이 달맞이 또는 달바라기로만 치러진 것은 아니다. 여러 가지의 달그림자점이 있었으니 달빛을 받아서 땅바닥에 지는 사람 · 손가락 · 작대기 · 절구 등의 그림자로 점을 쳤는가 하면, 특수하게는 물에 지는 사람의 그림자를 보고 점을 치기도 하였다. 이 경우 그림자의 실(實)/부실(不實)이 문제가 되었거니와 그림자의 선명도를 따라 길/흉이 결정되었던 것이다.
대보름날에 사람들이 달바라기를 하면서, 해운을 빌고 더불어서 해운을 점치기도 한 것이라면, 이른바 ‘ 달집의 불’로는 놀이하면서 해운을 빌었던 것이다. 달집의 불은 주술적인 놀이이다. 일례로, 전라남도 구례지방 산간마을의 경우를 보면, 볏짚과 솔가지로 움막 같은 꽤 큰 달집을 짓고 달집 위에는 액을 없애기 위한 연을 단 뒤에 달이 떠오르는 때를 기다려 거기에 불을 질렀던 것이다.
둘레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는 묵은 저고리 동정이나 깃을 뜯어서 불붙은 달집에 던져 넣으면서 액막이를 빌었다. 그것은 묵은 오예(汚穢)를 씻음을 의미하였거나 아니면 신체 일부에 감염된 옷을 바침으로써 자신의 육신의 일부를 신령에게 바침을 의미하였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불 둘레에서 농악을 울리는가 하면, 더러는 청소년들이 그 불 위를 제 나이만큼 수를 정해서 뛰어넘기도 하는 것이었다. 불길이 기세 좋게 타올라야만 해운이 좋다고 믿었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해운 점치기의 뜻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달집의 불기운은 겨울의 얼음과 대비시키면 그 뜻이 분명해진다. 새해를 맞아서, 대지에다 봄기운의 더움을 지레 지피는 주술, 그것이 곧 달집에 불놓기이다. 말하자면 ‘달집의 불’에서 달의 풍요의 기운인 대보름달은 이제 보장된 봄기운을 지상에다 옮겨놓는 주술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물론, 정월대보름날의 세시풍속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예컨대,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전라남도편)에는 대보름의 행사로 자그마치 80여가지가 보고되어 있을 정도이다. 그 80여가지가 한 동아리로 묶여서 재연될 대보름날의 서낭굿이나 별신굿까지 통틀어서, 이들 상원의 세시풍속들은, 요컨대 한 해의 첫 만월이 상징할 신생력이나 재생력을 확실하게 지상의 섭리로 옮겨놓기 위한 주술적인 점치기, 기축, 그리고 놀이의 복합이었던 것이다.
상원 세시풍속의 그 같은 의의는 상원 세시풍속의 일부인 「 강강술래」에서도 유추될 수 있다. 오늘날 우리들은 「강강술래」를 단순히 아름다운 민속무용으로만 알고 있으나 그것은 원천적으로 ‘달의 춤’이었던 것이다. 민간어원설에 불과한 이른바 임진왜란 기원설에 오염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 춤의 형상 자체가 이미 ‘달의 춤’임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강강술래」는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호남의 남서해안지대에 퍼져 있는 민속집단무용이다. 주로 대보름과 한가위에 노는 이 춤은 여성들만의 춤이라는 특색을 갖추고 있기도 하다. 후렴이 지역에 따라서 “강강 수월래”, “강강 술래”, “광광 술래”, “광광광 술래”로 달라지듯이, 춤사위며 춤의 형태에도 약간의 지역적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강강술래」는 원칙적으로 동그라미춤[圓舞, 또는 圓陣舞]이다.
많은 수의 여인들이 손에 손을 맞잡고 동그라미를 그리면서 휘돌아나가는 모양은 민속무용이 범세계적으로 고루 갖추고 있는 형태상의 특색이다. 전설로는 삼한 때부터 전하여졌다고 하는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의 화관무(花冠舞)가 원진무인 만큼, 우리 나라에서도 원진무의 유래는 상당히 오래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마디로 동그라미춤이라고는 하지만, 「강강술래」가 꼭 동그라미만을 그리면서 춤추는 것은 결코 아니다. 고사리 껑자(고사리 꺾자), 덕석몰이(덕석말이), 청어 영짜(청어 엮자), 문 열어라, 지와밟기(기와밟기), 가마등등, 닭살이(쥔쥐새끼), 남생아 놀아라 등 모양새가 각각 다른 여러 가지 놀이춤의 총칭이 「강강술래」인 만큼, 「강강술래」의 형태를 일괄적으로 묶어서 원무라고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여러 놀이춤들은 하나같이 상형성(象形性)을 지니고 있다.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행하고 있는 실제적인 육체적 행동을 모방하는 모방춤 · 흉내춤이라는 성격들을 고루 갖추고 있다. 그 만큼 「강강술래」에 포함된 각종 놀이춤들은 현실성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 그 가운데는 ‘문 열어라’나 ‘고사리 껑자’와 같이 직선 내지 그에 버금할 가늘고 긴 꼴의 춤도 물론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힘드나, 「강강술래」를 전체적으로 보아 원형성이 우세한 것은 사실이다. 더욱, ‘잦은 강강술래’와 ‘늦은 강강술래’는 박자 빠르기가 다를 뿐 둘 다 전형적인 동그라미춤이다.
거기에다가 ‘덕석몰이’나 ‘청어영짜’들이 가세하게 되면 「강강술래」 전체의 원형성은 더욱 두드러지게 된다. 그러나 ‘덕석몰이’와 ‘청어영짜’는 또 다른 문제를 제기한다. ‘덕석몰이’ 또는 ‘청어영짜’는 그 이름이나 혹은 그 상형성만 가지고 보아도 단순한 동그라미는 아니다. 덕석을 말아가듯이, 청어(靑魚)를 둥글게 엮어가듯이 춤추기 때문에 그것은 나선형일 수밖에 없다.
제일 끝에 서 있는 사람이 제일 앞에 서 있는 사람을 중심으로 큰 원을 그리면서 돌면, 둘째 번 사람이 첫째 번 사람을 두 팔로 감게 된다. 이렇게 몇 번이고 계속하면 한 덩어리로 뭉치게 되는데, 이 때 몇 번이고 노래부르면서 덕석이 다 말아지면 풀기 시작한다. 푸는 방법은 말 때의 반대로 한다. 결국, 덕석을 감았다 풀었다 하는 시늉으로 춤추는 만큼 나선형 모양과 같은 도형을 그리게 되는 것이 ‘덕석몰이’이다. ‘청어엮기’도 노래가사만 다를 뿐, 춤의 형태는 이와 다를 바 없다.
이렇게 볼 때, ‘늦은 강강술래’ 및 ‘잦은 강강술래’와 ‘덕석몰이’ 및 ‘청어엮기’를 연결해서 생각하면 민속무용 「강강술래」 전체는 원진나선무(圓陣螺線舞)가 될 것이다. 정확하게는 원과 나선형으로 접속된 춤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원과 나선형은 다름 아닌 달의 이울고 참을 도형화한 것이다. 그러므로 결영하는 달의 주기적 움직임을 재현한 것이 원과 나선형으로 춤추어지는 「강강술래」이다. 「강강술래」가 가진 상형성은 궁극적으로는 달의 결영의 모방에서 유래된 것이다. 「강강술래」는 달의 춤이다.
안동지방의 「놋다리밟기」도 부분적으로는 원진의 달춤이었음을 여기서 덧붙이고 싶다. 정월대보름날 「강강술래」라는 이름의 달춤을 추는 여인들은 달의 신생력과 재생력, 그리고 그 풍요의 원리를 지상에 옮겨서, 지상의 것으로 삼으려는 그들의 소망 그 자체를 춤으로 추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달춤을 추는 여인들을 지상의 월궁 항아(月宮姮娥)라고 하여도 그것은 결코 시적인 과장에만 그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달은 우주적인 생명력의 전형으로 간주되고 동시에 땅 위의 삶을 위한 생명의 원리로 간주되면서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들 전통사회의 신앙과, 농경을 위주로 하였던 현실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달은 한국인의 정서적 체험 내지 심미적 체험 속에서도 매우 큰 몫을 담당해왔다.
달의 시, 달의 그림, 달의 노래, 그리고 달의 서정 등에 걸쳐 우리들에게는 분명하게 달의 예술, 달의 미적 범주가 존립하고 있었던 것이다. 혹은 천상의 백옥경(白玉京)이라 부르고 그 속의 월궁 항아를 이야기하면서 우리들은 신비주의의 여운으로 감싸인 달의 미학을 이루어왔던 것이다. 미술의 기본적인 의장(意匠)으로 누구나 원근법과 명암법을 손꼽는다.
동양화는 다행스럽게도 이 두 가지 기법에 걸쳐 서구와는 다른 강한 개성을 가꾸어왔다. 산영(山影)들과 물이 어울린 원(遠) · 중(中) · 근(近)의 삼분법이 심천(深淺) 및 후박(厚薄) 아니면 중경(重經)의 느낌과 더불어서 구도의 기본을 이룩한 점에 있어서, 우리들의 전통화는 서구의 그림을 앞지르고 있었거니와, 그 같은 깊음과 얕음 내지 두텁음과 엷음이 따르는 원근의 삼분법은 우리 전통화의 강한 개성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와 함께, 우리 전통화의 명암법을 이야기할 때, 종국적으로 그것이 음양의 대극성의 표현이라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으로 우리 전통화에 달빛의 명암법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태양의 음양법과는 사뭇 다르다. 태양의 명암은 구별과 대조의 명암법이다. ‘암(暗)’은 다만 ‘명(明)’을 한층 더 뚜렷하게 드러내는 소극적 구실을 다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달빛의 명암법은 조화와 융합의 명암법이다. 그것이 가령, 본질적으로 대조법에 속한다고는 해도, 상보적인 대조법을 이루고 있는 것, 그것이 곧 달의 명암법이 지닌 강한 개성이다.
달빛의 명암법은 종국적으로 넓은 여백감이라고 할만한 여유 있는 개방적인 공간감을 빚어내고, 동시에 은은한 암시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게 한다. 그것은 미처 화면에 표현되지 않는, 숨어 있는, 깊이 가려져 있는 잠재적인 심층을 넌지시 시사하게 된다. 그것이 시나 음악에 있어서의 절제된 표현, 음악의 침묵 및 여운 등에 호응하고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와 같은 달의 명암법이 신윤복(申潤福)의 작품에 잘 나타나 있거니와, 종국적으로 달빛의 명암법은 하월(霞月)이나 애월을 더 사랑하게 된다. 이내나 안개가 낀 달빛이 더욱 선호된다는 뜻이다.
달의 명암법이 유현(幽玄)과 신운(神韻)을 즐겨 한 옛날의 전통화에서만 이야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김환기(金煥基)가 십장생과 도자기를 비롯한 기명류(器皿類)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후의 그림에서도 어김없이 이 달빛의 명암법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 달과 학, 달과 항아리, 달과 피리 부는 사람 등등 전통적 모티프에서 화재(畫材)를 구하였을 때, 김환기는 서양화 캔버스와 물감으로 우리 전통화를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문학사에서 달은 미술사에서보다 한결 더 높이 떠서, 보다 넓게, 보다 진하게 빛을 던지고 있다. 달은 이 땅의 문학사에서 가장 굵고 오랜 소재사의 하나를 형성해오고 있는 것이다. 우리 문학사, 특히 시와 가사는 상당한 정도의 달의 역사를 이루고 있다. 백제의 가요라고 일컬어지는 「 정읍사(井邑詞)」에서 그 첫 모습을 보인 달은 향가의 「원왕생가」 · 「 찬기파랑가」 등을 계속 밝혀주고 있다.
그러다가 ‘가사문학’과 한시를 거쳐 시조문학에 이르게 되면, 달빛은 도도한 큰 강물을 이루어 문학사를 꿰뚫고 흐르게 된다. “달하 높이곰 도다샤/어기야 머리곰 비치오시라/어기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져재 녀르신고요/어기야 진 데를 드디올세라/어느이다 놓고시라/어기야 내 가논 데 점그랄세라.”라고 노래한 「정읍사」에서 달은 단순한 밝음이 아니다. 그리움과 정이 얽힌 따스한 밝음이다. 그것은 지아비를 기다리는 여인네들의 정의 밝음이요 빛이었던 것이다. 백제 때 이미 달은 서정적 공감, 서정적 감정이입(感情移入)의 그릇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원왕생가」와 「찬기파랑가」 등 두 향가에 이르게 되면서 달은 서정적 공감 이상의 것을 촉발하게 된다. 아름다운 밝음, 정서 어린 빛 이상의 것이 된다. 불교의 영향도 있었던 만큼, 「원왕생가」에서 달은 저 유명한 월인(月印)의 달이다. 진여(眞如)의 법, 그 자체이거나 진여의 법경에 다다른 깨달은 자의 상징이다. 이제 달은 진리의 빛이요, 깨달음의 밝음이 된다. 서정적인 공감의 빛과 밝음에 인식의 빛과 밝음이 가세하게 된 것이다. 물론, 이 인식의 빛인 달에 진여의 원만 구족, 원융 자재한 경지를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이 점에서 『삼국유사』는 감동적인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달빛이 정작 지게 안으로 비쳐들 때, 그 달빛 속에 올라앉듯이 가부좌하고 깊이 선정(禪定)의 경지를 누리고 있는 월명의 모습을 『삼국유사』는 아주 생생한 필치로 그려 보이고 있다. 이것은 심미감에 가득찬 신앙의 높은 경지를 펼쳐주는 것이다. 깨달음이라는 불교 특유의 종교적 신비체험이 지닌 황홀함이 달빛을 통하여 탐미적(耽美的)으로 묘사되어 있기도 한 것이다. 이 경우, 심미적인 서정성과 신비한 종교성이 달을 통해서 융합된 것이라 보아도 좋을 것이다.
「찬기파랑가」에서 달은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삶의 한계와 허무에 묶인 인간에게 달은 물과 더불어서 영원한 극락정토을 계시한다. 이 때 달은 삶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의 계기를 제공하기도 한다. 「정읍사」에서 서정적 공감의 매체였던 달은 두 편의 향가를 기다려서 종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중량감을 더하게 되는 것이다.
문학의 경우, 달의 미학을 가장 풍족하게 전개하고 있는 장르가 다름 아닌 시조이다. 청정(淸淨)과 광명, 유현과 적막, 때로는 적막과 고독 등의 정조(情操)를 담은 달은, 시조시인들에 의하여 더없이 큰 사랑을 받았다. 달빛과 꽃, 새울음과 달빛, 벌레울음과 달빛, 제월(霽月), 곧 비 갠 뒤의 달, 텅 빈 산속을 비치는 달, 눈을 비치는 달, 물그림자와 달빛, 구름 낀 서리의 달, 안개에 가린 달, 가인(佳人)과 달, 달과 피리( 거문고)소리 등은 시조가 가장 즐겨한 전통성 짙은 시재(詩材)들이다. 이런 점에서는 다같이 천체라고는 하지만, 해와 별을 달에 견줄 수가 없게 된다. 시조의 하늘은 오직 달에 의하여 밝혀졌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가령 「정읍사」에서 ‘향가’에 이르는 동안 달의 시적인 심상, 곧 이미지의 원형질이 결정되었다고 본다면, 우리들은 달을 소재로 한 수다한 시조 가운데서도 박인로(朴仁老)의 다음 작품에 주목하게 된다. “기두(磯頭)에 누웠다가/깨달으니 달이 밝다/청려장(靑藜杖) 비껴 짚고/옥교(玉橋)를 건너오니/옥교에 맑은 소리를 자는 새만 아놋다.”
이 작품은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다. 그만큼 묘사성이 뛰어난 작품이다. 어우러진 것은 달빛과 옥교 건너는 발소리와 그리고 밤새울음만이 아니다. 그 빛과 소리의 이른바 공감각적인 해조(諧調)에 더해서 지상의 모든 것이 기막힌 해조를 빚어내고 있다. 달빛은 모든 것을 비추고 있다. 모든 것은 달빛에 젖어 있다. 산이 젖고 사람이 젖고 다리가 젖고 그리고 개울의 물빛이 젖고 있다. 뿐만 아니다. 다리를 가는 걸음 소리가 젖고 밤새울음이 젖어 있다. 달빛에 젖음으로써 온 누리의 만상은 오직 하나일 뿐이다. 이것이 단순한 정서적 · 심미적 체험에 그칠 수 없음은 분명하다. 그것은 인간과 자연까지를 합친 세계, 그것의 존재에 관한 체험이기도 한 것이다.
달관(達觀) 내지 체관(諦觀)의 세계관, 그리고 관조의 인식이 달빛이듯이 은은하게 그러나 선연하게 이 작품에서 빛을 던지고 있다. 이 시조를 기다려서, 달을 노래한 향가의 전통이 중세기 조선조에 이어지게 되는 것이지만, 이 전통이 오늘에 살아서 빚어낸 작품들의 전형으로서, 우리들은 조지훈(趙芝薰)의 「 고풍의상(古風衣裳)」이며 「여운(餘韻)」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작품 가운데서도 특히 「여운」은 달로 말미암아서 이룩될 수 있는 신비주의와 탐미주의의 어울림의 극단적인 전형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이것은 근대 초기의 한때 한 무리의 낭만주의 시인들의 병든 탐미주의, 감상주의적 탐미에 의하여 시들고 이울어졌던 달이 다시 정화, 승화되어서 제대로 밝고 둥근 모습을 되찾은 결과라고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