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는 인간의 생존과 관련이 있는 활동과 일을 제외한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모든 활동을 말한다. 생활상의 이해관계를 떠나 목적 없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활동으로, 즐거움과 흥겨움을 주는 자유롭고 해방된 인간 활동이다. 따라서 놀이는 재미가 있어야 하고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공감력이 있어야 하며, 모든 제약으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자유로움과 놀이 주체의 자발적인 참여가 보장되어야 한다. 농경사회에서는 세시풍속에 따른 공동체 놀이가 두드러진 반면, 산업 사회와 정보화 사회에서는 놀이 자체가 상품화되어 구매하여 즐기도록 구조화되어 있다.
자고 먹는 활동은 인간의 직접적인 생존활동이다. 또 일정한 목적 달성을 위하여 고통을 참아가며 제약된 상황 아래 참여하는 활동은 ‘일’이다. 놀이는 생활상의 이해관계를 떠나서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목적이 없는 활동으로서 즐거움과 흥겨움을 동반하는 가장 자유롭고 해방된 인간활동이다. 따라서 막연한 휴식은 놀이가 아니다. 일정한 육체적 · 정신적인 활동을 전제로 하며, 정서적 공감과 정신적 만족감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활동이다. 인간으로서의 삶의 재미를 적극적으로 추구하고 즐기고자 하는 의지적인 활동이다. 그러므로 놀이는 재미가 있어야 하고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공감력이 있어야 하며, 모든 제약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자유스러움과 놀이 주체의 자발적인 참여가 보장되어야 한다.
‘놀이’는 ‘놀다’의 어간 ‘놀’에 명사형어미 ‘이’가 붙어서 이루어진 말이다. ‘놀다’라는 동사는 여러 가지 뜻을 지니고 있다. 소극적으로는 일을 하지 않고 쉰다는 휴식의 뜻이 있는가 하면, 적극적으로는 재미를 즐기기 위하여 일정한 놀이활동을 한다는 뜻이 있다. 더러는 주책없이 들떠서 마구잡이로 행동하거나, 제자리에 붙박혀 있지 않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 또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것 등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무당의 세계에서 ‘놀다’의 의미는 신이 몸에 실려 노래와 춤과 공수 등을 행하는 굿놀이 활동을 뜻한다. 그래서 무당들은 굿하는 것을 ‘일하다’, ‘공사하다’로 일컫기도 하지만 ‘놀다’라는 말로 나타내기도 한다.
무당에게는 굿이 곧 놀이이고 일이다. ‘놀다’라는 말이 지닌 종교성을 거슬러 올라가면 원시 종합예술 활동과 닿아 있다. 신에게 제의를 바치는 활동이 바로 놀이였다. 놀이를 나타내는 일본어 아소비(遊び)가 ‘영혼을 일깨워 놀게 한다’는 뜻이 있고, 태초의 신성한 신사(神事)와 관련을 지닌 말이듯이, 우리말 ‘놀다’도 종교적인 제의활동인 굿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적극적인 놀이활동으로서의 ‘놀다’는 악기를 연주하는 일, 노래부르는 일, 춤추는 일, 일정한 형상을 그려내거나 만들어내는 일, 경기를 통하여 승부를 겨루는 일, 거닐면서 노니는 일, 특별한 재주와 기량을 발휘하는 일, 어떠한 사건을 꾸며내어 극적으로 보여주며 즐기는 일 등을 두루 포괄하고 있어, 영어의 플레이(play)에 해당되는 말뜻을 지녔다고 하겠다. ‘놀음’ 역시 ‘놀다’의 어간 ‘놀’에 명사형 어미 ‘음’이 붙어서 된 말로서, 놀이보다 한층 구체적으로 지칭할 때 흔히 쓰이는데, 그 쓰임새를 보면 꼭둑각시놀음 · 들놀음[野遊] · 사자놀음 · 원놀음 · 청단놀음 등이 있다. 그리고 도박성을 띤 화투와 마작 등의 놀이를 싸잡아서 일컬을 때 놀음, 즉 ‘노름’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놀’에 명사형어미가 붙어서 된 말을 보면 노래(놀애) · 노리개(놀이개) · 노릇(놀읏) · 놀림(놀임) 등이 있다. 그러므로 놀이는 이러한 놀이활동 전반, 즉 굿놀이 · 음악 · 무용 · 체육 · 연극 · 경기 · 묘기 · 미술 · 연희 · 오락 등 제의와 예술 및 문화활동 전반에 걸쳐 있는 말이나, ‘놀음’은 도박과 같은 판놀이와 공연적인 마당놀이에 한정되어 있는 말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놀이를 즐긴다. 놀이를 즐기는 까닭은 재미있고 즐겁기 때문이다. 놀이의 즐거움을 통하여 생활 속에서 맞닥뜨리는 여러 가지 정신적 고통을 잊어버리고, 생업에 종사하는 동안 지쳐 있던 육체적 피로를 풀어내기도 한다. 이러한 놀이는 정신적 · 육체적 긴장을 이완시켜 주므로 다가오는 생업활동을 보다 정력적으로 할 수 있는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어 주는 구실을 한다.
놀이는 이러한 기능 때문에 흔히 레크리에이션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기도 한다. 그것은 놀이가 피로를 풀어 주고 원기를 회복시켜 생활에 탄력을 주는가 하면, 삶의 기쁨을 표현하는 계기와 생활상의 열등감을 극복하는 기회를 제공하게 되어, 보다 성숙한 삶을 위한 준비의 기능을 지니고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놀이의 이러한 기능도 일을 전제로 하였을 때 상대적으로 발휘되는 것이다. 일하지 않는 상태에서 놀이만 탐닉하는 경우에는 그 기능들이 발휘될 수 없다. 일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놀이가 별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것도 이러한 사정 때문이다.
일이 고되고 힘들수록 놀이의 기능은 한층 크게 발휘되는 것이다. 열심히 일하고 생업에 적극적인 사람일수록 놀이가 드세며, 또 흥이 오르고 신바람이 나는 놀이를 즐긴다. 이처럼 놀이와 일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룰 때 놀이의 건강한 기능이 온전하게 발휘되고, 일의 능률도 올리게 되며 삶의 보람을 느끼게 된다. 그러므로 때로는 놀이가 일 못지 않은 가치를 지니며, 생산활동 이상의 생산성을 확보하여주기도 한다. 원시인의 주술에서는 놀이가 일의 연장이다. 실제로 놀이의 연원은 노동에 있다. 놀이의 동작은 노동의 동작에서 비롯된 것이며, 놀이의 리듬은 노동의 동작에 리듬을 준다. 그럼으로써 노동의 동작을 놀이의 동작으로 전환시켜 정신적 · 육체적 고통을 덜어준다. 놀이와 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일의 현장에서 일을 담당하는 사람과 놀이를 담당하는 사람이 함께 더불어 있는 것이 예사이다. 논매기 현장에서 논을 매지 않고 논매기노래 앞소리만 메기는 앞소리꾼이 있는가 하면, 상여가 나가는 현장에서 상여를 메기는커녕 상여를 타고 상여노래 앞소리만 부르는 앞소리꾼이 있다. 이들 앞소리꾼은 일을 직접 하지 않지만 일과 별도의 행위를 한다고 여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품삯은 오히려 일을 하는 사람들보다 더 받는다. 앞소리꾼이 일을 지휘하고 일의 능률을 올린다고 믿기 때문이다. 앞소리꾼이 하는 노래와 춤, 또는 풍물은 단순한 놀이로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을 지휘하고 이끌어나가는 구실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놀이와 일은 인간의 의식적인 활동이라는 점에서 같다. 일에도 놀이에도 인간의 자기실현의 기회가 주어지고 있다. 자기변화의 체험을 일과 놀이에서 다같이 느낄 수 있다. 삶의 보람과 성취도 일과 놀이를 통하여 함께 느끼거나 이루어낼 수 있다. 그러나 놀이는 즐거움을 전제로 하지만 일은 그렇지 않다. 일 속에서도 즐거움을 찾을 수 있으나, 그것은 필수적인 것이 아니다. 일은 곧 생업과 연결되는 생산활동으로서 물질적 소득을 전제로 한다. 더러는 사회적 지위의 향상을 목적으로 할 수도 있다. 따라서 일은 상당한 제약과 의무 · 책임 속에서 하게 된다. 성취하여야 할 구체적인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 목적이 행동에 제약을 주고 자유로운 사고를 통제하게 된다.
놀이의 즐거움도 일종의 목적일 수 있으나, 그것은 자발적이고 자유스러운 놀이활동 가운데 자연스럽게 성취되는 것이므로 특별한 속박이 따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호이징가(Huizinga, J.)는 놀이의 형식적인 특성을 요약하여, 놀이는 일상생활에서 의식적으로 벗어나려는 자유롭고 쾌활한 활동이며, 동시에 놀이를 즐기는 사람의 마음과 그 주위를 전적으로 사로잡는 활동이라고 하였다. 놀이와 일은 자유와 제약, 자발성과 강제성, 즐거움과 고통, 소비와 생산, 무목적성과 목적성 등 서로 맞서는 관계에 있는 것 같으나, 상보적으로 합일될 수도 있다.
일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서 일을 놀이로 전환시키는 경우이다. 일을 하면서 노동요를 부르거나, 두레노동을 하면서 풍물을 치는 경우는 일의 고통을 노래의 재미로 잊어버리게 하고 일의 동작을 풍물의 가락으로 신명을 돋우어 더욱 활성화시켜준다. 우리의 전통노동이 이와 같은 노동요와 풍물과 더불어 이루어진 것은 이 때문이다. 놀이의 본질은 재미를 즐기는 데 있다. 따라서 재미가 없다면 놀이와 일이 별도로 구분되어 있다고 하기 어렵다. 동일한 활동이 재미를 주는가, 주지 않는가에 따라 놀이일 수도 있고 일일 수도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일인 것도 특정한 사람에게는 놀이가 될 수 있다. 그 반대도 있을 수 있다.
춤추는 일은 어떤 사람에게는 놀이이지만 직업적인 무용수에게는 일이다. 직업적으로 춤을 추는 무용수에게는 놀이와 같은 재미나 자유로움을 춤추면서 느끼기 어렵다. 자기 신명에 의한 춤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대로 고기를 잡는 일은 어부에게는 일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놀이일 수 있다. 재미로 고기를 잡는 일을 즐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 일에 만족하기 위해서는 자기 일에 재미를 붙일 필요가 있다. 자기 일에 재미를 붙이고 일하는 사람에게 그 일은 놀이나 다름없다. 아무리 훌륭한 놀이라도 재미를 느끼지 못하면 일처럼 따분하고 고된 노동이 된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재미를 느끼게 되면 놀이처럼 신바람 나는 오락이 된다.
놀이의 가장 핵심을 이루는 요소는 역시 재미이다. 놀이에 재미를 주는 요소는 다양하다. 첫째, 겨루기의 요소이다. 누구든 상대와 겨루어서 이기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승리는 즐거움을 주기 때문에 거듭 겨루기를 하고 싶어지고, 패배는 승리에 대한 아쉬움을 주기 때문에 패배를 만회하고자 다시 겨루기를 하게 된다. 대부분의 놀이들이 겨루기 형식을 이루고 있는 것은 겨루기가 가장 적극적인 재미의 요소이기 때문이다.
둘째, 신명의 요소이다. 흥을 부추기고 신명을 고조시킬 수 있어야 놀이로서 제격이다. 신바람이 나지 않으면 놀이의 기분을 맛보기 어렵다. 놀이의 신바람이 세상살이의 근심을 잊게 하고, 경직된 육체를 유연하게 풀어 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놀이의 신명성은 사람을 집단화시켜 주고 대동성을 획득하여 준다. 신명이 올라 추는 춤이 단합적 기능을 가진 것도 이 때문이다. 풍물과 대동춤을 중심으로 한 마을굿이나 지신밟기 등이 신명을 핵심으로 한 놀이양식이다.
셋째, 우연성의 요소이다. 우연성은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예측할 수 없는 결과에 의존해서 놀이를 진행함으로써 별도의 재미를 맛보게 된다. 우연성은 현실법칙을 초월하기 때문에 놀이의 독자적인 세계를 확보하여 준다. 나이의 다소, 능력의 정도, 남녀의 구분 등 모든 사회적 기준을 뛰어넘어 기계적으로 평등한 상태에서 순전히 우연성의 법칙과 그 결과에 따라 성취가 주어지기 때문에, 사회적 제약과 속박으로부터 진정한 해방감을 맛보고 열등의식을 보상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어 즐거움을 느끼게 한다. 가위바위보 · 윷놀이 등이 우연성에 입각하여 있는 놀이양식이다.
넷째, 표현의 요소이다. 사람은 누구나 표현의 욕구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자유로운 표현의 기회는 흔하게 제공되지 않는다. 표현성의 요소는 새로운 창조의 기쁨과 자아의 실현을 획득하여주고, 평소에 발휘될 수 없는 장기를 과시함으로써 자족적 즐거움은 물론, 소속집단에 자기를 인정받는 만족감을 얻게 해준다. 이른바 공작하는 즐거움도 바로 표현의 요소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다. 노래와 춤 · 공작활동 등은 표현의 요소에 입각한 놀이들이다. 이러한 놀이가 미학적으로 형상화되면 예술활동이 된다.
다섯째, 성취의 요소이다. 놀이는 일상생활에서 쉽게 누릴 수 없는 성취감을 준다. 놀이의 과정이 성취의 과정이기도 하다. 돌치기 · 고무줄놀이 등은 놀이의 진행이 쉬운 단계에서 점차 어려운 단계로 성취하여가는 과정의 연속이다. 일정한 단계에까지 도달하는 활동이 곧 재미를 주는 것이다. 또는 일정한 기량을 갖추어야 놀이를 잘 할 수 있는 것도 있다. 제기차기 · 그네뛰기 등은 기능의 숙련정도에 따라 잘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다. 계속해서 놀이하는 동안에 기량을 기르게 되어 놀이도 잘할 수 있고, 기량의 습득에 따른 성취감도 맛보게 된다.
이 밖에도 긴장감에서 오는 재미, 상대를 공격하는 재미, 어지러움과 같이 비정상적인 상태에서 느끼는 재미 등 여러 가지 재미의 요소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이들 재미의 요소는 어느 놀이에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요소가 더불어 있을 수 있다. 더불어 있는 놀이일수록 더 재미있고 복잡한 놀이가 된다. 놀이는 이와 같은 재미의 요소를 핵심적인 특징으로 하면서, 다음 몇 가지의 중요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특징을 두루 갖추고 있어야 진정한 의미의 놀이가 될 수 있다.
첫째, 놀이는 공감력을 지녀야 한다. 놀이에서 얻어지는 재미나 즐거움은 개인적인 것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 주위의 사람들을 함께 끌어들일 수 있고, 객관적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놀이가 된다. 개인에 한정된 즐거움을 주는 것은 놀이로서 객관성을 획득하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공동의 즐거움으로 확산되고 정서적인 공감력이 확대되어 집단적 신명으로 나타날 때 놀이는 절정에 이른다. 그러므로 남을 끌어들이지 못하는 놀이나 남으로부터 고립되어 놀아지는 놀이는 건전한 놀이라고 할 수 없다.
둘째, 자유스러움의 구가(謳歌:기림)와 모든 속박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놀이의 중요한 특징이다. 호이징가는 말한다. “모든 놀이는 우선적으로 먼저 하나의 자유로운 행동이다. 명령되어진 놀이는 놀이가 아니다. 그러한 놀이는 아무리 잘된 것이라도 우격다짐의 모방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통제되고 강제된 놀이는 일보다 더 큰 고통일 수 있다. 일은 일정한 제약 속에서 고통을 참아가며 할 수도 있다. 오히려 그것이 일의 성취이고 보람일 수 있다. 왜냐하면 부자유와 고통에 상응하는 보상이 주어지기 때문이며, 직접적인 생산활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놀이는 재미를 즐기고자 하는 것이므로 자유가 제약되어서는 놀이가 될 수 없다. 일정한 규칙이 놀이하는 자에게 적용될 뿐이다.
셋째, 놀이는 생활상의 이해관계를 떠나 있어야 한다. 놀이는 무목적성을 특징으로 하는 것이다. 물질적 보상이나 그것의 획득을 기대할 때, 또는 사회적인 욕망의 성취를 위한 것일 때, 그 활동은 놀이가 될 수 없다. 따라서 놀이는 삶의 필요 불가결한 행위이기는 하나 현실적인 삶의 현장 밖에서 이루어진다. 실생활이 아닌 허구적인 세계 속에서 놀이가 진행되므로, 현실을 일시 떠나거나 생활을 일시 중단하는 셈이다. 그러므로 놀이에는 현실법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현실에는 부도덕한 것으로 취급되는 행위가 놀이의 세계에서는 용납된다. 때로는 현실법칙을 뒤집어엎는 데 적극적이기도 하다. 놀이의 질서와 놀이의 법칙에 의해서 놀이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넷째, 놀이는 참여하여야 하는 특징이 있다. ‘놀다’의 명사형이 놀이인 것처럼, 직접 참여하여 놀이하는 행위를 통하여 그 의의가 실현된다. 따라서 스스로 참여하는 주체적 행위 없이 즐기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놀이가 아니다. 보며 즐기는 것이라든가 쉬면서 즐기는 것은 오락이요, 휴식일 뿐이다. 놀이하는 자만이 진정한 놀이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그러므로 놀이는 자발적인 참여에 의하여 현실적인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독자적인 질서에 입각해서, 공감력을 지닌 재미를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직접적인 활동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놀이의 이러한 성격 때문에, 현실법칙 속에서 사회적 지체를 높이 유지하고 아랫사람들의 지배를 통해서 자신들의 부와 지위를 확보하고 있는 지배층에게는 놀이가 부정적인 것이 된다. 놀이의 공감력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집단화되고, 현실법칙과 질서가 적용되지 않으므로 누구든지 놀이마당에서는 평등하게 된다. 그리고 거기에는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자유와 해방의 정신이 살아 있다. 그러므로 놀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지배의 논리에서 벗어나게 한다.
민중적 공동체의식이 놀이를 통해서 강화되고 집약적으로 표현되므로, 교육과 도덕률에 의한 상층문화에 맞서서 생활에서 우러나는 감흥과 신명을 발휘하는 가운데, 경험적으로 터득하고 창조한 주체적인 문화가 놀이판에서 생산된다. 이러한 까닭에 상층의 지배력이 강화되고 신분적 불평등이 깊이 조성되었던 중세사회에는 이러한 놀이를 부도덕하게 여기는 관념이 생겨나 놀이활동을 통제하기까지 하였다. 이때부터 국중대회를 비롯한 대규모 집단놀이는 숨죽게 되었다.
상고시대에는 놀이가 다른 무엇과 분명하게 구별된 삶의 양식이 아니었다. 일과 놀이, 오락과 제의, 의식과 축제, 창작과 표현 등 여러 가지 활동이 자연스럽게 하나로 통합을 이룬 가운데, 이른바 원시종합예술을 생성, 전승하고 있었던 것이다. 혈연집단을 기초로 공동생활을 하는 원시공동체를 이루고 있던 시대이므로, 신분적인 계층의 분화나 통치권에 따른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구분이 없었다. 공동으로 일하고 신앙하며, 더불어 즐기는 공동체사회로서, 일정한 방식에 의한 지도자는 있되 전제적인 통치자는 없었다.
따라서, 놀이의 경우에도 공동체의 구성원이 계층적 제한 없이 공동으로 참여하여 즐기는 대동놀이가 중심을 이루었다. 이때의 놀이는 일과 완전히 분리된 것이 아니다. 일의 순조로운 성취를 위한 예측적인 놀이이거나 일의 결과에 대한 감사의 놀이였으므로, 자연히 일과 신앙, 놀이행위가 통합성을 지니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시대를 삶의 양식에 따라, 특히 ‘놀이공동체시대’라고 규정할 수 있다.
혈연공동체를 뛰어넘어, 군장(君長)이라고 하는 통치자의 다스림 아래 지역공동체를 중심으로 한 군장사회시대가 등장하게 되면 놀이양식 역시 조금씩 변모를 보인다. 이때부터 농경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모든 생활양식이 농사력(農事曆)과 일정한 관계를 맺게 된다. 계절의 변화에 따른 농사력을 근거로 일정한 양식의 세시풍속이 형성되고, 놀이도 이를 바탕으로 생성되어 행하여지게 되었다. 놀이의 전체적 성격은 놀이공동체시대와 큰 차이는 없으나, 앞 시대에는 모든 놀이가 주술적인 신앙행위와 함께 필요에 따라 수시로 이루어진 데 비하여, 이때에 이르러서는 세시풍속과 밀접한 관련 아래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3세기경 우리 나라의 여러 문화양식을 두루 기록하여둔 『삼국지』의 위서(魏書) 동이전을 보면, 어느 나라에서나 매년 한두 차례 농공시필기(農功始畢期)를 잡아서 국중 대회를 열고, 노래와 춤을 중심으로 한 각종 놀이를 즐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제천행사로 행하여지던 국중대회는, 가무오신행위(歌舞娛神行爲)를 통해서 신으로부터 기대하는 바를 얻을 수 있다고 믿는 고대인의 집단적 제의형식이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고구려의 동맹(東盟), 부여의 영고(迎鼓), 예의 무천(舞天)을 들 수 있다. 이들 국중대회의 공통점은 백성들이 남녀노소의 구분 없이 술과 음식을 먹으며 노래와 춤을 밤낮으로 계속해서 즐겼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무오신 형식의 지역공동체 단위 제의는 오늘날까지 동신제(洞神祭)의 하나로 전승되는 마을굿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신라의 백희(百戱:온갖 놀이)나 백제의 잡희(雜戱:소학지의)라고 하는 것도 국중 대회와 더불어 놀아지던 전통놀이였다. 문헌상에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탈놀이 · 검무 · 오기(五伎) · 처용무와 원효의 무애무(無㝵舞:궁중 춤의 한 가지) 등은 신라의 놀이들이다. 백제에도 악삭(握槊:주사위 놀이) · 농환(弄丸:공던지기 놀이), 백제사람 미마지(味摩之)가 일본에 전하였다고 하는 기악(伎樂:춤 음악) 등이 있었으나 자세하지 않다.
국중대회는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시대까지 계속되어 팔관회(八關會)와 연등회(燃燈會)로 발전되었다. 팔관회가 고려의 최고 전례(典禮)로서 역사적으로 거행되고 전승됨에 따라, 가무백희(歌舞百戱)도 팔관회와 함께 발전되었다. 연등회는 정월 보름 또는 2월 보름에 거국적으로 행하여졌는데, 임금과 신하가 함께 참여하여 의식을 행하고 노래와 춤을 비롯한 온갖 놀이를 즐겼다. 이러한 놀이들은 섣달 그믐날 하는 나례(儺禮)행사 때에도 행하여졌으므로, 고려시대에는 놀이가 상당히 성황을 이루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팔관회를 비롯한 연등회 및 나례는 신분적인 차별 없이 임금과 신하와 모든 백성들이 동참하여 즐기는 거국적 축제였으므로, 그 성격상 대동놀이의 특징을 지니는 국중대회였다.
3세기경의 군장사회에서부터 시작된 국중대회는 그 마지막 모습인 팔관회가 자취를 감추어 버린 고려 원종 때인 13세기까지 약 1천년간 계속되었으므로, 이 시대를 특히 ‘국중대회시대’라고 할 수 있다. 국중대회시대인 13세기까지는 가무백희를 중심으로 한 대동놀이가 중심을 이루었다. 여기에는 신분적인 차별 없이 놀이마당에서 하나가 될 수 있었으므로 민족적 동질성과 유대를 다지면서 지역공동체 성원 전체가 일체감을 조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점차 왕권이 강화되고 중앙집권적 통치체제가 자리잡으면서 국중대회는 그 규모가 축소되기 시작하였다.
이미 유교이념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성종은 국중대회에서 백희를 잡상스러운 것이라 하여 폐지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신라 이래로 고려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전승되던 팔관회와 연등회 등의 국가적 행사에는 가무백희가 여전히 채붕(綵棚:장식 무대) 위에서 공연되었으며, 이와 같은 놀이양식은 조선조에까지 계속되었다. 이와 같이 채붕 위에서 공연되던 각종 놀이를 14세기 후반부터 산대잡극(山臺雜劇)이라고 일컬었는데, 채붕의 설치로 자연히 놀이를 직접 담당하는 자와 관람하는 자가 구별되기에 이르렀다. 산대잡극 이후에는 왕과 귀족들이 국중 대회로 이루어지는 팔관회에 참여하되 채붕 위의 산대놀이를 구경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 시대의 산대놀이는 국중대회의 일환이었으므로 산대놀이 자체가 국중대회 이상의 의미를 지닐 수 없었다.
그러나 고려 중기 이후에 들어온 중국의 나례의식이 세말나례(歲末儺禮)로 계속되면서 전통적인 국중대회인 팔관회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게 된다. 나례는 점차 악귀를 쫓는 구나의식(驅儺儀式)에서 관중을 즐겁게 하는 구경거리로, 또는 연극적 행사로 바뀌어 우인(優人) 또는 창우(倡優)라고 하는 직업적 배우가 등장하게 된다. 따라서 14세기 중엽에는 나례의식이 종교적 기능을 지닌 구나부(驅儺部)와 각종 묘기 및 탈놀이를 주로 한 가무백희의 나희부(儺戱部)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척불숭유정책(斥佛崇儒政策)에 의하여 연등회와 팔관회는 중단되고 만다. 그러나 산대잡극과 중국에서 들어온 나례는 계승하여 더욱 성행되었다. 광해군 때에는 나례도감 또는 산대도감이라고 하는 관청을 두어 산대잡극과 나례행사를 관장하였으며, 세말나례와 관계없이 주로 중국사신을 맞이할 때 산대희를 공연하였다.
산대잡극은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산대희 · 산대잡희 · 산대나례 등으로 불렸으나 그 놀이의 양식은 같은 것이었다. 국중대회의 일환으로만 존재하던 산대놀이가 국중대회와 상관없이 구경거리로서 의미를 지니기 시작한 고려 중기부터 인조 이후에 공의(公儀)로 폐지되기까지를 ‘산대놀이시대’로 규정할 수 있다. 산대놀이시대에는 국중대회시대와 달리 놀이가 지배계층의 구경거리로 변질되고 말았다. 궁중에서 필요한 시기에 높은 대를 설치하여두고, 서울의 사대문 밖에 살면서 궁중의 천한 일에 종사하던 전문 놀이꾼인 광대들을 동원하여 놀이를 시켰으나, 왕과 신하들은 이를 구경하며 연희를 즐겼다.
이처럼 신민동락(臣民同樂)의 국중 대회가 광대들의 동원에 의한 산대놀이로 변모됨에 따라, 당시의 놀이양식은 재인 광대로 이루어진 전문 놀이꾼과 귀족계급으로 이루어진 구경꾼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물론 일반백성들은 구경꾼으로조차 참여하기 어렵게 됨으로써 놀이마당에서조차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분별되기에 이른 것이다. 인조 이후에 산대놀이가 중단되면서 궁중에서 행하여지던 대규모의 놀이는 사라졌다. 이에 따라 놀이마당은 궁중에서 세간으로 이동되면서 놀이양식도 소규모화 · 개별화 · 계층화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특히, 신분에 따른 놀이 계층화 현상이 점차 확대되어, 귀족성을 띠는 놀이는 하층민들이 하지 못하도록 통제하였다.
인조 이후 지배층이 독점하던 놀이로는 격구(擊毬) · 투호(投壺) · 쌍륙(雙六, 雙陸) · 기국(碁局:바둑 · 장기) 등이었다. 특히, 격구는 말과 넓은 구장이 있어야 하므로 도구면에서도 일반 백성들에게는 힘겨운 것이어서, 지배층의 전유물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태조가 내정(內庭)에서 격구를 하였다는 기록을 비롯하여 역대 왕의 격구에 관한 기록이 실록에 두루 보인다. 투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세종실록』 권44 13년 11월 임신조(壬申條)에 의하면 “선왕이 겨울에는 격구를 하고 여름에는 투호, 봄 · 가을에는 활쏘기를 하였는데, 지금은 겨울철이니 바로 격구의 때이다. 내가 세자 및 여러 신하들과 더불어 격구를 하고자 한다.”고 하였다. 이를 보아 궁중놀이의 종목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유교적 문치주의에 입각한 유신(儒臣)들의 무예천시와, 일부 귀족들의 지나친 사치로 격구의 폐해가 거론되어, 점차 쇠퇴되다가 효종 때에 이르러서는 거의 사라졌다. 다만 말을 사용하지 않는 ‘ 장치기’놀이가 세간에서 널리 전승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투호는 당시 조신들에게 치심(治心)의 수단으로 생각되어 놀이가 끊이지 않았다. 『태종실록』 3년 8월 무신조(戊申條)에 사사로이 매사냥을 금하였다는 기록과 매사냥패를 만들어 부마 · 공신 및 대신에게 나누어주었다는 기록이 있을 뿐 아니라, 역대 왕들이 매사냥을 엄격히 통제하였다는 기록이 다수 보인다. 이러한 기록들을 통하여 조선시대에 이르러 매 사육 및 매사냥은 상류층의 독점 오락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밖에 주사위를 던져 승부를 정하는 승경도(陞卿圖)놀이가 있다. 정1품에서부터 종9품에 이르는 관직도를 그려서 양반들의 염원인 벼슬자리의 획득을 놀이를 통해서 대리 충족시키는 것이었다. 조선시대의 신분제가 놀이에까지 연결되어, 이와 같은 상류층의 놀이는 민중들에게 여러모로 통제되었으며, 여건상 민중들의 놀이가 되기도 어려웠다. 반면에 양반들은 대동놀이의 성격을 지닌 풍물 · 탈춤 · 지신밟기 · 별신굿 등에는 구경꾼으로도 참여하지 않았다. 활달한 몸짓과 신바람 나는 풍물장단으로 신명풀이를 하는 놀이에 양반들이 참여하지 않는 것은, 아랫것들과 어울리지 않고 점잖음을 유지하여야 자신들의 지체를 유지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특히, 제의적 기능을 지닌 의례와 관련된 놀이는 유교적 사고 때문에 놀이가 배제된 의식으로 바뀌어버렸거나, 원래의 모습이 변질되기에 이르렀다.
마을굿으로 행하여지던 동신제가 독축고사형식(讀祝告祀形式:축문을 읽는 제사형식)으로 바뀐 것은 그러한 사례 가운데 하나이다. 따라서 이때부터는 계층에 따른 놀이의 분리뿐만 아니라, 제의와 놀이도 점차 분리되기에 이르렀다. 놀이의 계층화 현상이 분명하여지면서 민속놀이가 별도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상하가 분별없이 거국적으로 동참하여 축제를 하던 국중대회시대까지는 민속놀이라고 하는 것이 따로 존재할 수 없었다. 놀이공동체시대와 국중대회시대의 놀이는 계층의 구별이 없었으므로 민속이 곧 국속(國俗:나라의 풍속)이었기 때문이다.
산대놀이시대에 들어와서는 상하가 분리되어 놀이를 하고 보는 관계가 성립됨에 따라, 민속과 국속이 서로 교류하는 가운데 상보적인 관련을 맺고 있었으나, 조선 중기에 들어오면서 놀이 계층화시대를 맞이함에 따라 민속과 국속의 일치가 파괴되었다. 관속(官俗) 또는 반속(班俗)과 민속이 맞서는 가운데 놀이가 이원적으로 존재하면서 근대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때부터 민속놀이는 하층민의 전통놀이로서 별도의 의미를 지니기 시작하였다.
조선 말기에서 민족항일기로 접어들면 반속과 민속의 병립적인 균형마저 깨어지게 된다. 관의 힘에 의하여 각종 민속놀이가 규제를 받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편싸움(石戰)과 같은 지역단위의 대규모 겨루기놀이는 법령으로 금지하기까지 하였다. 놀이의 격렬성이 사상자를 내는 등 위험하다는 이유를 내세웠으나 사실은 민중의 힘이 집단화되는 것을 막고자 한 것이다. 관아의 금령에도 굽히지 않고 계속되던 편싸움은 일제의 민족의식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직접적인 탄압이 자행됨으로써 그 뿌리가 뽑히게 되었다. 『매천야록(梅泉野錄)』 권6 석전금지 조에 의하면, 일제는 이 놀이를 금지하기 위하여 군대를 파견하고 총포를 쏘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조선 후기의 ‘놀이 통제의 시대’에서 민족항일기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인 ‘놀이 탄압의 시대’로 바뀌었다고 할 수 있다. 일제는 편싸움뿐만 아니라 공동체의식을 높이며 진취적인 민족기상을 표현하고 상무정신(尙武精神)을 고취하는 횃불싸움 · 줄다리기 · 지신밟기 · 동채싸움 등 대규모 집단놀이들을 다중집회(多衆集會)의 금지라는 허울좋은 명목을 들어 금지시켰다. 그것은 우리 민족의 단결된 힘이 이들 놀이를 통하여 집약적으로 표출되고 민족의식이 강화되기 때문이다.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의 발발을 계기로 비상시기를 선포하고 민중집회를 금지시키면서 노골적인 놀이탄압을 자행하였다.
이때 중단된 민속놀이들이 아직도 그 맥을 잇지 못하고 있는 것은 광복 후의 사정이 놀이의 건전성을 회복시키는 방향으로 호전되지 못한 탓이다. 일제로부터의 독립과 함께 놀이탄압시대는 자연히 끝이 났다. 그러나 독립과 함께 놀이의 부흥시대가 도래한 것은 아니다. 일제하에서 받은 식민지교육의 영향으로 민속문화에 대한 가치를 정당하게 평가할 수 있는 역량을 스스로 갖추지 못하였다. 일제를 통하여 잘못 받아들인 서구문화의 영향으로 우리의 민속을 미신으로 간주하는 동시에, 개화라는 이름으로 서구의 것을 받아들이고 따르는 것을 발전으로 착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놀이의 계층화시대와 놀이탄압시대에 형성된 놀이의 문제점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 채, 새로운 문제들이 덧보태어지게 된 것이다.
광복 후 미국 군인들을 통하여 들어온 서구의 저속한 놀이문화가 우리 사회를 물들이는가 싶더니, 어느새 대중매체를 통한 서구의 대중문화가 우리 놀이의 풍속도를 완전히 바꾸어놓고 말았다. 우리의 농사력 또는 세시풍속과 무관한 크리스마스가 새로운 명절로 등장하는 것과 동시에 설날이 신정으로 대체되었다. 정월 대보름이나 단오와 같은 전통적인 세시명절이 퇴색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설날을 비롯하여 정월 대보름과 단오에는 특히 이와 관련된 민속놀이가 널리 전승되었으나, 명절의 퇴색과 함께 이들 민속놀이도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민속놀이가 사라졌다는 사실보다 이와 함께 민속놀이가 지니고 있던 놀이의 건전성이 훼손되었다는 사실이다. 말을 바꾸면 오늘의 새로운 놀이가 불건전한 쪽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소비적으로 들뜨게 하고 퇴폐적이고 유흥적인 방향으로 유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다수 민중들이 왜 이날에 카드와 선물을 주고받으며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인사를 나누고 케이크라고 하는 양과자를 사먹어야 하는지 모르는 가운데, 크리스마스는 수십일 간 대중매체를 타고 사람들의 조용한 마음을 흔들어놓는다.
각종 숙박업소와 유흥업소가 성황을 이루는 가운데, 퇴폐적이고 소비적인 놀이가 망년회와 신년회라는 이름으로 거듭된다. 놀이 장소도 돈으로 구입하여야 할 뿐 아니라 선물도 케이크도 심지어는 연예인들의 노래와 춤까지도 돈으로 구입하여야 한다. 상업적이고 소비적인 놀이 성향은 경제적인 놀이 계층화를 새로 조성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경제적인 빈부에 따라 놀이의 질과 종류도 크게 달라졌다.
대중매체는 놀이를 위한 상업광고를 통하여 아침저녁으로 소비를 강요하는 한편 놀이의 방향도 제시한다. 관광안내 정도에 머무르지 않고, 바캉스와 같은 낯선 용어들을 동원하면서 피서를 떠나도록 자극시키고 부추긴다. 콘도미니엄이라는 새로운 숙박시설도 끊임없이 소개된다. 무절제한 소비적 상업광고가 경제적 불평등을 표면화시키고, 놀이를 위하여 가정과 마을을 떠나도록 충동질하는 것이다. 그 결과 경제적 능력에 따라 놀이의 시간과 장소가 함께 결정되며, 놀이의 질이 계층화되어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사이의 벽을 놀이마당에까지 더욱 높게 쌓는다.
자가용을 타고 주말을 산장이나 콘도미니엄에서, 아니면 골프장에서 즐기는 놀이 층이 있는가 하면, 이때를 이용하여 거금의 수익을 올리는 이른바 레저산업이라고 하는 신종기업이 부를 더욱 축적한다. 전에 없던 관광회사들이 즐비하게 늘어나서 시골사람들까지 관광 계를 조직하고 일년에 한두 차례씩 가족과 마을을 떠나야 체면을 유지할 정도로, 놀이의 풍토가 상업자본가의 조작에 의하여 점점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놀이를 위하여 별도의 놀잇감을 구입하여야 되는 것은 물론, 먹을 것, 입을 것, 자는 곳까지 돈을 주고 구입하여야 할 사정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경제력이 있는 사람들이나 놀이를 통해서 부를 축적하는 기업주를 제외한 대다수 민중들은 남들의 화려한 놀이로 인하여 상대적으로 더욱 빈곤을 느끼게 된다. 이와 같은 놀이문화 탓으로 국민적 화합이나 지역단위의 공동체의식을 다지는 기회는 놀이마당에서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놀이의 상품화는 자연히 놀이 창조보다는 놀이 모방의 상황으로 몰고 간다. 새로운 놀이를 상품으로 포장하여 비싼 값으로 소비시키기 위하여 끊임없이 외국의 놀이들을 수입하여 들여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우리의 전통적인 민속놀이는 상대적으로 위축되게 마련이다. 윈드서핑 · 스키 · 볼링 · 행글라이더 · 골프 · 스케이트보드 · 스킨다이빙 · 롤러스케이트 등 낯선 이름들의 외래놀이들이 수입되어 값비싼 장비와 함께 판매되고 있고, 이를 퍼뜨리고 소개하는 데 대중매체와 상업자본가들이 함께 열을 올리고 있으므로, 민속놀이의 계승은 물론 창조적인 놀이의 개발은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그리고 이들 놀이를 자유로이 향유할 수 있는 부유층과 구경꾼노릇도 하기 어려운 민중들 사이의 거리는 더욱 벌어지게 되고, 놀이의 주체이며 생산자 노릇을 하여왔던 민중들이 놀이의 객체이자 소비자로 전락한 탓에, 여기서 파생되는 부작용과 놀이의 역기능이 오늘의 놀이를 점점 더 불건전하게 만들고 있다.
한편, 광복 후 정권을 잡은 사람들은 식민지정책으로 단절되고 왜곡되었던 전통문화와 민속놀이를 되살리는 데 관심이 없었다. 이러한 관심이야말로 식민지상처를 아물게 할 뿐 아니라 정신적 독립마저 성취하는 가장 우선적인 처방인데도 집권자는 이와 같은 문화적 측면을 도외시하였다. 관심의 방향이 크게 달라지지 않은 상태에서 정권이 계속 교체되었으므로 그 상처는 더욱 깊어졌다. 체력은 국력이라는 구호 아래 운동경기의 비중은 우리 문화의 어느 분야보다 높게 평가되기 시작하였다. 운동선수에 대한 대우도 다른 분야의 종사자들에 비하여 현격하게 좋아졌다.
이른바 프로스포츠라는 것이 생기면서 이러한 양상은 더욱 심화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스포츠정책이 국민일반의 평균적 체력향상이나 국민건강의 증진과는 무관한 것이기 때문에 한낱 소비적인 구경거리로 대중의 마음을 엉뚱하게 사로잡는다는 점에서 통속적인 대중문화나 다름없는 구실을 하고 있다. 프로스포츠는 재벌기업의 상업광고를 위한 수단이 되는가 하면, 운동선수들은 수입과 인기에 집착하게 되었고, 일반대중들은 관중석을 지키는 구경꾼조차 하기 어렵게 됨으로써, 이른바 스포츠정신이나 운동의 본디 목적과는 크게 어긋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 시대를 놀이조직의 시대, 놀이상품화의 시대, 놀이모방의 시대라고 규정할 수 있겠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반작용으로 대학가에서부터 민속놀이에 대한 실천적 관심과 학술적 관심이 함께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1970년대부터 불기 시작한 민속놀이에 대한 관심은 1980년대에 들어오면서 대학축제의 모습까지 바꾸어놓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쌍쌍파티 · 빙고게임 · 페스티발과 같은 서구적 놀이양식이나, 연예인들을 불러들인 대중적인 놀이행사는 내놓고 벌이기 어렵게 되었다. 탈춤패 · 노래패 · 굿패 · 풍물패 등이 전통적인 민속놀이를 축제마당에서 주도적으로 펼쳐나가기 때문이다. 대학가의 놀이문화는 일반인들에게까지 크게 영향을 미쳤다.
기능보유자를 통한 전수활동이 끊임없이 계속되는 한편, 사설단체나 강습소에서까지 탈춤을 가르치고, 민요 · 판소리 · 풍물 등을 교습하고 익히는 단체가 두루 생겨났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이 마을공동체의 대동놀이로 뿌리를 다시 내리려면 범국민적인 문화적 각성이 뒤따라야 한다. 민중이 놀이의 주체로 복귀하고 전통적인 지역축제의 대동적 민속놀이양식을 되살리는 것이 우리의 삶을 건강하게 하고 민족문화를 창조적으로 발전시키는 길임을 민속놀이의 건강성을 통하여 깨쳐야 할 것이다.
아이들의 놀이도 사내아이와 계집아이의 놀이가 구별되어 있다. 놀잇감과 놀이양식에서 성적 특징에 알맞게 놀이가 개발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내아이들의 놀이로는 고누 · 땅재먹기 · 자치기 · 제기차기 · 장치기 · 깡통차기 · 딱지치기 · 돌치기 · 말타기 · 군사놀이 등이 있다. 이들 놀이는 놀잇감이 필요 없는 것이 적지 않으나, 놀잇감을 필요로 하는 경우에도 아주 단순하고 간단한 것들이 소용된다. 돌멩이와 같은 자연물을 그대로 이용하거나 헌 깡통과 사금파리 등 폐품을 이용해서 놀이를 할 수 있는 것들이다. 딱지치기 · 팽이치기 · 제기차기 등의 놀이들은 있는 그대로의 재료로는 놀잇감으로 삼을 수 없다. 나무를 다듬거나 종이를 접고 오려서 놀잇감을 만들어야 한다. 팽이 · 제기 · 딱지 등은 아이들의 놀잇감이자 공작품이기도 하다. 놀잇감을 스스로 만드는 과정에서 공작술을 익히고 공작하는 즐거움과 창조적 표현의 기쁨도 느낀다.
공기놀이 · 고무줄놀이 · 콩주머니놀이 · 널뛰기 · 그네뛰기 등은 계집아이들의 놀이이다. 계집아이들이 즐기는 공기놀이는 적당한 자갈만 있으면 어느 곳에서나 할 수 있다. 콩주머니놀이는 놀잇감인 콩주머니를 만들어야 한다. 이것을 만드는 데에는 초보적인 바느질솜씨가 필요하다. 어느 정도 성장한 계집아이들은 제 스스로 콩주머니를 지어낼 수 있다. 사내아이들의 놀잇감인 팽이와 장치기 막대는 남자들의 세계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를 그들이 주로 쓰는 연모를 사용해서 제작하는 것처럼, 콩주머니는 여자들의 세계에서 널리 쓰이는 재료를 여자들이 주로 쓰는 연모를 사용해서 만들어낸 것들이다.
그러므로 놀이양식은 놀잇감을 구하거나 만들 수 있는 놀이 주체의 세계와 밀접한 관련성을 지닌다고 하겠다. 아이들의 놀이는 놀잇감이 이처럼 단순하지만, 이러한 단순성이 오히려 놀이를 창조적으로 다양하게 개발시켜 주는 구실을 한다. 아이들은 고무줄 하나로 10여 종 이상의 놀이를 변화 있게 즐긴다. 각종 춤동작이 여러 가지 동요와 함께 일정한 박자에 맞추어 조화를 이루고 있다. 고무줄을 늘여가면서 점차 복잡해지고 어려워져 가는 노래와 춤과 곡예를 차례로 진행하여 나간다.
콩주머니놀이도 마찬가지이다. 그 받는 동작의 다양한 난이도와 노래의 관계가 계속해서 발전된다. 사내아이들의 제기차기도 그렇다. 제기가 하나면 또래끼리 얼마든지 창조적인 놀이를 개발하여 즐길 수 있다. 차는 양식도 가지가지이고 겨루기 하는 방식도 다양하다. 놀이의 양식을 보면 사내아이들의 놀이는 그 명칭에서 보는 바와 같이, ‘치기’와 ‘차기’ 형식의 놀이가 대부분이다. 작은 손놀림보다는 팔을 휘둘러 치는 놀이와 발로 차는 놀이가 우세하다. 그러나 계집아이들의 놀이는 ‘놀이’와 ‘뛰기’가 주를 이루고 있다.
공기놀이나 콩주머니놀이처럼 손놀림을 주로 한 놀이이거나 그네뛰기 · 널뛰기 · 고무줄놀이 · 줄넘기놀이 등 온몸을 솟구쳐 뛰거나 박자에 맞추어 율동적으로 움직이는 놀이가 주를 이룬다. 사내아이들의 놀이는 팔다리의 근육을 골고루 발달시켜주는 놀이양식을 취하였다면, 계집아이들은 손재주를 기르거나 뛰기와 같은 전신운동으로 몸매를 다질 수 있는 놀이양식을 취하였다. 성별에 따라 생리적 특성에 맞게 놀이가 개발되어 있는 것이다.
아낙네들의 놀이에는 놀잇감이 거의 소용되지 않는다. 계집아이들이 하는 놀이 종목과 그 성격이 비슷하다. 겨루기의 형식을 취하지 않고 자족적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계집아이들의 놀이와 차이를 보이는 것은 세시풍속과 관련되어 있는 놀이들이다. 아낙네들 놀이의 자족성은 춤과 노래로부터 주어진다. 강강수월래는 마을아낙들 여럿이 어울려서 손을 잡고 활달한 원무를 추고 노래를 부르면서 즐기는 놀이이고, 놋다리밟기는 두 패로 나뉘어서 노래를 부르며 놋다리를 밟아 나가는 놀이이다.
이들 놀이는 마을아낙들이 집단적으로 참여하는 대동놀이로서 지역적 통합기능과 제의적 주술기능을 함께 발휘한다. 춤과 노래가 중심을 이루고 있으므로 남정들의 놀이와 달리 여성적인 부드러움과 율동이 놀이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된다. 이들 놀이는 정월 보름, 또는 팔월 보름의 농공시필기에 이루어지는 놀이이므로, 풍농을 기원하고 추수를 감사하는 고대 제의의 한 양식이라 하겠다. 고대에는 여성들도 지역사회의 공동제의에 주체적으로 참여하였다고 볼 수 있는 문화적 흔적인 셈이다.
일과 관계된 아낙네들의 놀이로는 다듬이놀이 · 길쌈놀이 · 해녀놀이 등이 있다. 공동으로 길쌈을 하기 위하여 두레를 조직하고 노래와 옛날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일의 고달픔과 지리함을 잊는다. 두레길쌈이 끝나면 맛있는 별식을 장만하여 모아두고 노래와 춤을 즐기는 놀이판을 벌인다. 더러는 어느 쪽이 길쌈을 더 곱게 빨리 하였는가를 겨루어보기도 한다. 분업사회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협업의 즐거움이 두레길쌈에 있다. 이처럼 일을 놀이와 더불어 즐기는 가운데, 일의 능률을 올리고 생산성을 높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풍농과 일 및 생산성과 무관한 소비적인 놀이는 생각하기 어렵다.
일과 직접 관련되지 않은 놀이로는 화전놀이와 방천놀이 등을 들 수 있다. 이 놀이는 남정들의 천렵에 대응될 만한 아낙네들의 계절놀이이다. 화전놀이는 화창한 봄날을 잡아서 진달래가 많이 핀 봄에 산에 올라가 꽃잎으로 부꾸미를 구워먹으며 노래와 춤으로 하루를 즐기는 봄놀이이다. 이때 「화전가(花煎歌)」라는 꽃노래가 불려진다. 스스로 노래의 사설을 짓고 가락을 붙여 직접 부르는 기회를 가지는 것이다. 이러한 기회를 통해서 삶의 문제와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로 표현하는 문예창작의 능력을 기르고, 생활 속의 감정을 정서적으로 토로해내는 것이다.
방천놀이 역시 야외에서 소리판을 벌이는 것이다. 여기서는 한 해 동안 지어 두었던 새 노래가 돌림노래로 발표된다. 우수한 노래는 널리 불려져 공동의 노래로 뿌리를 내리게 되므로, 시가문학의 경연장 구실을 한다. 여성들의 문예적 역량이 표출되는 놀이양식인 것이다. 그러면서 집안에 갇혀 있는 아낙들의 춘정을 자연스럽게 발산시키는 구실을 한다. 요즈음은 시골아낙들까지 소비적인 봄놀이 관광에 익숙하여 이러한 창조적 놀이들이 전승기반을 잃고 있다.
고싸움 · 동채싸움 · 나무쇠싸움 · 농기싸움 · 편싸움 · 횃불싸움 등 남정들의 놀이는 명칭에서부터 싸움형식의 겨루기놀이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차기’ 또는 ‘치기’와 같은 사내아이들의 겨루기 양식과 일치하면서, 그 방식이 한층 격렬하고 규모도 거대한 ‘싸움’ 형식을 취하고 있다. 놀잇감부터 거대하고 복잡하다. 아이들의 놀이에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동채 · 고 · 나무쇠 등 거대한 놀잇감이 동원되는가 하면, 각종 풍물과 깃발 등이 함께 준비되어야 한다. 풍물을 구입, 보존하고 동채( 차전놀이 도구)와 같은 거대한 놀잇감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이미 마을단위의 성원이 함께 참여하는 집단적인 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집단적인 패놀이는 그 양식상 오랫동안의 준비 기간과 소정의 경비를 필요로 하며 대규모의 인원이 한꺼번에 동원되어야 하므로 수시로 판을 벌일 수 있는 놀이가 못 된다. 따라서 남정들의 놀이는 자연히 세시풍속과 밀접한 관련을 지니지만, 세시풍속이 약화되면 이들 놀이도 전승이 중단된다. 요즈음 이들 놀이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은 전통적인 세시풍속이 외래문화의 영향으로 약화되어 버린 탓이기도 하다. 세시풍속과 관련된 남정들의 놀이는 풍농과 안녕함을 기원하는 제의적 기능을 함께 수행하고 있다. 따라서 동부와 서부의 두 패로 갈라 겨루기를 하는데, 여성을 상징하는 서부가 이겨야 풍년이 든다는 속신이 있다.
그러므로 이들 놀이는 남정들끼리만 즐기는 놀이가 아니라 그들이 속하여 있는 마을사람들과 더불어 즐기는 지역공동체의 축제나 다름없다. 이때 마을사람들은 놀이의 구경꾼이라는 처지를 넘어서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일체감을 다지고 그 동질성을 확보한다. 싸움형식의 놀이가 아닌 것들도 세시풍속이나 계절의 변화에 관계없이 수시로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신밟기 · 기세배 · 풍물놀이 등은 세시풍속과 관련되어 놀이되는 것이며, 호미씻이 · 풋굿 등은 농사력과 밀접한 관련성을 지닌 놀이들이다.
아이들과 달리 일을 하는 어른들에게는 세시풍속에 따르는 각종 명절, 또는 농사철의 틈을 이용한 대규모집단놀이들 외에 서너 사람이 아무 때나 즐길 수 있는 놀이는 거의 없는 편이다. 따라서 남정들의 놀이는 그 규모도 대단하고 범지역적 놀이의 성격을 자연스럽게 띠게 된다. 오늘날은 건전한 놀이로 알려진 바둑과 장기도 일하는 민중들에게는 잡기로 받아들여질 정도였다. 그러므로 생산적 의미와 공동체적 기능을 지닌 축제형식을 떠나서 이루어지는 남정들의 민속놀이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세시풍속과 관련된 어른들의 놀이는 사실상 마을 전체의 놀이라고 할 수 있다. 풍농기원의 제의적 성격을 지닌 놀이는 이러한 성격이 더 짙다. 이를테면 아낙들이 하는 놋다리밟기나 강강수월래, 남정들이 하는 동채싸움이나 고싸움놀이 등은 마치 남녀 어른들에 한정된 놀이 같으나, 그 참여의 범위나 놀이의 기능으로 보아 마을 전체의 놀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남녀노소의 구분 없이 마을사람 전체가 함께 참여하는 가장 대표적인 놀이는 역시 줄다리기이다. 줄다리기는 지역주민들 사이에 겨루기를 통해서 공동체의식을 강화하는 한편, 성행위굿 형식의 주술성을 지니고 있다. 동부의 수줄과 서부의 암줄이 생긴 모양이나 그 결합 과정 및 줄을 당기는 과정이 남녀의 성적 결합을 상징하고 있어, 풍요다산을 기원하는 유감주술(類感呪術)의 성행위굿에 입각하여 있다. 이러한 주술성 때문에 줄다리기는 일반적으로 생산의 현장인 논밭에서 한다. 그러므로 민족항일기에 관권에 의하여 줄다리기를 하지 못하게 되자 흉년이 들었다고 하며, 밤에 일본 경찰들의 감시를 피하여 몰래 놀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마을사람들 전체가 공동으로 참여하고 구경하는 놀이는 놀이 자체의 집단적 성격 때문이기도 하지만, 공동 참여를 유도할 수 있는 지역 단위의 공동 목표가 있으므로 가능하다. 이를테면 지신밟기를 하여야 지신을 누르고 잡귀를 몰아내어 마을이 평안하고 풍년이 든다든가, 줄다리기를 하여야 새해의 흉풍을 점치고 마을의 질병과 재앙을 막을 수 있다는 제의적 목적이 그것이다. 이러한 공동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주민들은 이웃끼리 협동하는 가운데 놀이판에 공동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마을 전체가 참여하는 놀이는 ‘대동놀이’와 ‘패놀이’로 구분할 수 있다.
대동놀이가 노래와 춤을 즐기는 가운데 더불어 하나가 되는 대동적 일체감을 확보하는 놀이인 데 비하여, 패놀이는 지리적 위치에 따라 나누어진 두 패가 서로 맞부딪쳐서 겨루기를 하는 동안에 상대적으로 획득되는 연대의식을 고취하게 되는 놀이이다. 대동놀이는 고대 삼한시대의 제천행사 때부터 있어 온 가무사제형식(歌舞司祭形式)의 대동굿에서 비롯된 것이다. 대동굿이 가지는 전통적인 제의성이 후대에 들어온 외래종교들이 가지는 제의성과 일치하지 않으므로 오락적인 놀이 개념으로 한정되어 버렸다.
그러나 농경의식과 밀접한 관련 속에 행하여지고 놀이 전후에 제의가 바쳐지는 한편, 각종 주술적인 기원이 의식 및 노래 속에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대동굿으로서의 제의적 성격이 아직도 뚜렷하다. 대동놀이는 농공시필기 및 성장기에 두루 놀아질 수 있는 것이되, 그 목적상 미리 하는 기원과 감사의례에 한정된다. 패놀이는 놀이의 승패에 따라 점풍(占豐)의 기능을 지닌다. 따라서 패놀이는 주로 정초에 놀아지며, 승패에 따라 흉풍이 결정되는 것이므로 승부욕으로 열기가 대단하다. 패놀이는 다른 집단과 모의적인 대립관계를 의도적으로 조성함으로써 공동체의 유대를 다지는 기능이 있다.
외부 세력과 겨루기를 통해서 공동의 승리와 풍년을 위하여 서로 힘을 모으고 의지를 집약하는 협동의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다. 이에 갈등과 분쟁이 잠재되어 있는 마을에서도 다른 마을과 서로 경쟁하는 패놀이를 함으로써 평소보다 강한 공동체의식으로 뭉치고 단결하여 겨루기에 대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을 전체가 참여하는 놀이는 어떠한 놀이이든 공동체의 사회적 통합과 결속을 강화해주는 대동적 기능과 풍농 및 마을의 번영을 기원하는 주술적 기능을 함께 지닌 셈이다.
통과의례와 관련된 놀이는 주로 잔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잔치는 경사를 맞이해서 일가친척과 이웃사람들을 청해서 술과 음식을 대접하고 노래와 춤을 즐기는 일종의 향연이다. 백일잔치 · 돌잔치 · 혼인잔치 · 회갑잔치 등은 아직까지 행하여지고 있다. 관례 때도 잔치를 하였으나 하층에까지 일반화되지 않았으며 오래 전에 중단되었다. 잔치는 ‘이바지’ · ‘큰일’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바지가 술과 음식을 정성껏 장만하여 널리 베풀어 대접한다는 뜻에서 쓰인 말이라면, 큰일은 큰 의식을 치른다든가 잔치하는 일이 예삿일이 아니라는 뜻에서 쓰인 말이다. 큰일이라고 할 때에는 경사에 속하지 않는 장례도 포함된다.
백일잔치와 돌잔치는 잔치의 주체가 어리기 때문에 특별한 놀이가 행하여지는 것은 아니다. 이때는 아이의 수명장수와 건강한 성장을 기원하는 뜻의 잔치음식을 장만한다. 옷차림이나 장식물 역시 이러한 기원에 바탕을 두고 있다. 백일떡이나 돌떡으로 수수떡이 빠지지 않는 것은 수수경단의 둥근 모양이나 붉은 색깔에서 덕을 상징하고 잡귀를 물리쳐 무병을 기원하는 동시에, 수수의 키처럼 쑥쑥 건강하게 자라라는 유감주술의 의미도 담겨 있기 때문이다.
돌잔치에서 가장 중요한 의식은 돌잡이놀이이다. 아기가 돌상 위에 놓인 활 · 실 · 쌀 · 책 · 붓 · 대추 등에서 무엇을 먼저 집느냐에 따라 아기의 장래를 예측하여 보는, 속신에 바탕을 둔 놀이라고 할 수 있다. 아기가 활을 먼저 집으면 장군이 되고, 쌀을 집으면 부자가 되며, 책이나 붓을 집으면 선비가 된다고 믿는 것이다. 어른들은 이 광경을 지켜보고 아기의 장래 성취를 낙관하면서 손뼉을 치며 즐긴다.
혼인잔치는 상당히 성대하다. 회갑잔치와 함께 마을잔치로 성대하게 베풀어진다. 놀이는 대례(大禮) 마당에서부터 시작된다. 신랑이 대례 청에 서서 신부를 기다리는 동안 하객들은 여러모로 신랑을 놀린다. 코가 크니 뭣도 크겠다든가, 포선(布扇:얼굴을 가리는 네모난 베 조각)으로 입을 가리고 있는 걸 보니 입이 째보인 모양이라고 하면서 말재담으로 신랑을 놀리며 웃기려 든다.
구경꾼들은 놀림말이 재미있어 웃기도 하지만 신랑이 애써 웃음을 참는 모습 때문에 더욱 웃게 된다. 대례를 마치면 대례 청에 놓아둔 닭을 신부 측과 신랑 측의 젊은이들이 서로 가지려고 다투는 것도 일종의 놀이이다. 본격적인 놀이는 첫날밤의 신방을 지켜 보는 일이다. 신방에는 이부자리가 깔려 있고 병풍이 둘러쳐져 있는데, 신랑과 신부가 주안상을 마주하고 있다. 지켜보는 이들이 신부에게 첫아들을 낳도록 주안상의 알밤을 먼저 먹도록 권한다.
주안상을 물리면 신랑이 신부의 옷을 벗기는 차례가 된다. 집안의 부녀들이 문구멍을 뚫고 신방을 엿보면서 신랑 · 신부를 놀린다. 옷을 벗기는 차례를 가르쳐 주기도 한다. 옷벗기는 장면이나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드는 광경을 보고 즐기는 것이다. 신방지키기는 일종의 의식이면서 첫날밤에 관한 인간적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는 놀이라고 하겠다.
다음날에는 동상례(東床禮)라고 하는 신랑다루기놀이가 행하여진다. 동네 청년이나 일가 친척들이 모여서 신랑을 묶어놓고 술과 안주를 내놓으라고 한다. 신랑이 수완을 발휘하여 닭도 잡아오고 잔치용으로 준비하여둔 돼지다리도 찾아온다. 그렇게 못하면 닦달이 심하다. 주로 신랑의 다리를 묶어 시렁에 거꾸로 매달아 놓고, 발바닥을 마른 명태나 방망이로 때리고 간질이기 때문에 여간 고통이 아니다. 신랑으로서는 최대의 시련이다. 통과의례의 시련을 단단히 겪는다. 동상례를 통해서 처가의 식구들과 아주 허물없는 사이가 된다.
회갑 때는 가장 큰 잔치가 벌어진다. 의식보다 놀이가 한층 강조된다. 풍물놀이가 중심을 이룬다. 회갑주(回甲主)에게 헌수(獻壽)를 하는 의식을 끝내면 마을사람들이 풍물을 치며 춤판을 벌인다. 회갑주를 업고 나와 목말을 태우기도 하고 들것을 준비하여 그 위에 태우고 춤을 추기도 한다. 재미있는 놀이는 솥검정이나 먹물로 회갑주의 아들딸과 며느리 · 사위의 얼굴에 환을 그리는 일이다. 환을 그리지 않으려고 실랑이질을 벌이는 것부터 재미있다. 주로 안경과 수염을 과장되게 그려 회갑주와 손님들을 즐겁게 한다. 회갑주를 기쁘게 해주려는 놀이이다.
장례 때는 빈상여놀이가 행하여진다. 지방에 따라서는 대돋움이나 상여놀이라고 한다. 상여가 나가기 전날 밤에 상두꾼들을 모아 빈 상여를 메고 앞소리꾼이 상여소리를 메기며 망자의 친척이나 동갑친구들을 찾아가서 주안을 대접받는다. 지역에 따라서는 판소리를 부르며 북을 치고 노래와 춤을 즐기기도 한다. 상여를 마치 동채 놀리듯 한다는 말도 있다. 이러한 전야의 축제분위기는 출상 당일에도 이어진다. 기생들이나 마을의 부녀들이 상여 앞에서 상엿소리와 북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며 나간다. 가무가 어우러진 장례행렬을 이루는 것이다. 유가족들이 슬픔에 몰입하는 것을 차단하고, 가무의 흥겨움으로 살아 있는 사람들의 삶의 의지를 고양시키는 구실을 한다.
세시풍속과 관련된 놀이들은 그 시기에 따라 기풍(祈豐) · 성장 · 수확의례의 놀이로 구분할 수 있다. 정월과 2월의 놀이들이 기풍의 놀이라면, 하절기에 하는 놀이는 성장의례와 관련된 놀이이며, 가을에 하는 놀이는 수확의례와 관련된 놀이이다. 그리고 구체적 목적에 따라 풍농을 기원하는 예축 형식의 놀이와 흉풍을 미리 점쳐보는 점풍 형식의 놀이가 있다.
농한기인 겨울철의 놀이는 정월에 집중되어 있다. 설에는 조령 및 조상에 대한 차례와 세배로 혈연간의 상하유대를 다지며, 일년간의 계획을 세우고 몸과 마음을 삼가는 때이므로, 윷놀이 및 종경도놀이와 같은 소규모 가족 단위의 놀이가 주로 집안에서 행하여진다. 그러나 보름이 되면 놀이의 양상이 크게 달라진다. 동신에게 제의를 바치고 지신밟기를 하는가 하면, 줄다리기 · 동채싸움 · 고싸움 · 편싸움 · 놋다리밟기 등의 야외놀이를 대규모로 하게 된다. 동신제는 지역신에게 마을의 평안과 풍농을 기원하는 제의인데, 마을 단위로 놀게 되는 대보름의 놀이도 이와 같은 의미와 기능을 지닌다.
동신을 구심점으로 하여 마을공동체의 횡적 결속을 다지는 동제의 기능과 마찬가지로, 이들 놀이 역시 대동성을 확보하며 마을사람들 사이에 평등한 처지에서 유대를 다지는 기능이 있다. 설의 놀이가 개인적이고 가족적인 점복행위와 관련되어 있다면 보름놀이는 마을 단위의 점풍행위와 관련되어 있다. 여성들이 하는 놋다리밟기는 그 춤사위가 보름달의 생멸 과정을 형상화하고 있으며, 노래 역시 일년 생산신을 상징하는 남성을 맞이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어 풍농 기원의 의미를 상당히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특히,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하는 지신밟기는 가정의 재앙을 물리치고 일년간의 안과태평(安過泰平)을 기원하는 창조놀이로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하절기에 이르면 단오와 호미씻이라는 세시풍속이 있다. 단오는 설 · 보름 · 추석과 함께 4대 명절 중의 하나이다. 호미씻이는 논매기를 모두 마치고 하는 일꾼들의 축제이다. 호미씻이를 풋굿이라고 하듯이 단오도 단오굿이라고 하여, 놀이만 행하여지는 것이 아니라 동신에 대한 제의도 바친다. 단오굿과 풋굿은 정월 보름의 동신굿과 달리 농작물의 성장을 기원하는 성장의례에 속한다. 시기로 보아 단오굿이 밭농사 작물에 관한 것이라면, 풋굿은 논농사 작물에 관한 것이다. 작물의 생장을 위하여 사람이 할 일은 다 마쳤으니 동신께 마지막으로 풍농을 비는 셈이다.
단오에는 여성들의 그네뛰기와 남성들의 씨름이 행하여지고 풋굿에는 풍물놀이를 특히 드세게 한다. 씨름이 남성의 놀이답게 둘이서 맞겨루어 상대를 쓰러뜨리고 승부를 낸다면, 그네는 여성들이 박자에 맞추어 발을 굴려서 그네를 높이 오르게 한다. 단오는 초여름의 무성한 수목과 성장하는 곡물들처럼 힘과 기량을 겨루어서 젊음의 기상을 발산하는 가운데 농번기를 맞기 전에 신명나는 놀이를 즐기는 명절이고, 풋굿은 주된 농사일을 모두 마치고 노동의 매듭을 지으면서 그동안에 쌓인 피로를 푸는 일꾼들의 향연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풋굿을 계기로 호미를 씻고 그 동안 함께 일하여 왔던 두레가 해체된다.
가을에는 추석과 중구(重九)가 있어 새로 수확한 햇곡식과 햇과일을 조상신에게 바치는 차례를 올린다. 추수감사제에 해당된다. 햇곡식이 나는 절후가 지역에 따라 다르므로 시기적으로 통일성을 지니지 않는다. 추석에서 중구 사이에 적절한 날을 잡기도 하나, 요즈음은 추석이 공휴일이 되므로 모두 이 날에 차례와 성묘를 하게 되었다. 추석에는 여성들의 강강수월래놀이가 보름달의 풍요를 상징하면서 달밤에 놀이가 되었다. 가을철의 풍요를 경축하는 놀이인 셈이다. 남성들은 소놀이를 한다. 일년 동안 농사일을 열심히 도와준 소의 고마움에 진지한 관심을 표현하는 한편, 일꾼들이 소처럼 일하였음을 소놀이로 상징하면서 지주들이 향연을 베풀도록 한다.
이와 같이 통과의례에 따른 놀이들이 사람의 일생을 중심으로 수명장수와 복록(타고난 복)을 비는 의미를 지녔다면, 세시풍속에 따른 놀이들은 일년 단위로 농사가 잘되고 마을이 평안하도록 기원하는 의미를 지녔다. 이에 따라 통과의례의 놀이들은 개인적이고 가족적인 문제와 관련되어 소규모로 놀아지는 데 비하여, 세시풍속의 놀이들은 어느 것이나 지역공동체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으므로 대규모로 놀아지게 된다.
세시풍속의 놀이들이 순전히 농사력이나 풍농의 의미에 한정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연날리기나 팽이치기 등의 놀이가 바람이 많고 얼음판도 이용할 수 있는 겨울철 놀이라면, 천렵이나 화전놀이는 개울물이 풀려 고기들이 놀고 진달래가 한창 필 무렵인 봄철의 놀이들이다. 특히 연날리기, 팽이치기, 천렵, 화전놀이 등은 계절놀이라고 하겠다. 계절의 상황에 따라 놀이가 결정되기도 하므로 사철의 변화가 뚜렷한 우리 나라는 계절과 놀이가 일정한 관련을 지니고 있게 된다. 그러므로 명절놀이와 달리 계절놀이는 별도의 특성을 지닌다.
무속의 제의양식이 굿이다. 굿은 곧 노래 부르고 춤추는 것이라고 할 정도로, 가무가 중심이 되는 제의양식을 취하고 있다. 굿에서 노래와 춤은 신을 즐겁게 하여 신으로 하여금 인간의 소망을 이루어 주도록 하는 가무 오신의 행위이다. 따라서 가무사제(歌舞司祭)의 굿은 인간을 즐겁게 하는 놀이양식과 일치한다. 인간의 가장 적극적인 놀이양식이 곧 노래와 춤인 것이다.
무당들 스스로도 굿판에서 가무로 신명풀이를 하지만, 제주(祭主)들도 굿판에서 무당들과 어울려 가무를 즐긴다. ‘며느리 춤추는 꼴 보기 싫어 굿 못하겠다.’는 속담은 이러한 놀이의 성격을 반영하는 것이다. 마을굿의 경우는 이러한 놀이적 성격이 더 강하다. 서낭굿 또는 별신굿, 도당굿 등으로 불리는 마을굿은 독축고사의 비의형식(祕儀形式)으로 이루어지는 동제와 달리, 마을의 풍물잡이가 중심이 되는 가무사제이다. 이때는 신분상의 제약이나 남녀의 구별이 없이 자유롭게 참여하며, 공동으로 제의를 바치고 풍물굿의 신명을 즐기는 마을축제가 된다. 국중대회의 잔존 형태라고 할 만하다.
「하회별신굿놀이」는 농촌별신굿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별신굿의 일환으로 연행되는 하회탈춤은 추는 이나 보는 이가 민중적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신분사회의 모순을 풍자하는 가운데 현실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놀이로써 즐거움도 만끽한다. 어촌에서 하는 별신굿에서도 탈춤을 비롯한 각종 놀이양식이 무의와 함께 베풀어진다. 별신굿을 담당하는 세습무(世襲巫)들은 특히 오락성과 연예성이 강하다. 굿의 영험성(신불이 베풀어준다는 신기한 징험성)보다는 무당들이 노래를 잘 부르고 춤을 신명나게 추며 굿을 흥미롭게 이끌어갈 때 주민들로부터 굿을 잘한다는 칭찬을 듣고 훌륭한 무당으로 평가받는다.
따라서 별신굿에서는 구경거리가 되는 놀이 형식의 잡희들이 많다. 천왕굿에서 원님이 부임하여 기생을 점고(點考:명부에 점을 찍어가며 사람의 수효를 조사함.)하는 놀이를 하거나, 세존굿에서 중의 부정적인 면을 보여주는 중도둑잡이 잡희를 벌이는 것은 제의라기보다 놀이에 가깝다. 무가도 세속화되어 흥미 본위로 수식되고 무당부부가 함께 나와 음담패설을 주고받는 등 오락성이 짙어서, 별신굿은 이웃마을 사람들까지 참여하는 큰 구경거리가 된다. 마지막에 모든 신들을 배송(拜送)하는 거리굿은 해학과 풍자, 재담과 노래, 욕지거리와 과장된 몸짓 등으로 관중을 사로잡는 놀이마당이 된다. 오늘날의 원맨쇼나 코미디가 따라잡을 수 없는 놀이가 굿마당에서 벌어지는 것이다.
또한 어촌의 별신굿에서는 놀이굿이 별도로 있다. 무당들이 하는 굿거리 사이에 몇 차례씩 마을사람들이 굿마당에 각자 나와 풍물장단에 맞추어 춤과 노래를 직접 즐기는 것이다. 무당들이 하는 굿거리에서도 신명이 나는 사람들은 무당과 어울려 춤을 추기도 하지만, 놀이굿에서는 무당들이 아예 굿판을 비워 주고 마을사람들이 흥겹게 놀도록 거들어주는 구실만 한다. 이러한 놀이굿은 무당들이 하루의 굿을 마치고 다음날 굿을 다시 시작할 때까지 밤새도록 굿판에서 계속되기도 한다. 마을 젊은이들은 이때 굿판을 지키면서 신명풀이를 마음껏 하는 것이다.
우리 놀이의 전반적인 특징은 국중대회의 대동놀이에서 찾을 수 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및 『후한서 後漢書』의 기록을 보면, 한결같이 나라사람들이 크게 모여서 술을 마시고 노래와 춤을 즐기면서 제천행사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남녀가 함께 더불어 춤추며 주야로 쉬지 않고 음주가무하였다는 내용이 두드러진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노래와 춤을 즐겼으며, 이때에는 반드시 술을 마시고 맛있는 음식을 장만해서 마음껏 먹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놀이전통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연중 술 소비량이 다른 나라에 비하여 앞서 있다는 통계도 이러한 전통을 반영하고 있다. 지금도 신바람 나는 민중의 놀이에는 반드시 풍물이 따르고 노래와 춤이 어우러지게 된다. 관광지나 유원지에서 집단적으로 풍물을 잡히면서 노래부르고 춤추는 장면을 쉽게 볼 수 있다. 나라 안에서만 그러한 것은 아니다. 중국의 한국인자치구역에 사는 우리 동포들도 마찬가지이다. 백두산까지 들놀이를 가서도 풍물을 치며 춤추고 노래부르기를 즐겨 한다.
그리고 어느 놀이판이든지 술과 안주가 푸짐하게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 야외에서 놀이를 할 때에도 이러한 준비가 집안의 잔치 이상으로 성대하게 마련된다. 냇가에서 개를 잡아 큰 가마솥을 걸어놓고 고아먹는 풍속도 먹고 마시는 데 상당히 비중을 둔 우리 민족의 특징적인 놀이 모습이라 하겠다. 춤과 노래의 양식이나 악기도 대동놀이의 특징에 맞게 개발되어 있다. 대동놀이는 집안의 마당놀이로서 하는 외에 더러는 마을의 넓은 공터나 야외의 들판에서 이루어진다. 두레노동을 하면서 풍물을 잡는 경우는 들녘 전체가 놀이마당이 된다. 따라서 놀이의 흥을 돋우는 악기 역시 소리가 크고 울림이 강한 꽹과리 · 징 · 북 · 장구등 타악기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들 풍물은 실내에서 연주하면 거의 소음에 가까울 정도로 시끄러우나 야외에서는 풍물놀이의 신명을 돋우기에 적절하다. 풍물의 이러한 성격 때문에 우리 민요는 지신밟기를 제외하면 풍물의 반주에 의하여 불려지는 것이 없다. 풍물소리가 유난히 커서 노래와 사설이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풍물은 노래의 반주악으로서보다 춤을 위한 박주악이라 하겠다. 지금도 운동회 때 아동들이 풍물을 치면 노인네들이 운동장에 나와 춤을 덩실덩실 추는 것을 볼 수 있다. 풍물은 춤을 유도하는 악기인 것이다.
풍물반주에 의한 우리 춤은 서양 춤과 큰 차이를 보인다. 양춤은 남녀가 서로 손을 마주잡고 추는 대무형식(對舞形式)의 쌍쌍춤이다. 사교춤에서나 포크댄스라고 하는 민속춤에서도 한결같다. 그래서 스텝이라고 하는 발놀림이 특히 문제된다. 그러나 우리 춤은 쌍쌍춤이 아니라 대동춤이다. 두 팔을 좌우로 크게 벌리고 여러 사람이 더불어 어울리는 춤이므로 손놀림이나 발놀림이 함께 자유롭다. 따라서 동작이 크고 활달한 신명의 춤이 우리 춤이다.
풍물의 반주가 없으면 「쾌지나칭칭나네」를 부르면서 풍물반주를 대신한다. 「쾌지나칭칭나네」는 후렴구를 풍물소리의 의성어로서 나타낸 선후창의 노래로서, 풍물이 없이도 춤의 신명을 돋우어주는 구실을 한다. 민요의 일반적인 양식도 후렴구에 의한 선후창, 또는 대구(對句)에 의한 교환창으로 이루어져서 공동조직에 의한 집단적 가창형식을 취하고 있다. 노래 역시 대동성을 지니고 있다.
농경의례와 관련된 놀이는 이웃나라들과 비슷하다. 줄다리기를 하여 암줄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든가, 단오에 그네뛰기를 하면 농작물이 잘 자란다든가 하는 것은 동북 · 동남아시아의 벼농사지역에서 비슷하게 나타난다. 소련의 발트해지방에서는 봄의 부활제로서 성요한일(夏至)까지 그네를 뛴다. 타이에서는 그네뛰기를 새해 초에 많이 한다. 인도네시아에서는 벼 수확기에 그네뛰기를 한다. 일본의 남구주(南九州)와 난세이제도에서는 보름날 밤에 줄다리기를 한다. 오키나와에서는 수확제 때 이 놀이를 한다. 풍년을 동쪽으로부터 서쪽으로 당겨와야 한다고 믿기 때문에 서쪽이 이기도록 한다.
윷놀이의 문헌상 유래가 명확히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이웃나라는 물론 에스키모족과 북아메리카 인디언들도 윷놀이를 한다. 윷의 재료나 놀이 방법에 약간씩 차이를 보이지만 4개의 토막을 던져 그 나타나는 면에 따라 놀이를 진행한다는 점에서 같다. 윷놀이도 원초적으로 승패에 따라 풍농을 점치는 기능이 있었다. 그러므로 농경의례 및 풍농 기원과 관련된 놀이는 중국 · 일본과 함께 아시아의 이웃나라에서도 함께 놀이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탈춤이라든가 꼭두각시놀음 등의 극적인 놀이는 자생적인 것으로 밝혀져 있다. 고싸움과 동채싸움 · 놋다리밟기 등 민중들의 집단놀이도 우리 고유의 놀이라고 하겠다. 특히 고싸움은 줄다리기의 앞놀이에서 발전적으로 변형된 창조적인 우리 놀이이다. 강강수월래 · 놋다리밟기 · 화전놀이 등 여성들의 춤놀이가 노래와 함께 전승된다는 점도 우리 놀이의 특징으로 들 수 있다.
주목할 만한 것으로는 줄타기 · 대접돌리기 · 땅재주부리기 등 묘기와 곡예를 보이는 놀이의 경우에는 다른 나라와 달리 연희자와 매호씨라고 하는 대화의 상대역이 재미있는 사설을 주고받으면서 연희를 한다는 점이다. 아슬아슬한 묘기의 긴장과 웃음을 터뜨리게 하는 해학적인 말재담의 이완이 묘한 역동성을 자아내어, 보고 들으며 즐기는 놀이로서 우리 놀이의 독자적 개성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양식의 원초적인 모습은 풍물패(농악대)의 잡색놀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잡색들은 풍물을 치지 않고 풍물잡이와 더불어 말재담을 주고받으면서 과장된 몸짓으로 세태를 풍자하고 관중을 웃기는 구실을 한다. 민족극의 싹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말재담의 해학성과 극적인 풍자성을 지닌 문예적인 성격이 강하다는 사실 또한 우리 놀이의 특징으로 정리할 수도 있겠다.
현대의 놀이문화는 산업화 사회에서 정보화사회로 넘어가는 전환기의 두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산업화사회에서는 놀이도 산업화되어 기업이 투자하고 경영하는 놀이산업이 성행한다. 농경사회에서는 줄다리기와 지신밟기 등 세시풍속에 따른 공동체 놀이가 두드러졌는데, 산업사회에서는 서울랜드와 같은 놀이 공원이나 노래방 등의 상업화된 놀이 공간에서 상품화된 놀이를 구매하여 즐기도록 구조화되어 있다.
상업자본가의 투자로 운영되는 레저산업과 유흥업소는 상업주의적 놀이 문화를 양산한다. 이들의 투자는 놀이의 상품화를 통해 이익을 남기는 것이 최대의 목적이다. 따라서 상품화된 놀이는 아무나 즐길 수 없다. 경제적 능력이 없는 저소득 계층이나 청소년들은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폐쇄성과 은밀성을 지닌다. 그리고 놀이 상품의 판매를 위해 상업적 광고를 통해 대중들을 유혹하며, 대중들의 기호에 영합하여 쾌락을 부추기고 선정적인 놀이 상품을 개발한다.
놀이 공간의 폐쇄성과 은밀성이 놀이 상품의 선정성과 쾌락성 등과 만나면, 이 공간에서 벌어지는 놀이 문화는 퇴폐적일 수밖에 없다. 최근에 생겨난 상업적 놀이 공간인 비디오방과 전화방 또는 러브호텔이 그러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놀이 시설들이다. 놀이산업이 번창함에도 불구하고 산업화된 놀이문화는 청소년들이 이용하기 어렵다. 어린이 공원이나 야영장과 같은 특수한 곳을 제외하면, 어른들을 대상으로 한 놀이시설들이 대부분이다.
왜냐하면 청소년들은 놀이 시설을 이용할 시간적 여유나 경제적 역량이 없으므로, 상업자본가들이 구매력 없는 청소년들을 위한 놀이시설에 투자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인들을 위한 유흥업소는 불야성을 이루고 있어도 청소년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건전한 놀이 공간들은 거의 없다. 따라서 청소년들의 놀이 욕구는 대중매체로 집중된다. 대중매체로 전달되는 가요나 드라마, 영화, 쇼프로그램 등은 경비 부담 없이 쉽게 즐길 수 있을 뿐 아니라, 오디오와 비디오 상품들은 적은 용돈으로도 쉽게 구매해서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방송사들도 이러한 청소년들의 기호를 겨냥하여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까닭에 청소년용 쇼와 코미디, 가요 프로그램들이 늘어가고, 대중가요들도 성인들보다 청소년들의 취향에 맞는 것들이 주류를 이룬다. 코미디나 쇼프로그램에 출현하는 인물들도 십대들의 우상들만 출현하여 유치하고 저급한 유행어와 옷차림들을 퍼뜨리고 있다. 정보화사회로 넘어오면서 청소년들의 놀이는 만화방에서 전자오락실로 놀이 공간이 바뀌었는데, 최근에는 컴퓨터의 보급으로 컴퓨터 오락과 PC 통신을 이용한 놀이로 다시 급격하게 이동하였다. 놀이의 매체는 만화에서 오디오와 비디오, 다시 컴퓨터와 같은 다용도 전자매체로 바뀌었으나, 놀이의 내용은 일본을 거쳐 들어오는 서구적 상업주의 문화라는 점에서 변함없다.
컴퓨터의 보급과 함께 인터넷을 통한 사이버 공간의 가상 놀이 문화는 더욱 드세질 전망이다. 이러한 놀이문화는 사람들로 하여금 놀이를 상품으로 개발하려는 상업성을 부추기며 돈으로 놀이를 구입하는 데 급급하도록 만들어, 놀이의 주체인 인간을 놀이로부터 소외시키게 한다. 놀이의 생산과 소비만 있을 뿐 놀이의 진정한 향유(享有)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고자 하는 대안적 놀이문화로 떠오른 것이 스포츠와 여행이다. 종래 일부 특권층의 놀이로 여겼던 골프와 볼링, 스키 등이 점차 대중화되기 시작하고 여름 피서나 등산과 같은 야외 놀이들이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화유산 답사를 겨냥한 목적 관광이 새로 자리잡기 시작하였으며, 직장 단위로 이루어지는 등산대회나 체육대회, 야유회, 동아리별 취미활동 등이 놀이 문화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골프와 볼링 등 고급 레포츠는 예사 사람들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상업주의적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정부와 지방자치 단체는 대중들이 쉽게 이용할 수 있는 공적인 놀이 공간 마련과 놀이 시설 투자를 통해 상업주의 놀이 문화의 폐단을 줄여 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