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색 비단 장막을 늘인 다락으로, 나무로 단(段)을 엮어 만든 일종의 가식무대(假飾舞臺)이다. 산대라는 명칭은 이 가식무대를 조선시대 채붕(綵棚)·산붕(山棚)·오산(鰲山) 등을 포함한 범칭으로 사용하였고, 산형(山形) 또는 산과 같이 높은 채붕을 산대라고 부른 데서 연유한 것이다.
채붕에 대한 기록은 중국의 경우 수양제(隋煬帝)의 대업연간(大業年間, 605∼616)에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통전(通典)』에 보이며, 우리나라의 경우 신라 진흥왕 때 시작된 팔관회(八關會)에서 채붕을 시설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신라 고사를 계승한 고려 태조 원년(918)의 팔관회에서는 채붕의 높이가 다섯 길이 넘었다고 한다.
고려시대 문헌에는 채붕이라는 말이 많이 쓰인 데 비하여, 조선조 문헌에는 산붕·채붕·산대가 함께 쓰였다. 『고려사』에는 산대잡극의 연희자를 산대악인(山臺樂人)과 산대색(山臺色)이라고 부른 기록이 보이며, 고려 말 이색(李穡)의 시(詩) 「산대잡극」에서는 산대를 봉래산(蓬萊山) 같다고 묘사하고 있다.
고려 초의 채붕은 양쪽에 병립되고 각종 가작물(假作物)도 진열한 가운데서 여러 가지 놀이를 상연하였고, 또 그 자체가 하나의 장식물일 뿐 아니라 그것을 중심으로 하여 각종 치장을 한 것이어서 사치와 기관(奇觀:훌륭한 볼거리)을 다투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색실과 색종이·대문·다리·도로 등에도 장식을 하고, 산대에는 기화이초(奇花異草)까지 장식하고 조수인물(鳥獸人物)·윤거잡상(輪車雜像) 등을 장치하여 패전트적(pageant的) 색채가 더욱 농후하게 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병자호란 등의 전란을 치르면서 산대잡극의 연희자들은 지방으로 흩어졌고, 따라서 산대 설치도 미약해져갔다. 오늘날 중부지방에서 ‘산대놀이’라는 이름의 가면극이 현전(現傳)하게 된 것은 바로 산대라는 명칭에서 연유한 것이다. →산대잡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