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민속극은 주1, 꼭두각시놀음, 무당굿 주2, 발탈, 진도 다시래기 등이 있다. 이외에도 우희(優戱, 골계희), 만석중놀이(그림자 인형극) 등 다양한 민속극의 전통이 있었다.
민속극은 민간 전승의 연극으로서 음악 · 무용 · 연기 · 언어 등이 조화된 종합 예술이다. 민속극은 문자로 기록되지 않고 전해져 온 민간 전승의 연극이기 때문에, 민속극의 대사는 고정된 대본이 있는 것이 아니다. 민중들의 생활상 필요에서 생겨나서, 공동으로 보존하고 재창조한 연극이 민속극이다.
가면극은 가면을 쓰고, 꼭두각시놀음은 인형을 사용하며, 발탈은 발에 가면을 씌워 인형처럼 움직이게 함으로써 가장한다. 특히 집약적인 행위를 통해 갈등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하여 여러 가지 수법을 사용한다. 특히 이를 전달하는 방식으로는 대화와 몸짓이 있다. 또 어떤 다른 민간 전승의 일부이거나, 어떤 다른 민간 전승에 의존해서 공연되지 않고, 그 자체로서 독립되어 있는 예술이다.
현재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된 가면극은 양주 별산대놀이, 남사당놀이의 주3, 통영오광대, 고성오광대, 강릉 관노가면극, 북청사자놀음, 봉산탈춤, 동래야류, 강령 탈춤, 수영야류, 송파 산대놀이, 은율탈춤, 하회별신굿탈놀이, 가산오광대가 있다. 시도무형유산으로 지정된 가면극은 예천 청단놀음(경북), 진주오광대(경남), 퇴계원 산대놀이(경기도), 김해오광대(경남), 속초 사자놀이(강원도)가 있다.
인형극은 꼭두각시놀이, 발탈, 만석중놀이 등이 있었다. 꼭두각시놀이는 남사당패와 같은 유랑 주20 집단뿐만 아니라, 황해도 장연의 꼭두각시놀이, 충남 서산의 박첨지 놀이처럼 마을 주민들에 의해서도 공연되었다. 이는 유랑 예인 집단의 일부가 여러 지역에 정착하여 향인 광대(鄕人廣大)가 되거나, 유랑 생활을 계속한 집단들이 여러 지역에 주4를 보급한 결과이다.
발탈은 발바닥에 가면을 씌워 노는 인형극이다. 주5 이전부터 남사당패 등에 의해 공연되어 왔고, 그것이 광무대와 가설 극장(포장굿), 창극단 등으로 이어졌다. 발탈은 포장막 속에서 발탈 인형을 조종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가 발탈의 대사와 노래도 맡는다. 포장막 밖에는 발탈 인형을 상대하며 대화를 주고 받는 주7가 있는데, 그는 발탈 인형과 재담 및 노래를 주고받는다. 발탈은 재담과 노래에 큰 비중을 두고 재담 위주로 진행되는 것이 특징이다.
만석중놀이는 무언(無言)의 인형극으로서 음력 4월 8일 석가 주8에 연행되었다. 만석중놀이는 인형에 줄을 매어 조종하며, 대사가 없이 음악 반주에 의해 연출되었다. 인형으로는 만석중, 노루, 사슴, 잉어, 용 등이 등장했다. 일찍이 1930년대에 연극학자 김재철이 만석중놀이에 대해 자세하게 소개한 바 있으나 오랫동안 전승이 중단되었다가, 최근 복원하여 공연하고 있다.
무당굿놀이는 무당이 하는 굿에 포함되어 있는 무극(巫劇)이다. 여러 거리로 구성된 큰 굿에서는 기본적인 주9를 진행하고, 맨 마지막 거리에서 뒷전 또는 거리굿이라고 하는 여흥적인 연희를 연행한다. 뒷전에서 무당은 굿판에 모여든 잡귀들을 잘 먹여 보낸다면서 관중을 즐겁게 하는 연희를 공연한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놀이의 흥미에 대한 요구가 커지자, 무당굿놀이는 굿의 주술적인 목적이 약화되고 흥미 위주의 놀이로 바뀌었다.
제주도의 입춘굿 · 세경놀이 · 영감놀이, 경기도의 소놀이굿, 평안도의 제석방아놀이 등은 굿의 한 대목이 원래부터 놀이의 형태를 갖추었고, 배역이 분화되었으며, 가면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무당굿놀이는 가면을 사용하지 않는다. 설정된 인물의 성격을 나타내기 위해 주10나 옷을 이용해 가장한다. 남자 무당이 머리에 수건을 쓰고 치마를 입고서 여자로 분장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전남 진도에서 장례 때 당골 무당들이 주11에서 연행하던 진도 다시래기는 주12의 성격을 띤 민속극이다. 삼국시대 이래 장례에서 가무를 행하던 풍습이 조선시대까지 계속되었는데, 다른 지역의 장례 놀이가 간단한 데 비해 진도 다시래기는 비교적 연극적인 짜임을 갖추었다.
그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우희를 주13, 조희(調戱), 주14, 골계희 등으로 불러왔다. 그러나 우리의 여러 기록이나 중국 기록에서는 이런 연희를 우희 · 주15 · 주16로 표현하고 있다. 한국과 중국의 우희에는 임금을 풍간하는 내용, 부패한 관원을 풍자하는 시사적인 성격을 띤 내용, 흉내내기 연희, 주유희(侏儒戱, 주17가 있었다. 『고려사』 열전 염흥방(廉興邦)조에서는 “흥방이 일찍이 아비가 다른 형인 이성림(李成林)과 함께 집에 갔다가 돌아오는데 말과 마부가 길에 가득 찼다. 어떤 사람이 우희(優戱)를 하며 극세가의 노비가 백성을 괴롭혀 조세를 거두는 모양을 보았다.……”처럼 이미 이런 연희를 우희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동안 조선시대의 우희를 흔히 소학지희라고 불러왔다. 소학지희가 골계희를 가리키는 명칭이라면 다른 기록에서도 발견되어야 할 것이지만, 이 용어는 『문종실록』에 단 한 번 나온다. 실제로는 조선시대에도 『조선왕조실록』,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의 『어우야담』 등에서 이런 내용의 연희를 우희 · 창우희 · 배우희라고 기록하고 있다. 『어우야담』에서 소개하는 진상(進上)놀이는 “공헌대왕이 대비전을 위해 대궐 내에서 주18을 펼쳤다. 서울의 배우인 귀석(貴石)이 배우희(俳戱)를 잘해 진풍정에 나갔다.……”라고 시작한다. 항간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꾸며 보여 준 이 연희를 배희 즉 배우희라고 표현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우희는 매우 활발하게 전승되었고, 이 전통 속에서 우희가 판소리 · 가면극 · 무극 · 재담 · 만담 등에 영향을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