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남도 북청군에서 정월대보름에 행해지던 사자놀이. 1967년 중요무형문화재(현, 중요무형유산)로 지정되었다. 북청군 중에서도 북청읍의 사자계(獅子契), 가회면의 학계(學契), 구 양천면의 영락계(英樂契) 등의 사자놀음이 유명하며 도청(都廳)을 중심으로 해마다 정월대보름에 놀아왔다.
특히 북청읍 사자는 댓벌[竹坪里]사자, 그것도 다시 이촌사자 · 중촌사자 · 넘은개사자 · 동문밖사자 · 후평사자 · 북리사자 · 당포사자 등으로 나뉘며, 동리마다 제각기 사자를 꾸며서 놀았고, 각처에서 읍내로 사자가 모여들어 자연히 경연이 붙었는데, 1930년경부터 본격적으로 경연을 시키고 우승팀을 선정하기에 이르러 청해면 토성리의 사자놀이를 제외한 다른 작은 사자놀이팀들은 사라지게 되었다고 한다.
청해면 토성리의 사자놀이는 관원놀음과 합쳐져서 행해지므로 더욱 유명했는데, 토성리는 조선 태조 때의 공신 이지란(李之蘭)의 고지(故地)로 흙에 띠를 입히고 가장자리에 큰 나무를 심은 토성(土城)과 제단터가 남아 있다.
<북청사자놀음>은 삼국시대의 기악(伎樂) · 무악(舞樂) 이래 민속놀이로 정착된 가면놀이로, 주로 대륙계 · 북방계인 사자무가 민속화된 대표적인 예로 볼 수 있다. 북청일대에서는 음력 정월 14일에 여러 마을에서 장정들의 편싸움이 벌어졌으며, 달이 뜬 뒤부터 시작된 사자놀음은 15일 새벽까지 계속되었고, 16일 이후는 초청받은 유지(有志)의 집을 돌며 놀았다.
이 때 먼저 마당으로 들어가서 난무를 하면 사자가 맹렬히 뛰어가 내정(內庭)을 거쳐 안방문을 열고 큰 입을 벌리고 무엇을 잡아먹는 시늉을 하고, 다음에는 부엌에 들어가서 같은 행동을 한 뒤에 다시 내정 한복판에 나와서 활발하고 기교적인 춤을 춘 뒤에 가장 먼저 물러나는 것이다.
이 때 주인의 청에 따라 부엌의 조왕(竈王)과 시렁 앞에 엎드려 조령(祖靈)에게 절을 한다. 또 아이를 사자에게 태워주면 수명이 길다고 하여 태우기도 하고, 사자 털을 몰래 베어다두면 수명장수한다는 속신(俗信)이 행해졌으며, 수명장수를 빌어 오색포편(五色布片)을 사자 몸에 매어주기도 하였다.
6·25전쟁 뒤 월남한 연희자들에 의하여 현재는 서울을 중심으로 전승되고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먼저 퉁소와 북에 의한 반주와 애원성에 맞춰 ‘애원성춤’을 추고, 이어 ‘마당돌이’로 하인 꼭쇠(꺾쇠)가 양반을 끌고 나오고 악사가 뒤따른다. 양반이 사당과 무동(舞童) · 꼽새 등을 불러들여 한데 어울려 한참 논 뒤에 사자를 불러들인다.
‘사자춤’에서는 상좌중이 계속 함께 춘다. 사자가 한참 여러 가지 춤추는 재주를 부리다가 기진하여 쓰러진다. 양반은 놀라 처음에는 대사를 불러 ≪반야심경 般若心經≫을 외우나 사자는 움직이지 않고, 의원을 불러들여 침을 놓으면 그 때서야 다시 일어난다. 꼭쇠가 사자에게 토끼를 먹이니, 사자는 기운이 나서 굿거리장단에 맞춰 춤을 춘다.
양반이 기뻐서 사자 한 마리를 더 불러 춤을 추게 하고, 사당춤과 상좌의 승무가 한데 어울린 다음, 사자가 퇴장한 뒤에 동리사람들이 <신고산타령> 등을 부르면서 군무를 추고 끝낸다.
<북청사자놀음>은 대사의 묘미나 기타 풍자적인 측면보다는 사자춤의 묘기와 흥겨움이 위주가 되어왔다. 그리하여 양반과 꼭쇠가 함께 등장해도 양반과 하인의 관계는 그대로 유지되며 꼭쇠는 다른 탈춤의 말뚝이와 같은 구실이 매우 약하다. 또한 다른 탈춤처럼 파계승에 대한 풍자나 처첩간의 갈등과 서민의 생활상 등도 나타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북청사자놀음>을 민속극보다는 사자춤 위주의 민속놀이로 보기도 한다. 현존하는 민속극 중에서 사자춤이 들어 있는 것은 <봉산탈춤> · <강령탈춤> · <은율탈춤> · <통영오광대> · <수영야류> 등이나, 이들 사자춤은 간단하여 보통 두 사람이 사자의 전신(前身)과 후신(後身)을 맡으며, 앉아서 좌우로 머리를 돌려 이도 잡고 꼬리를 흔들며 몸을 긁기도 하고, 타령이나 굿거리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기도 한다.
통영이나 수영사자는 장단에 맞추어 담보와 싸우는 춤을 보이고, 나중에 담보를 앞다리 안으로 끌어들여 잡아먹는 시늉을 한다. 북청사자는 머리쪽에 한 사람, 뒤채에 한 사람, 보통 두 사람이 추는데, 다른 사자의 경우처럼 사자가 크면 세 사람 이상이 들어가는 수도 있다.
앞채사람이 뒤채사람의 어깨에 올라타 높이 솟기도 하고, 앞채사람이 먹이인 토끼(전에는 아이였다고 함)를 어르다가 잡아먹는 과정을 흡사하게 연기하기도 하여, 어느 사자춤사위보다도 교묘하고 힘찬 동작이 특징이다.
일본의 악서(樂書)인 ≪신서고악도 信西古樂圖≫의 ‘시라기고마(新羅狛)’라는 것은 직립(直立)한 사자 모양을 그린 것인데, 이것은 앞채사람이 뒤채사람 어깨 위에 올라탄 직립 사자로 안에 두 사람이 들어 있는 것이 분명하며, 이것을 기악사자(伎樂獅子)라고 한다. 이러한 것으로 미루어보아도 북청사자의 무법(舞法)이 신라 이래의 것으로, 오래된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
또 ≪교훈초 敎訓抄≫나 ≪신서고악도≫에 의하면 기악과 무악 이래의 대륙계(大陸系) 사자기(獅子伎)에는 ‘시시코(獅子兒)’니 ‘쓰나하키(綱引)’니 하는 사자 인도역이 있고 자웅(雌雄) 한 쌍의 사자가 나오기도 하는데, 북청사자에서 양반의 하인 꼭쇠나 사자 앞에서 승무(僧舞)를 추는 상좌는 선도역(先導役)이며, <봉산탈춤>의 사자과정에서 마부도 같은 역이다.
또 <북청사자놀음>에서는 쌍사자(雙獅子)를 놀리기도 한다. 중국이나 일본의 민속사자춤에서는 사자를 불보살(佛菩薩)로 숭상하는데, <봉산탈춤>에서도 사자를 문수보살(文殊菩薩)과 관련시키고 파계승을 벌하러 내려온 부처님의 사자(使者)로 보고 있다.
송석하(宋錫夏)에 따르면, 초기의 일본 사자는 현재의 북청사자와 비슷하며 그것은 ≪신서고악도≫의 ‘사자무도(獅子舞圖)’에 의하여 명백하다고 한다. 따라서 이것은 일본사자가 한국을 경유해 건너간 것임을 보여준다. 중국의 민속사자춤 역시 원소절(元宵節 : 음력 정월 15일) 전후에 행하여지는 것으로 북방계와 남방계가 있다.
이것으로 볼 때 한국의 사자놀음은 북방계에 가까운 것이며, 또 하회가면(河回假面) 가운데 주지탈은 사자탈을 뜻하는 것인데, 그 가면에 꿩털을 꽂는 것은 사자의 갈기로서 사용한 것이며, 중국 남방계 사자에서도 그런 예가 있어 주지탈은 사자탈임을 더욱 확증시켜준다.
이백(李白)의 <상운악 上雲樂>에 읊은 ‘오색사자(五色獅子)’는 현재 북청사자의 몸이 오색포편을 그물에 매어 만든 것으로 보이며, 이것은 기악의 사자가 사자 한 마리에 오색을 쓰는 약식(略式)이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백수(百獸)의 왕으로 벽사할 만한 힘을 가졌다고 믿어지는 사자로 하여금 잡귀를 쫓고 동리의 안과태평(安過泰平)을 비는 벽사진경(辟邪進慶)에 주목적이 있다.
가가호호를 순회하면서 벽사를 해주고 대가로 받은 돈과 곡식은 동리의 공공사업 즉, 장학금 · 빈민구제 · 경로회비용 및 사자놀이비용 등에 보태왔다. 이것은 곧 남쪽지방의 매귀(埋鬼) · 걸립(乞粒) 등과 맞먹는 놀이이다.
<북청사자놀음>에 쓰이는 가면은 사자(2개) · 양반 · 꼭쇠 · 꼽새 · 사령(2개) 등이며, 기타 등장인물인 무동 · 사당 · 중 · 한방의(韓方醫) · 거사 등은 가면 없이 복색만 갖추고 나온다.
가면의 주재료는 바가지이고, 사자가면의 경우 피나무에 사자의 얼굴 모양을 조각하였다. 반주 악기는 퉁소 · 장구 · 소고 · 북 · 꽹과리 · 징이다. 자료로는 이두현(李杜鉉)이 연희자 윤영춘(尹迎春) · 마희수(馬羲秀) 등의 구술을 토대로 채록한 대사 채록본이 있다.
역대 예능보유자로는 윤영춘(사자앞머리역) · 마후섭(馬厚燮, 사자뒤채역) · 마희수(퉁소악사 · 칼춤) · 김영곤(金映坤, 퉁소악사) · 전중식(全仲植, 퉁소악사) · 동태선(董泰善, 북악사) · 변영호(邊永鎬, 사자제작 · 퉁소악사) · 김수석(金壽石, 사자앞머리역) 등이었으며, 1998년 현재 동성영(董誠英, 사자앞머리역) · 여재성(呂在成, 사자뒤채역) · 이근화선(李根花善, 사당춤) · 전광석(田光石, 칼춤) 등이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