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오기(新羅五伎)의 하나. 최치원(崔致遠)은 그의 <향악잡영 鄕樂雜詠> 5수에서 산예를 다음과 같이 읊었다. “일만리라 유사에서 건너왔기로, 누런털은 다 빠지고 먼지는 부얘. 몸에 배인 착한 덕에 슬겁게 노니, 온갖 짐승 재주좋다 이와 같으랴(遠涉流沙萬里來 毛衣破盡着塵埃 搖頭掉尾馴仁德 雄氣寧同百獸才).” 신라오기 중에서 그 유래를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사자춤인 산예이다.
시에서 읊은 유사(流沙)는 원래 고비(Gobi, 戈壁)사막을 이른다. 사자무(獅子舞)는 인도 특유의 동물의장무(動物擬裝舞)로서 서역과 동방 여러 나라에 널리 유행하게 된 무악(舞樂)으로, 그 여풍이 중국·한국·일본 등지에 지금도 전해온다.
신라의 사자기(獅子伎)는 구자악(龜玆樂)에서 온 중국의 서량기(西凉伎) 계통의 놀이를 받아들인 것이며, 일본의 사자무 역시 한국을 거쳐 받아들인 기악(伎樂)과 무악 그리고 산악(散樂) 이래의 대륙계의 오랜 역사를 가지며, 일본 예능사(日本藝能史)에서 ‘사자물(獅子物)’이라는 계보마저 성립시키기에 이르고 있다.
사자는 한국에 일찍 소개되었는바, 그 기록이 지증왕 13년(512) 이사부(異斯夫)의 우산국(于山國) 정벌기사에 나온다. 또한 ≪삼국사기≫ 악지(樂志)에는 우륵(于勒)이 지은 12곡 중에 사자기가 제8곡으로 들어 있다. 백제기악(百濟伎樂)에도 사자기가 있었음이 일본 악서(樂書)의 기록에 나오며, 신라는 불교와 관련된 우수한 사자의 조각품을 남기고 있다.
이 신라오기의 사자무는 이미 향악화되었으리라 짐작되지만, 아직 서역계의 사자춤의 모습이 보였으리라 생각된다. 그 뒤 점차 한국화되어서 조선시대 김홍도(金弘道)의 그림으로 전하는 <평안감사환영도 平安監司歡迎圖>나 ≪화성성역의궤 華城城役儀軌≫의 <낙성연도 落成宴圖>에 보이는 사자춤의 모습이 되고, 현존하는 민속극인 <북청사자놀음>·<봉산탈춤>, 오광대와 야류(野遊)에도 각각 민속사자춤이 추어지고 있다. →신라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