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신은 근방 구산리에 있는 성류굴(聖留窟)에 있었다고 믿어진다.
『삼국유사』 권제3 탑상편 대산오만진신조(臺山五萬眞身條)에 의하면 이 굴의 본래 이름은 탱천굴(撑天窟)이고, 신라 신문왕의 아들인 보천태자(寶川太子)가 수도하던 곳이었는데, 그 굴신(窟神)이 보천에게서 보살계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는 한편, 굴 앞에는 성류사(聖留寺)가 있는 등, 예로부터 중요한 신앙처의 구실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매년 봄에 굿을 올리는데, 이때 무당은 오색으로 물들인 용머리 모양의 종이탈을 쓰고 춤을 추었다고 한다. 이 굿은 지금도 동해안일대에서 거행되고 있는 별신굿에서 서낭님과 용왕님을 화해, 동참시킨다는 화해굿(또는 합석굿)에 해당하는 굿이었으리라고 짐작된다.
이 구리재서낭은 주로 행상인들이 섬겼으며, 굿을 벌여 치성을 잘 드리지 않으면 이 고개에서 호환(虎患)을 당한다고 전해온다.
이와 같이 굴을 신당으로 숭상하는 민속은, 고구려의 국중대회인 동맹(東盟)에 제사를 모시던 신당이 굴이었고, 제주도의 궤네깃당을 비롯한 여러 곳의 본향당(本鄕堂)이 굴 안에 신단을 모시고 있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