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해방 이후 「양주별산대놀이」 해금 전승자로 지정된 예능보유자.
내용
14세 때부터 아버지와 이창유(李昌裕)에게서 산대춤을 배웠는데, 특히 왜장녀의 배꼽춤은 이들을 본받아 배웠다고 한다. 학력은 서당에 다녔을 뿐이나, 20∼30세 동안에는 헌병보조원을 지내고, 그 뒤로는 광복 10년 전까지 순사를 지냈으며, 광복 때까지 소방단장과 경방단부단장(警防團副團長) 등을 지냈다.
순사를 그만둔 뒤에는 양주구읍에서 소실을 두고, 청요리점을 경영하기도 했다. 그는 민족항일기에도 「양주별산대놀이」를 계속하였고, 6·25남침으로 마을이 소실되었으나, 환도 후 다시 가면을 제작하여 탈놀이를 계속하게 한 중심인물이었다.
1957년 11월 9일 한국연극학회 주최로 이화여자고등학교 노천극장에서 「양주별산대놀이」를 공연함으로써 광복 후 처음으로 일반에게 이들의 탈놀음을 선보였고, 박준섭(朴俊燮) · 박동환(朴東煥)과 더불어 명연희자로서의 솜씨를 보였다.
아들 상용(相容)도 3대째 대를 이은 「양주별산대놀이」 연희자로 1964년에 중요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유산)인 「양주별산대놀이」의 예능보유자(목중, 도끼누이역)로 지정되었다. 특히, 노장과 취발이역을 잘 하였으며 가면을 제작했고, 「양주별산대놀이」가 오늘날에 이어지게 한 중심인물이다.
참고문헌
- 『한국가면극(韓國假面劇)』(이두현, 문화재관리국,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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