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1962. 성운(盛運)의 아들로 경기도 양주구읍(楊州舊邑)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무부(巫夫)이자 「양주별산대놀이」의 명연희자이며 모가비였고, 어머니 한간난이는 ‘옴팽이 만신’이라는 이름으로 양주군일대에서 이름난 큰무당이었다.
14세 때부터 아버지와 이창유(李昌裕)에게서 산대춤을 배웠는데, 특히 왜장녀의 배꼽춤은 이들을 본받아 배웠다고 한다. 학력은 서당에 다녔을 뿐이나, 20∼30세 동안에는 헌병보조원을 지내고, 그 뒤로는 광복 10년 전까지 순사를 지냈으며, 광복 때까지 소방단장과 경방단부단장(警防團副團長) 등을 지냈다.
순사를 그만둔 뒤에는 양주구읍에서 소실을 두고, 청요리점을 경영하기도 했다. 그는 민족항일기에도 「양주별산대놀이」를 계속하였고, 6·25남침으로 마을이 소실되었으나, 환도 후 다시 가면을 제작하여 탈놀이를 계속하게 한 중심인물이었다.
1957년 11월 9일 한국연극학회 주최로 이화여자고등학교 노천극장에서 「양주별산대놀이」를 공연함으로써 광복 후 처음으로 일반에게 이들의 탈놀음을 선보였고, 박준섭(朴俊燮) · 박동환(朴東煥)과 더불어 명연희자로서의 솜씨를 보였다.
아들 상용(相容)도 3대째 대를 이은 「양주별산대놀이」 연희자로 1964년에 중요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유산)인 「양주별산대놀이」의 예능보유자(목중, 도끼누이역)로 지정되었다. 특히, 노장과 취발이역을 잘 하였으며 가면을 제작했고, 「양주별산대놀이」가 오늘날에 이어지게 한 중심인물이다.